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금융위기㉔] 자유낙하하는 루피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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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금융위기㉔] 자유낙하하는 루피아화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3.25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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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격한 자본이탈…32년 권좌 누린수하르토 정권 몰락

1997년 6월까지만 해도 인도네시아 경제는 대단히 평온했다. 아무도 경제가 파국으로 치달을 것이라고 예측하지 못했다. 1929년 대공황 때도 그랬듯이 경제 대혼란은 직전까지도 그 징조를 파악하지 못한다는 결정적 한계가 경제학자와 정책당국자들의 고민이다. IMF는 그 무렵 인도네시아가 신중한 거시정책, 높은 투자율과 저축률, 시장 자유화를 향한 개혁의 성공 등을 이루고 있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로부터 6개월후 인도네시아 통화인 루피아는 50% 이상 수직 하강했고, 또 6개월후 수하르토 대통령은 경제 위기로 인한 국민 저항운동으로 32년간의 길고 긴 권좌를 내놓아야 했다.

그러면 누가 인도네시아 경제를 무너뜨렸는가. 태국을 공략한 미국의 헤지펀드와 국제 외환투기자들이었던가. 아니면 수하르토 일가의 족벌 경제였던가. IMF는 수하르토의 족벌 경제가 인도네시아 경제 파국의 원인이라고 비난했지만, 그것이 결코 파국의 원인은 아니었다. 헤지펀드들이 전혀 루피아를 공격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다. 조지 소로스의 퀀텀 펀드나 줄리안 로버트슨의 타이거 펀드등 헤지펀드들은 나중에 자신들이 어떤 통화를 공략했는지를 미국 언론과 투자자들에게 슬금슬금 밝혔지만, 인도네시아 루피아를 공격했다는 얘기는 없다. 인도네시아 경제는 태국처럼 투기자들의 공격에 의해 무너진 것이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투기자들은 태국 바트화 붕괴후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홍콩을 떠돌며 공격 대상을 찾았지만, 인도네시아는 투기자들의 힘에 의해 무너졌다고 할 수 없다.

인도네시아 경제의 붕괴는 어쩌면 한국 경제의 붕괴와 비슷하다. 은행과 기업들이 과도한 단기 외채를 빌려왔고, 어느 순간에 이들 단기 자본이 한꺼번에 빠져 나가면서 벼랑으로 밀려났다. IMF나 마찬가지로 국제 채권은행들은 고도성장 경제를 믿고 돈을 흠뻑 빌려주었다고 하루아침에 빠져나가는 비겁함을 보였으며, 국내 은행과 기업들도 루피아가 하락할 것이라고 지레 짐작, 달러를 해외로 빼돌리는 바람에 통화 폭락이 가속화됐다. 게다가 인도네시아의 경제는 중국계 화교(華僑)들이 장악하고 있었기에 그들은 언제라도 열대의 나라를 떠날 마음의 준비가 돼 있었다. 수하르토의 철권통치는 밀림의 공산 게릴라와 소수민족의 분리주의자들을 토벌하는데 효력이 있었지만, 자본 이탈을 막는데는 무용지물이었다.

▲ 인도네시아 루피아화 /자카르타 타임스 캡쳐

 

세계 주요 산유국인 인도네시아는 지난 86년 유가 하락으로 루피아를 31% 절하한 경험이 있다. 그후 수하르토 정부는 영악하리 만큼 통화 관리를 잘했다. 환율 변동제한폭(밴드)을 좁게 하되, 1년에 4~5% 절하를 단행함으로써 일본 엔화 절하에 대응했다. 정부가 경제를 철저히 장악하고 있었고, 수하르토 일가의 족벌 경제는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고도성장의 원동력이 됐다. 경제 관료들도 서구에서 공부를 한 엘리트들이었다. 관료들은 경제를 개방함으로써 외화 유입의 문호를 활짝 열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문제는 경기 과열이었다. 서방 은행들은 인도네시아 경제가 무너지리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정부가 지원하는 기업이므로 나라가 망하기 전에 절대 망할 수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과 유럽, 일본 은행들이 인도네시아 기업에 돈을 물씬 대주었고, 특히 수하르토 일족의 기업에게는 빌려가고 싶은 만큼 가져가라고 했다. 서방 투자가들은 태국이나 말레이시아보다 인도네시아 경제를 더 건강하게 보았다.

