[박성기 도보여행 칼럼니스트] 강화도는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이 교차하여 서해와 만나며, 바다에서 내륙 어디로나 통할 수 있는 수로가 있기에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천혜의 요새 중 하나이다.
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고구려와 백제가 치열하게 대치하였고, 몽골에 대항하기 위해 강화도로 천도(1232년)한 고려가 39년간 몽골과 항전을 한 곳이다.
조선은 한양을 지키는 전초기지로 섬 전체를 아우르는 동서남북 해안 전역엔 5진 7보 53돈대를 만들고 외적의 침입에 방비했다.
호국돈대길은 강화도와 김포 사이로 바닷물이 강처럼 흐른다 해서 이름이 붙은 염하강(鹽河江; 짠물이 흐르는 강)을 따라 돈대(墩臺)와 돈대 사이를 걷는 길이다.
갑자기 떨어진 기온 탓에 바람이 차고 손이 시리다. 염하강(鹽河江) 건너 김포 쪽에서 부는 찬바람에 손을 비벼본다. 맑고 푸르러 조금만 손을 내밀어도 파문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 나갈 것만 같은 명징한 하늘에는 솜털같은 구름이 몽실몽실 피어오른다.
몇 주 전 강화 나들길 1코스와 강화산성을 걷고 이곳 갑곶돈대에서 멈췄는데, 다시 여기에서 남쪽으로 용진진, 광성보, 덕진진, 초지진까지 17km를 걷기 위해 같은 자리에 섰다.
강화대교 바로 남단의 갑곶돈대에 들어섰다. 강화의 옛 고구려 지명인 갑비고차(甲比古次)에서 갑곶이란 이름이 유래했다. 갑곶돈대 아래도 말없이 흐르는 염하강은 영욕의 역사를 지켜보았겠다. 강화의 역사를 한곳에 모아놓은 전쟁박물관 앞에는 선정비가 줄느런히 서 있다.
갑곶돈대를 나와 염하강변에 들어선다. 염하강 위의 나룻배가 강변의 철조망에 갖혀 있는 것처럼 철조망을 걷어내고 싶다. 남북분단의 상처여서 더욱 보기에 답답하다.
염하강은 월곶돈대에서 시작해 황산도까지 20여 km를 흐르면서, 대몽항쟁을 하던 고려 때부터 조선의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지나기까지 우리 역사의 변곡점을 지켜봤을 터다.
갯벌 위로 늘어선 갈대가 바람에 반기듯 연신 고갯짓이다. 가을날은 눈이 부시도록 맑아 갈대가 마치 은빛 물결로 파도처럼 일렁여서 마음을 빼앗는다.
역사를 되새기며 걷는 길이건만 풍경에 마음을 빼앗겨 그저 아득하기만 하다. 갯벌 위를 흐르는 물길은 작은 계곡을 만들고, 갯벌은 작은 둔덕을 만들었다. 망둥어를 잡는 조객은 강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입질을 기다리고 있다.
쌀쌀한 가을 날씨에 몸을 움츠리며 걷는 내내 해를 가린 구름은 낯설고 기묘한 풍경을 만들어 낸다. 더러미포구를 지나 용진진에 들어선다.
용진진((龍津鎭)은 가리산돈대, 좌강돈대, 용당돈대 등 3개 돈대를 관리하는 본진인데, 석축 대부분이 없어지고 홍예문 두 곳만 남아 있다가 문루와 좌강돈대가 1999년에 복원되면서 지금의 형태로 복원되었다. 문루 밑에서 바라보는 하늘색이 아름다와 자꾸 카메라를 눌러대며 눈에 가득 담는다.
가을은 길에 아름다운 야생화를 뿌려놓았다. 잠시 숲길을 따라 돌아가니 용진진 소속의 용당돈대(龍堂墩臺)다. 해안으로 돌출된 용당돈대는 염하강 좌우로 시야가 확보되어 한결 눈이 시원하다. 타원형의 돈대로 4개의 포대 자리가 있고 내부에는 건물터가 있어 이 돈대 안에 병사가 주둔하던 건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건물지에 팽나무 한 그루가 이채롭다. 석축(石築)의 하얀 색이 새로 복원된 티를 확연히 드러내 세월의 흔적이 더 묻어야 예스러워지겠다.
