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 「리투아니아 여인」에 오버랩된 박칼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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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 「리투아니아 여인」에 오버랩된 박칼린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3.26 14: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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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혈인 주인공 김혜련이 노마드의 삶을 살아간다는 스토리
▲ /책표지

이문열의 소설 「리투아니아 여인」(2011년작)은 다국적 예술인의 유목민적인 삶을 그려낸 소설이다. 구상에서 집필까지 18년에 걸쳐 완성됐다고 한다. 2010년부터 2011년 사이에 ‘중앙일보’에 연재된 작품.

주인공 김혜련은 리투아니아계 미국인 어머니와 한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주인공 김혜련의 캐릭터는 음악감독 박칼린을 소재로 구성됐다. 소설속의 김혜련과 현실의 박칼린은 오버랩되는 대목이 많다. 우선 박칼린과 김혜련의 어머니는 리투니아인이고, 아버지는 한국인이다. 성악을 공부했고, 박칼린의 인생역정이 소설 속에서 생생히 그려져 있다. 하지만 소설은 소설일뿐, 「리투아니아 여인」은 박칼린의 일생과 일치하지 않는다. 이문열의 창작적 요소가 강하게 담겨있다.

소설 속에는 리투니아의 역사가 생생하게 담겨져 있다. 유럽 소국으로 알려져 있는 리투니아의 뼈 아픈 역사를 공부할 기회가 된다. 우리나라의 굴절된 역사와도 겹쳐 있다.

이 소설은 리투니아판으로도 번역돼 현지에 소개됐다.

 

이문열은 「리투아니아 여인」 에필로그에서 이렇게 썼다.

“그런데 작품 연재를 시작한지 오래잖아 그녀(박칼린)가 갑자기 우리 사회의 문화적 아이콘으로 더오르면서 내게 묘한 부담이 되었다. 특히 내 글쓰기가 냄비처럼 달아오르는 우리 시대의 호오 감정에 편승하는 듯한 느낌을 주게 되는 것이 아주 싫었다. 거기다가 같은 시대에 함께 살아 움직이는 모델을 소설속으로 형상화하는 작업은 한동안 곤혹스럽기까지 했다. 어쩌면 예술적 공정을 거친 창작물을 일쑤 동일시하는 대중의 안목에 내가 너무 자주 상처를 업어 온 탓인지도 모른다.”

이문열은 소설속 김혜련과 실제인물 박칼린이 혼동하는 것을 크게 경계했다.

“창작론의 모델 이론에서조차 모델과 창작된 캐릭터는 다르다. 이 소설과 그녀의 삶이 혼동되지 않기를 바란다. 여거서 많은 부분 그녀의 추억과 경험이 참고되었지만, 소설적 갈등 구조를 이루는 부분은 모두가 창작임을 미리 언명해 둔다. 피와 땅에 바탕하는 정체성의 무의미함. 보편성 또는 노마드적 성격에 대한 짧은 성찰들을 주제로 하는 소품으로 읽어주길 바란다.”

▲ 리투아니아 시아울리아이에 있는 십자가 언덕 /위키피디아

 

작가가 하고픈 주제는 소설의 맨마지막에 나온다. 예술가의 국적은 노마드(Nomad)다. 한국인과 리투니아인의 혼혈인 주인공 김혜련은 국적을 초월한 유목민적 예술가의 삶을 살아간다는 스토리다.

▲ 리투아니아판 소설 /춢판사

1인칭 화법의 소설이다. 화자는 ‘나’다.

한국인이자 미국인이며 리투아니아인이기도 한 그녀, 뮤지컬 음악 감독 ‘김혜련’. 코카서스 인종의 용모적인 특성을 고스란히 간직한 이국적인 외모, 그리고 뛰어난 음악적 재능과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십을 지닌 그녀는 뮤지컬 음악 감독으로서, 또한 시립 교향악단의 지휘자로서 시대의 명사가 되어 각종 광고와 매스컴을 장식하며 화려하게 부상한다. 「리투아니아 여인」은 그녀의 불꽃같은 사랑과 3년 만의 파경, 그리고 눈부신 성공 이면의 좌절을, 또다시 이 땅을 떠나고야 마는 고독한 유목민적 예술가의 모습으로 생생하게 그렸다.