미국의 신용투자회사인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에 따르면 95년에서 97년 상반기까지 외국 자본이 인도네시아에 집중적으로 투자됐다. 이기간에 투자된 규모가 이전의 규모와 맞먹었다. 이에 따라 인도네시아의 외채 규모는 2년반 사이에 두배로 늘어났다. 97년 9월 30일 현재 인도네시아의 외채 규모는 1,333억 달러로 이중 절반인 656억 달러가 민간 기업의 외채였다.

민간 은행과 기업들에겐 외국돈을 빌려오면 많은 이문을 남길 수 있다. 달러 이자는 연 9~10%인데 비해 국내 이자는 18~20%에 해당했다. 정부가 루피아를 연평균 4~5% 절하한 것을 감안하더라도 달러 빚을 얻어오면 국내에서 돈을 빌려온 것에 비해 연간 4~6%의 이자차익을 챙길 수 있다. 주식시장이 상승일변도였기 때문에 일부 국내 투자자들은 달러를 빌려 주식시장에 투자해 최대의 이윤을 남겼다.

외채가 마구잡이 식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중앙은행도 얼마나 외국에서 돈이 들어오는지를 집계조차 못하고 있었다. 당시 자카르타에 주재한 일본 노무라 증권의 한 지점장은 이렇게 말했다.

“미국 달러를 빌려오는 것은 인도네시아에서 중요한 일과다. 그것은 맥도널드에 가는 것과 같다.”

인도네시아 기업과 투자자, 은행들은 미국인들이 대중음식점인 맥도널드를 찾듯이 달러를 빌려 썼던 것을 빈정거리는 말이다.

그렇지만 인도네시아인들은 달러를 펑펑 들여다 썼으면서도 중앙은행이 루피아를 급격히 절하할 것이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랬기 때문에 환율 변동에 대한 헤지(hedge: 환율, 금리등의 변동에 대비한 안전한 자금관리 기법)를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무지의 탓이기도 했다.

미국의 골드만 삭스사가 그해 7월말과 8월초 인도네시아의 34개 금융기관 기관장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3분의 2가 외채를 40% 이상 안고 있었지만, 그중 절반 이상을 헤지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선진국에선 외국에 투자하거나 외채를 빌려올 때 다양한 파생금융상품을 활용해 헤지를 하는 것이 상식이요, 관례였다. 일종의 보험이다. 인도네시아의 경우 1억 달러를 빌렸을 경우 7월초에 2,431억 루피아를 준비하면 됐던 것이 6개월 후에는 5,000억 루피아로 두배의 비용을 물어야 했다. 이를 피하려면 6개월후 환율을 얼마로 한다는 것을 돈을 빌릴 때 계약을 해야 한다. 그러자면 이자율이 높아지거나, 채권 은행측에서 높은 환율을 불러 손해를 볼 수도 있다. 싼 외국 이자에 맛을 들인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보험료를 아끼려다 대형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7월 2일 태국 정부가 바트화 방어를 포기하면서 세계 금융시장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돈을 펑펑 대주던 선진국 은행들이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전체적으로 경계하기 시작했다. 인도네시아도 예외가 아니었다. 외국 투자자들은 돈을 뺄 생각을 했다. 극히 일부이기는 하지만, 태국을 공격했던 외환 투기자들이 루피아를 툭툭 건드려보았다. 그러나 루피아는 단단했다.

