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와 몽골의 동맹, 제국을 제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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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와 몽골의 동맹, 제국을 제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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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3.29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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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족 결단이 주는 교훈…중국 눈치 보는 수동적 대응으로 얻는 게 없다

(임종화 경기대 무역학과 객원교수)

1. 다시금 상기해 보는 청나라의 건국

 

13세기 몽골과 송나라의 동맹이 여진족의 금나라를 멸망시킬 당시, 만주의 여진족이 다시 중원을 차지해 제국을 건설할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산업혁명이 후 획기적인 문명 발전사의 시각으로 오늘날 동북3성(만주)을 평가한다면 중국에서 가장 중요한 요충지 이다. 천연자원 매장량과 낮은 인구밀도와 낮은 소득수준을 가졌지만, 만주지역이 가진 잠재력은 무궁무진 하다.

중원으로 통칭되는 중국의 역사에서 전통적 중화(中華) 세력은 특이하게 모택동의 중화인민공화국과 몽골이 세운 원나라를 제외한다면 한 번도 이 지역을 통치해 본적이 없다. 역으로 동북3성 지역의 세력은 전통적으로 중원을 위협 및 영향력을 행사해 왔는데, 몽골이 세운 원나라가 중원을 통치하는 방식도 “옷치긴 테무게”로 통칭되는 만주지역을 관할하던 몽골의 황금씨족이 어느 태자를 후원하느냐에 따라 元나라 황제의 운명이 바뀐 역사적 사실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은 매우 특이하다.

17세기초 7대명으로 통칭되는 누르하치의 명나라를 향한 선전포고를 시작으로 여진족(청나라)의 중원지배와 제국 성립의 단계는 총 6단계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1. 누르하치 자신이 속해있던, 건주부(建州部) 통합의 상징인 만주국의 수립.

2. 동북부 여진(만주)족 통합의 상징인 아이신국 형성

3. 동북부에서 만주 · 몽골 · 한족 통합의 상징인 대청국 성립

4. 중국 내부로 들어와 한족 병합의 상징인 제4대 황제 강희제에 의한 중국통일

5. 완성된 지배권으로 민족 구분이 모호해진 제5대 황제 옹정제의 절대권 확립

6. 5번을 배경으로 번의 병합을 상징하는 제6대 황제 건륭제의 영토 확장

 

2. 만몽일체(滿蒙一體)의 시작은 백은(白銀) 확보를 위한 혼맥(婚脈)

 

명나라 말기 환관정치의 폐해와 빈번한 농민봉기가 명나라의 불안요소로 작용한 사례는 있지만, 만주지역 군벌의 수장인 누르하치 따위(?)가 넘보기에 明제국의 국력은 너무도 컸다. 이것은 이후 홍타이지로 연결되는 여진(만주)족의 공통의 고민거리이기도 했다. 탁월한 군사능력과 독립된 통상무역 루트를 가지고 있었던 만주족들에게 몽골 세력과의 연합은 필연 섞인 우연이라고 볼 수 있다. 청나라의 중원지배 자체가 사실 필연 섞인 우연인 것이, 누르하치 스스로도 생전 중원 전체에 대한 지배를 목표로 명 나라에 대항했다는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렇지만 경제적 변화는 역사를 바꾼다. 가난했던 여진(만주)족이 명나라에 대항해 크게 세력을 넓히려는 군중심리가 작동한 변화에는 당시 세계적으로 폭발적으로 늘어난 백은(白銀)의 역할이 컸다. 풍성해진 은으로 인해 동서무역은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스페인과 일본에서 생산된 銀의 대부분이 명나라로 빨려 들어갔다. 누르하치의 여진족도 이 흐름을 타고 상업과 군사운용에 필요한 힘을 축적할 수 있었고, 잘 안 알려 진 사실이지만 누르하치 스스로도 금은광산과 철광을 개발해 임진왜란이 끝나던 1599년에는 명나라와의 교역이 아니더라도 자체적으로 은과 철광을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을 명나라와 조선의 기술자를 통해 확보하였다.