이문열이 이 소설을 구상하기 시작한 것은 1993년 늦겨울 뉴욕의 어느 호텔에서였다. 이문열의 희곡 '여우 사냥'을 원작으로 한 뮤지컬 '명성황후' 제작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다섯 명의 일행이 약 한 달간 브로드웨이의 각종 뮤지컬을 관람하는 여행을 함께한 적 있는데, 그 일행 중에 이 소설 「리투아니아 여인]」 모델이 된 박칼린이 있었다.

유년시절 한국에서 자랐던 그녀의 추억담과 리투아니아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그녀의 이모들 이야기를 들으면서 작가는 소설화에 대해 마음을 굳혔고, 결국 18년 만에 「리투아니아 여인」이란 작품으로 탄생하게 됐다.

 

 

줄거리

새 아파트로 이사한 첫날 밤, ‘나’는 이삿짐을 정리하다가 문득 십자가들의 언덕을 찍은 사진 한 장을 발견한다. 나는 그 사진으로부터 기억 저편에 존재하던 갈색 눈에 금발 머리를 땋아 내린 열한 살짜리 이국 소녀를 떠올린다.

30여 년 전, 부산에서 재수를 하던 나는 동네에서 서양인이 사는 집 앞을 지나칠 때마다 그 집 아이들이 노는 것을 유심히 살펴보곤 했다. 진한 부산 사투리를 쓰는 금발 머리 소녀는 동네 아이들과 공기놀이나 고무줄놀이를 하며 곧잘 어울렸다. ‘혜련’이라는 이름의 그 소녀는 어느 날 친구들에게 심한 따돌림을 당했다. “이 코쟁이 가시나야, 인자 고마, 너 나라 돌아가거라이. 가서 다시는 오지 마래이.” 이후로 ‘혜련’이라는 한국 이름을 지닌 그 소녀를 보지 못했지만, 소녀는 내 기억 속에서 음악 책에 나오는 ‘금발의 제니’로 각인되었다.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후 부산의 작은 극단에서 무보수 조연출로 일하고 있던 나는 음악 스태프를 모집하던 중에 지원자로 온 혜련과 조우한다. 그리고 다시 몇 년 후 서울의 대학로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것을 계기로, 2년 후 서울에서의 첫 연출 작품을 혜련과 함께 무대에 올리며 나와 혜련은 연출가와 음악 감독으로서의 인연을 이어 가게 된다.

나는 혜련으로부터 리투아니아와 모계의 이산 역사를 듣는다. 혜련의 할머니는 1940년대 리투아니아가 소련에 병합될 당시 둘째 딸만 겨우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가 정착했다. 미국에서 자란 혜련의 어머니는 대학에서 각국의 민속음악을 공부하던 중 축제 때 「아리랑」을 부른 것을 계기로 같은 학교 학생이었던 혜련의 아버지와 결혼해 세 남매를 낳았던 것이다.

혜련은 몽골리안을 강조한 듯한 얼굴 윤곽의 키가 큰 음악가와 사랑에 빠지지만, 불과 3년 만에 이혼하고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간다. 그동안 연출가로서 성공 가도를 달리던 나 역시 결혼과 이혼을 경험한 후, 실의에 빠져 방황하다가 미국 유학을 결심한다. 나는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공부하기 위해 극장가를 순회하던 중 혜련과 또다시 운명적으로 재회하게 된다.

한국으로 돌아온 나와 혜련은 창작 뮤지컬을 만들어 대단한 성공을 거둔다. 이후 혜련은 뮤지컬 음악 감독으로서, 또한 시립 교향악단의 지휘자로서 시대의 명사가 되어 각종 광고와 매스컴을 장식하며 화려하게 부상한다. 그러나 스캔들이 터지며 그녀의 이중국적을 문제 삼는 이들에게 비난당하기 시작하면서 대중의 언어적 폭력에 맞서 힘겨운 투쟁을 계속해 간다. 추락의 쓴 잔을 마시며 방황하던 그녀는 결국 예술가로서의 유목민적 정체성을 찾아 한국을 영영 떠나고야 만다.