용당돈대를 나와 걷는 바닷가 제방길은 코스모스가 군데군데 길손을 반기고 바람에 하늘대는 갈대와 붉은 함초가 아름답다. 숲길을 지나자 화도돈대(花島墩臺)가 눈에 들어온다.
장방형의 키 낮은 화도돈대는 포대 자리도 없고 위는 평평하여 완전한 형태의 돈대로 복원된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돈대 왼편으로 감나무에는 빨갛게 감이 익어 가을의 정취를 더 짙게 내뿜고 있다. 땅에 떨어진 감을 집어 들고 맛보니 달콤하기 그지없다.
화도돈대를 나와 오두돈대(鼇頭墩臺)로 향한다. 맑던 하늘은 어느새 구름이 가득하고 어둑하다. 비라도 내릴 것처럼 음습해지며 바람도 차고 햇볕이 사라져 더 오싹하다. 둥그런 원형의 형태를 지닌 오두돈대에 도착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졌던 곳이어서였을까, 외세에 유린당하던 우리 민족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다.
오두돈대를 나와 오두리 구석마을에 도착하니 벽돌로 쌓아 올린 강화전성(江華塼城)이다. 강화외성은 고려가 강화도로 천도할 때 동쪽 해안에 23km에 걸쳐 축조된 토성인데, 고려가 몽골과 강화할 때 모두 헐렸다.
조선시대도 해안방어를 위해 강화 외성을 축조하고 보수하였는데, 오두돈대의 외성은 영조 때 벽돌로 개축한 성이다. 정조 때 만들어진 같은 형식의 수원 화성보다 50여 년이 앞섰다.
성을 쌓을 당시 심었을 느티나무가 큰 나무로 자라면서 벽돌을 밀어내서 허물어진 곳도 있었다. 멀리서 바라보면 큰나무가 풍성하여 마치 동산처럼 보였다.
무신 어재연(魚在淵, 1823년 ~ 1871년) 장군의 동상을 지나 광성보(廣城堡)에 이른다. 개화기 병인양요(丙寅洋擾, 1866년)와 신미양요(辛未洋擾, 1871년)는 처절한 전투를 통해 조선에 수많은 전사자가 발생하게 했다.
치열한 싸움이었지만 화력의 부족으로 일방적으로 당하였던 슬픈 역사의 장소가 바로 이곳이다. 총소리 포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듯하다. 포의 사거리가 미국군의 사거리와는 비교가 안 되게 짧아 어재연(魚在淵) 장군이 이끄는 광성보와 돈대의 수비군이 전몰했다. 신미양요가 150년 전의 역사이건만, 여전히 마음이 아프다.
광성보에는 미해군과 격돌하다 순국한 분들을 모신 60인의 신미순의총(辛未殉義塚)과 순절비쌍충비(雙忠碑)가 모셔있다.
쌍충비와 순의총을 보고는 고마움에 고개를 숙였다. 목숨을 던져가며 보(堡)를 지키려 했던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무명 영웅들을 마음에 담았다.
광성보 안의 손돌목돈대(孫突項墩臺)에 올라 염하강을 둘러보고 아래로 내려가 용두돈대(龍頭墩臺)에 이르렀다. 용두돈대는 해안쪽으로 용머리처럼 길게 내민 곳에 만들어진 돈대로 강의 좌우를 살피고 공격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염하강은 아주 빠르게 흘러가며 회오리를 치고 강 중간중간에 커다란 포말을 일으키며 기괴한 물소리를 낸다.
용두돈대와 건너편 김포의 손돌묘 사이가 손돌목이다. 밀물이 들어오는지 오전 출발할 때 보다 강의 수위가 더 높아졌다. 초지진 쪽에서 바닷물이 거세게 밀려오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몽골이 강을 넘지 못한 이유를 알겠다.
용두돈대를 나와 광성포대(廣城砲隊)를 지난다. 포대는 염하강과 가장 가까운 지면에서 건너편을 향해 포좌를 놓았다. 치열했던 포격전을 상상하며 숲길로 들어섰다.