만몽일체(滿蒙一體)로 표현되는 만주족과 몽골의 연합이 생기던 시기도 누르하치의 백은(白銀)을 확보하려는 연장선상에서 평가해야 하는 것이 정설이다. 여진과 몽골은 그 거주지역이 달랐지만 중원지역 바깥에 있다는 점에서 명나라에게 서로 다를 바 없 는 외이(外夷)였다. 사실 여진의 성장과정은 다른 관점에서 명나라의 몽골 견제에 따른 혜택을 입었다고 볼 수도 있다. 명 왕조의 북방전략은 주로 몽골족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고 만주족에 대한 경계는 상대적으로 덜 하였기 때문이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1987년 작품 “마지막 황제”에서 푸이는 신붓감을 고르는데 여러 명의 몽골 황금씨족 여성들 중에서 고르는 장면이 나온다. 3시간 가까운 영화 속에서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장면이지만 여기서 확인 할 수 있는 것은 만주족과 몽골의 기나긴 혼인을 통한 동맹이다. 일반적으로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몽골인들은 원(元)나라의 멸망 이후 힘을 잃은 것이 아니라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한 체 북방의 초원에 대한 영향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다만 각 부족 간의 내전이 심해 明 왕조나 외부의 세력에 대한 군사력의 투사가 어려웠을 뿐이다.

과거 정치 세력들 간의 결혼은 그 자체가 정치적인 행위였으며 건국 직후의 후금 역시 다르지 않았다. 누르하치는 여진의 귀족들과 몽골 유력 부(部)들 간의 통혼을 적극 권장하였다. 몽골과의 통혼정책에 있어 누르하치는 솔선수범하여 자신의 가문과 몽골 왕공들과의 혼인을 추진하였다. 예를 들어 1608년에 코르친부는 건주여진의 공격을 맞아 건주의 병력이 강력함을 알고 싸우기 보다는 사신을 보내 통혼의사를 누르하치 에게 타진하였고 누르하치는 이를 허락하였다. 마침내 1612년, 누르하치는 코르친부 밍간 바이러[貝勒, 부장(部長)이라는 뜻]의 딸을 맞아들인다.

밍간은 보르지긴[博爾濟吉特]씨로서 몽골의 왕족이었고 몽골 왕족 중에서는 건주와 혼인을 맺은 첫 번째가 되었다. 3년 후 1615년에 누르하치는 역시 보르지긴씨인 쿠르친 콩구르 바이러의 딸을 맞아들였다. 누르하치는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주요 아들들 에게도 몽골 왕족과 귀족들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이게 하였다. 후일 누르하치의 뒤를 이어 청의 태종(太宗)이 되는 홍타이지[皇太極, 1592~1643] 역시 세 아내 역시 모두 보르지긴 가문의 몽골왕족이었다. 그 중 두 번째 부인이 순치 말기와 강희 초기에 막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효장문황후(孝莊文皇后)가 된다.

누르하치의 둘째 아들인 예친왕(禮親王) 다이산[代善, 1583~1648]역시 결혼한 뒤였지 만 보르지긴 출신의 부인을 얻는다. 제 14자인 예친왕(睿親王)이자 이후 순치제의 황 부섭정왕(皇父攝政王)이 되는 도르곤[多爾袞, 1612~1650]의 부인 열 명중 다섯명이 몽골인이었다. 누르하치의 15자 왕자인 예친왕(豫親王) 도도[多鐸, 1614~1649]의 정 부인 역시 몽골인이었다. 이처럼 몽골인들은 후금의 건국기부터 귀족이자 왕비족으로 청 황가(皇家)의 주요 세력으로 등장한다.