 

박칼린은?

박칼린(Kolleen Park, 1967. 5. 1,). 대한민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예술 감독·연출. 뮤지컬배우, 연극배우, 보컬 트레이닝 전문가, 음대 교수, 음악 전문 감독, 뮤지컬 연출 등 공연계에서 많은 직업을 거쳤다.

▲ 박칼린 /박칼린 사이트

그녀는 미국에서 유학 중이던 아버지 '박근실'과 리투아니아계 미국인 어머니 '아이린' 사이에서 태어나 부산에 살면서 한국 전통 문화를 습득했고 한국 무용과 피아노로 음악 예술을 시작했다. 9살에 다시 미국으로가 첼로를 배우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경남여고 2년을 다니느라 부산에서 생활했다. 다시 미국 캘리포니아 칼아츠에 진학해 첼로를 전공했으나 1991년 돌연 국악을 배우려 입국. 서울대학교 국악 대학원에 입학하여 명창 박동진에게 발탁되어 판소리를 사사했다. 이후 부산 시립극단에서 연극배우로 활동하다가 1995년 창작뮤지컬 《명성황후》로 대한민국 음악감독 1호가 되었다. 2002년 《오페라의 유령》, 2004년 《노트르담의 곱추》, 2006년 《아이다》, 2009년~2010년 《시카고》 등등 70편이 넘는 작품을 선보이고 2010년에는 KBS 《남자의 자격》 <하모니>편에 출연하여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아버지는 1950년대에 미국으로 유학을 다녀올 정도로 인텔리였다. 어머니는 5살 때 리투아니아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1944년 고향 리투아니아가 구 소련에 흡수되었기 때문에 이를 피하기 위해서었다. 아버지가 대학 2학년이던 시절 어머니가 신입생으로 들어왔다. 어머니는 성악 공부를 한적이 있었고 각 나라의 전통 노래를 배웠는데 그중에 아리랑이 끼어있었다.

1950년대였던 당시에도 180cm가 넘을정도로 키가 컸던 아버지는 동양 학생들 사이에서 눈에 띄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놀리기 위해 배워온 아리랑을 불렀고 이후 둘의 연애가 결혼으로까지 이어졌다.

박칼린은 세 딸 중 막내로 태어났다. 미국에서 태어나 어릴적 한국에 온 후 부산에서 7년을 살아온 박칼린은 처음으로 부산 사투리를 배웠다. 그러던 어느날 앞집 언니 친구들이 학교 숙제로 모래주머니를 만들어야 된다며 놀이터에 가서 모래를 주워담고 있는데 갑자기 중학생이 오더니 "너는 너희 나라로 가라"며 혼을 냈고 그때 정체성의 혼란을 처음으로 겪었다. 9살이 될 때 가족 모두가 미국으로 떠나게 됐다. 미국에서 지내다가 다시 부산으로 와서 고등학교(경남여고) 생활을 하게됐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캘리포니아 예술대학(California Institute of the Arts)에서 첼로를 전공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한민국으로 다시 귀국하여 1991년 서울대학교 국악과 대학원에 입학했다. 7~8살때 부산에서 한국무용을 배우면서 음악에 대한 친밀감이 있었고 국악의 멜로디에 이끌려 국악과에 들어간 것. 이때 무형문화제로 지정되어 판소리를 하던 명창 박동진에게 선택되어 사사했다.

박칼린은 미국에서 어렸을때부터 뮤지컬을 접했다. 박칼린은 1995년부터 1997년 미국 뉴욕 공연까지 「명성황후」에 참여했다.

 

한때 동유럽의 강국 리투아니아

인구: 2,963,103명 (2014년 말 기준)

위치: 발트 3국 중 남쪽에 위치. 북유럽에 속하며 동쪽과 남쪽은 벨라루스, 서쪽은 발트 해, 남서쪽은 러시아 칼리닌그라드 주와 폴란드, 북쪽은 라트비아와 인접

언어 : 리투아니아어

문화적 특징 : 독일, 폴란드, 러시아의 침략과 지배를 받았던 굴곡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민족적, 언어적 정체성을 지켜왔다.