광성포대에서 덕진진으로 향하는 숲길 구간이 끝나는 지점 감나무에는 감이 빨갛게 익고 바닥에는 바싹 마른 감잎이 수북하고 그 위로 군데군데 감이 떨어져 있다. 누구도 추렴하지 않아 그냥 길에 나뒹구는데도 가을을 진하게 느낀다.
오후 두 시가 막 넘었는데 해가 구름이 가려 어둡고 춥다. 찬바람에 사납게 울어대는 갈대를 따라 걸으니 덕진진(德津鎭)이다.
덕진진(德津鎭)은 강화 해협을 지키는 요충지로 예하에 남장포대(南障砲台)와 덕진돈대(德津墩臺)를 거느리고 있다. 광성보와 더불어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 외세에 맞서 치열하게 싸운 장소이다.
공조루(控潮樓)를 지나면 남장포대가 바로 있는데 강과 같은 눈높이의 저지대에 15문의 포대가 설치되어 신미양요때 덕진돈대와 더불어 미국 아세아함대와 치열한 포격전을 치렀다.
그때 덕진진과 남장포대와 덕진돈대는 대부분 파괴되어 공조루의 홍예문만 남았다가 돈대와 성곽, 그리고 공조루가 1976년에 복원되었다.
덕진돈대는 정방형의 돈대로 2m 높이다. 이곳에 올라 바라보니 사방이 시원하게 트여있어 막힘이 없다.
건너편을 바라보니 김포의 덕포진이 보인다. 적들이 침공하면 덕진진은 덕포진과 더불어 손돌목 좁은 해협을 사이에 두고 협공작전을 펴기에는 최적의 장소일 것으로 보여 선인들의 혜안에 감탄이 들었다.
초지대교가 바로 눈앞으로 보인다. 돈대를 따라 돌아 아래 강으로 조금 내려서니 흥선대원군이 세운 경고비다. 내용은 ‘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라 쓰여있다. 즉, ‘바다의 길을 막고 지켜서, 다른 나라의 배 통과를 허락지 말아라’라는 경고의 글이다.
경고비를 지나 초지진을 향한다. 초지진이 목적지라 발걸음이 빨라진다. 강화도 99칸 가옥 학사재를 지나 덕진교를 건너고 다시 바닷길로 접어든다. 낚시꾼들이 길을 막고 망둥어 낚시를 하니 길이 좁다.
초지항에 들어섰다. 사람들로 북적이던 거리는 썰렁하다. 건너편 대명항에는 조어를 나가지 않은 배들이 항구에 묶여있어 쓸쓸하다.
초지진(草芝鎭)에 들어섰다. 큰 소나무가 초지돈대를 지키고 있어 가까이 갔다. 강화유수 홍중보가 1656년에 초지진을 설치할 때 심었다 하니 이 소나무는 처음부터 초지진의 풍상을 지켜봤을 터다. 신미양요 때 포를 맞은 흔적이 남아 있어 한참을 들여다본다.
허물어져 돈대(墩臺)의 터와 성의 기초만 남아 있던 초지진은 돈대를 복원하였으나 진사(鎭舍)는 복원을 하지 못했다. 초지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자리에 이미 각종 시설이 들어서 있어서 축조 당시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이 안타깝다.
강화대교 아래 갑곶돈대부터 초지대교 아래 초지진까지 돈대와 보와 진을 둘러보는 17km의 호국돈대길을 마쳤다. 출발할 때의 맑고 투명하던 하늘은 초지진에 이르러 내 마음을 아는 것처럼 어두워졌다.
삼국시대와 고려, 조선을 거치는 동안 우리의 역사를 목도하며 증언하는 강화도의 동쪽 호국돈대길이다.
밀물과 썰물의 편차가 심한 염하강처럼 굴곡진 우리의 역사가 다시 되풀이되면 안된다는 생각을 해본다. 강화(江華)가 ‘강 아래의 아름다운 고을’이란 이름처럼 항상 평화롭고 아름다웠으면 좋겠다.
▶코스 : 강화나들길 2코스 호국돈대길 17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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