▲ /중국의 영토(유튜브 캡쳐)

 

3. 동맹의 정점, 팔기제도(八旗制度)와 몽골팔기(蒙古制度)

 

만주족과 몽골족의 오랜 대립은 13세기부터 시작되지만, 17세기 초 후금과 청나라의 건국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는 생산적 동맹을 넘어 제국을 형성하는 결과를 만들어 냈다. 청나라가 명나라를 제압하고 마침내 중원을 지배하는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팔기제도이다. 누르하치 시대에 팔기제도가 창시된 것은 상호간에 어떠한 결합 관계도 없는 여러 부족집단을 통합, 관할하기 위해 새로운 집단들의 결집력이 필요했 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누르하치 자신도 강력한 자신의 부족성을 기반으로 세력을 확대했기 때문에 새로운 조직이 만들어져서 자신의 세력기반을 위협해서는 안 되었다. 팔기란 여덟 개 의 군사조직으로 알려졌지만, 팔기제도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데는 상당히 애매하다. 만주의 팔기제도는 누르하치와 홍타이지의 명나라 대립 시절부터 도르곤의 중원입성 이후까지 지속적으로 조직의 모양과 역할, 임무 등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 청제국사(淸帝國史)에 대해 연구한 일본의 “마쓰이 츠네오”는 이것을 오늘날 사회조직의 시발점으로 평가해야 옳다고 설명한 바 있다.

국내 학자들 중에서도 명지대학교 한명기 교수와 고려대학교의 이훈 교수역시 청나라의 팔기제도를 한국의 본관(本貫) 개념으로 받아들여야 더 정확하다고 표현이라고 해석했다. 정체성이야 무엇이던 간에 조직의 창설 목표는 효율적인 전투수행이었으며, 군사조직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점점 늘어나는 한족의 귀순자들과 임진왜란 직후 누르하치의 세력이 팽창되는 과정부터 함께한 몽골세력과의 연합을 내부반란 및 의견대립 없이 어떻게 일사불란한 전투조직으로 만드느냐가 핵심 목표였다.

각 기(旗)의 핵심 수장에는 당연히 만주족 출신의 니루(niru-牛菉)가 핵심이었으나 황제의 직속부대인 정황, 양황, 정백의 단위를 이루는 전투부대에는 대부분 몽골의 귀족출신 부대가 포진한 것을 보면 당시 몽골과 만주족의 신뢰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짐 작 할만하다.

 

4. 한미동맹이라는 자산

 

역사적 측면에서 청나라의 성공 비결은 곧바로 조선의 실패원인과도 귀결된다. 명나라의 입장에서는 같은 오랑캐였지만 전통적인 순이(順夷-순한 오랑캐)였던 조선은 백은(白銀)이 넘쳐나는 시대적 흐름을 타기는커녕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했으며, 명청교체기 피할 수 있는 전쟁역시 피하지 못했던 반면 역이(逆夷-대드는 오랑캐)였던 만주족의 역사적 결단은 우리에게 좋은 교훈이 된다.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강대국을 상대하는 올바른 “전략”이다. 국력이 밀린다고 사드문제 이후 중국의 눈치를 보는 수동적 대응방식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강점을 파악하고 이것을 키워나가는 방식을 택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와 경제력을 보유했으며, 가장 앞선 정신문명으로 전 세계 국가 들의 부러움을 사는 미국과 군사동맹국이다. 누르하치가 7대명(명나라와 전쟁을 해야 하는 7가지 명분)을 발표했을 때 본인의 후손들이 중원이 주인이 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경제적으로 번성한 북경지역을 차지함으로써 11세기 금나라의 영광을 되찾는 정도가 본인이 원한 이익의 극대화였다는 것은 당시 역사적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 다. 이러한 일관된 전략은 몽골이라는 작지 않은 영향력을 가진 세력과의 연합을 통 해 마침내 중원의 지배자가 된 것이다.

많은 이들이 대한민국의 외교적 무능을 욕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편견이다. 패권국과의 군사동맹을 이끌었던 나라 중에 외교적으로 무능한 문명은 역사적으로 없었다. 대한민국은 건국초기부터 강대국과의 동맹을 통해 국력을 팽창시켜온 국가이다. 우리의 외교적 결과물을 우리스스로 폄훼시키는 자해를 범해선 안 된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국력팽창의 역사이고, 그 바탕에 강력한 동맹세력의 존재가 있(었)다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해 볼 요즘이 아닐 수 없다.

 

(이 글은 자유경제원이 3월 28일 개최한 세미나에서 발표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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