▲ 리투아니아 국기 /위키피디아

1253년에 민다우가스(Mindaugas)가 즉위하면서 리투아니아는 통일 국가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그는 최초의 리투아니아 왕이자 최초의 기독교 세례를 받은 왕이었다. 14세기 들어서 리투아니아 공국은 유럽에서 가장 큰 나라가 되었다. 1316년에 게디미나스(Gediminas; 1275경~1341) 대공이 왕으로 즉위한 뒤 1572년까지 그의 왕조가 지속되었다. 이 왕조는 리투아니아를 동유럽 최강 국가로 만들었고, 따라서 리투아니아 민족은 유럽의 중심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게디미나스는 리투아니아 영토를 현재의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지역까지 확장했고, 끊임없이 리투아니아를 넘보는 독일 중세십자군 기사단인 튜튼 기사단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아들 알기르다스(Algirdas) 대공의 통치기간인 14세기 중엽에 리투아니아의 영토는 동쪽으로도 확대되었다.

알기르다스의 열 두 아들 중 하나인 요가일라(Jogaila; 1377~1401) 대공은 계속되는 독일 튜튼 기사단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폴란드 앙주 왕조의 여왕 야드비가와 결혼하여 폴란드와 동맹관계를 수립했고, 그 결과 튜튼 기사단을 무찔러 독일의 침략을 저지할 수 있었다. 당시 동맹 조건의 하나로 리투아니아는 로마 가톨릭교를 수용하게 되었다. 요가일라는 폴란드 여왕과의 결혼으로 두 나라를 통치하게 되면서 브와디스와프 2세(Władysław II)라고 불렸으며, 야기에우워 왕가의 창시자가 되었다. 요가일라의 후계자인 비타우투스(Vytautus)는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그리고 러시아 일부를 포함해 발트 해에서 흑해까지 영토를 확장시켜 리투아니아의 전성기를 이룩했다.

비타우타스의 사후 리투아니아는 명목상으로는 폴란드 왕에게 예속되어 있었지만 자치권을 가지고 정치적인 문제에서 독자적 행보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러시아의 이반 4세가 발트 해 진출을 목적으로 리보니아 전쟁(1558~1583) 전쟁을 일으키게 되는데, 러시아 세력이 발트 해로 밀려드는 긴박한 순간에 폴란드가 리투아니아에게 동맹을 강요했고, 리투아니아 중소귀족들은 대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피하고자 폴란드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결국 1569년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간의 루블린 합병 조약으로 두 나라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국이 되었다. 표면적으로는 두 나라가 독립을 유지한 연방국가로 보이지만 사실상 리투아니아가 폴란드에 예속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 /위키피디아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국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주변 국가들이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다. 상대적으로 강해진 오스트리아, 프러시아, 러시아제국은 1772-1795년에 조직적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국을 해체시켜 유럽 지도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 때문에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1918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독립국으로서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다.

▲ /코트라 사이트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인 1918년 2월 16일 리투아니아의 독립이 승인되었다. 그렇게 잠시 독립의 순간을 맞이하기도 했지만, 1940년부터 리투아니아는 또다시 소련, 그리고 이어서 나치독일에 점령되는 수난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그에 그치지 않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인 1944년에 소련이 리투아니아를 재점령하여 소련을 구성하는 공화국으로 편입시켰다. 이후 소련이 붕괴되기 1년 전인 1990년 3월 11일에 리투아니아는 공식적으로 독립을 선언했다.

리투아니아 민족의 독립을 향한 의지는 ‘노래하는 혁명’으로 불리는 ‘발트의 길’에서 명확히 드러났다.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에서 시작되어 라트비아의 리가를 거쳐 에스토니아의 탈린에 이르는 620㎞에 달하는 인간사슬은 발트 3국의 소련으로부터의 독립과 자유를 위한 투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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