먼저 불안을 느낀 사람은 인도네시아 은행과 기업인들이었다. 그들은 외화 자금을 헤지하지 않고 있었다. 태풍 예보가 울렸는데, 보험에 들지 않은 배를 운항할 수는 없다. 달러를 빌려온 인도네시아인들은 일단 달러를 해외로 빼돌렸다. 루피아로 바꿔놓았다가 재난을 당하기보다는 달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안전했고, 나중에 자국 통화가 절하된 뒤 들여오면 엄청난 수익을 보게 된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태국이 무너지자 그 순간에 돈 장사를 하려 했던 것이다. 인도네시아 은행과 기업의 달러 유출은 루피아 하락을 가속화했다.

7월 10일 외환 투기자들은 필리핀을 공격했고, 필리핀 페소화가 폭락했다. 이때 인도네시아 중앙은행은 외환 투기자들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밴드를 8%에서 12%로 확대했다. 투기자들은 인도네시아를 비껴갔다. 외환 투기자들은 중앙은행이 고정환율을 채택하거나 또는 밴드 폭을 좁게 운영하는 나라를 공격했기 때문에 인도네시아 중앙은행의 조치는 적절했다.

문제는 외국돈을 빌려쓴 국내 기업과 은행들이었다. 당시 인도네시아 중앙은행 총재였던 소에드라자드 디완도노(Soedradjad Djiwandono)씨의 회고를 들어보자.

“환율을 변동시키면 투기를 피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파국은 너무 일찍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시장에 의해 점령당한 것이지요.

7월이 되자 영악한 투자자들이 루피아를 투매하기 시작했습니다. 영악하지 못한 국내 투자자들은 처음에 루피아를 매입했지요. 그러나 일주일도 못돼 그들은 일제히 루피아를 매각했습니다. 들소 떼처럼 그들은 본능적인 군중심리에 의해 움직였습니다. 그들은 루피아가 투기자들의 공격을 받아 곧 절하될 것이라는 루머를 믿고 루피아를 투매했어요.“

다음은 월스트리트 저널이 보도한 인도네시아 기업의 달러 해외도피의 사례다.

“PT 폴리신도 에카 페르카사(Polisindo Eka Perkasa)라는 섬유회사를 운영하는 마노하르씨는 8억 달러의 차관을 빌려다 쓰고 있다. 그는 7월초 태국 바트화가 붕괴되자 루피아도 절하할 것으로 생각해 2억 달러를 헤지시켜 미국 증시에 투자했다. 일정한 환율 절하치를 상정해 장래에 그 금액으로 다시 살수 있도록 하는 계약이었다.

마노하르씨는 루피아 환율을 1달러당 2,457 루피아로 바꾸는 조건으로 계약하고 달러를 해외에 투자했다. 그는 조금 있다가 환율이 하락하자, 조건을 1달러당 2,988 루피아로 전환했지만, 6개월 후에 1달러당 5,000 루피아로 폭락하는 사태에 대비할 수 있었다.

그러나 폴리신도사의 해외 투자는 인도네시아 경제 규모로는 큰 것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또다른 섬유회사인 인도-라마(Indo-Rama)사도 1억7,500만 달러 규모의 차관을 헤지시켜 달러로 전환시켰다.“

전세계에 하루에 교환되는 외환 거래량은 1조~2조 달러에 해당한다. 이중 루피아화의 하루 거래량은 50억 달러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대기업 몇 개사가 달러를 해외에 반출해도 금방 외환시장에 자국이 남고, 외환딜러들은 그 이유를 추적하게 된다. 인도네시아 국내 기업과 은행들이 대거 달러를 해외로 빼돌리자, 외환시장의 딜러들은 루피아 가격을 낮춰 불렀고, 루피아 가격은 폭락세를 지속했다.

당시 인도네시아 신문은 인도네시아 기업들이 도둑처럼 마스크를 하고 달러 뭉치를 빼돌리는 만화를 실었다. 자국 기업들이 해외 투기자들과 합세해서 국가 경제를 테러리스트처럼 붕괴시키고 있다는 코멘트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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