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 아시아 금융위기㉓] 홍콩의 단기금리 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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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 아시아 금융위기㉓] 홍콩의 단기금리 300%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3.22 11:2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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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기자본, 홍콩 공격 실패한 후 한국으로 눈돌려

1997년 10월 31일 상오 9시, 뉴욕 월가 한복판의 뉴욕증권거래소(NYSE)에 낮선 손님이 찾아들었다. 중국 최고통치자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이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방문이래 공산국 최고 통치자로는 두번째였다.

리처드 그라쏘(Richard Grasso) 뉴욕증권거래소 회장의 안내를 받으며 장쩌민은 오전 9시 30분 증권거래소 개장을 알리는 오프닝 벨을 울렸다. 부저가 올리면서 주식투자자들은 일제히 사자로 몰려 공산주의 국가 원수의 방문을 환영했다. 다우존스 지수는 개장 3분만에 77 포인트나 폭등했다.

장쩌민 주석의 월가 방문은 공산 중국이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서방의 자본을 적극 유치하겠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었다. 다른 한편 월가와 중국과의 팽팽한 대립을 풀어보자는 의미가 있었다.

뉴욕 월가와 중국과의 전투는 이미 그해 7월 1일 150년동안 영국 주권 하에 있던 홍콩이 중국에 이양되면서 시작됐다. 중국은 세계 5위의 금융도시를 인수받음으로써 서방세계에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양립하는 ‘1국 2체제’를 과시하려고 했다. 소련 붕괴후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인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국제 금융질서를 비집고, 공산주의 대국이 부양하는 금융 센터를 건설하겠다는 웅대한 구상을 실현시키려 했던 것이다.

초기 한달반 정도는 일단 중국의 의도대로 되는 것처럼 보였다. 7월초 1만5,000대 초반이었던 홍콩 항셍(恒生) 주가지수는 8월초 1만6,600대를 넘어 10% 이상 상승했다. 중국은 국제 투자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누누이 홍콩에 대해 불간섭의 원칙을 강조했다. 국제 유동성이 홍콩의 장래를 믿고 흘러 들어왔다.

 

홍콩 인수를 앞두고 중국은 몇 년전부터 홍콩 부양정책을 취해왔다. 중국의 국영기업 및 지방 공기업중 우량종목이 홍콩 증시를 통해 상장했고, 이들은 ‘레드칩(Red Chip)’이라 불리며, 투자자들의 인기를 끌었다.

홍콩의 ‘중국요인(China factor)’은 대단했다. 중국 본토는 홍콩에 유입되는 최대 외국인 투자자였다. 중국 대륙에서 홍콩 땅에 흘러 들어온 자금은 250억 달러에 이르렀고, 본토의 핫머니가 레드칩을 띄웠고, 홍콩 증시를 부양시켰다. 장쩌민이 월가에서 오프닝 벨을 울리기 직전까지 홍콩 증시의 주가 총액 증가규모는 2,000억 달러를 넘었다. 외부에서 흘러 들어오는 자금 규모보다 홍콩 증시에 거품이 생겼다는 의미이고, 배후에서 중국 정부가 이를 조정했었다.

중국 정부는 자산 규모보다 부풀려진 홍콩 증시에 만족했다. 공산주의 국가도 자본주의 금융센터를 부양할 수 있음을 세계 만방에 알렸다.

홍콩의 버블은 부동산 시장에서도 나타났다. 같은 평수의 사무실을 임대하는 비용이 일본 동경보다 비쌌다. 97년초 빅토리아 피크의 경치 좋은 주택 한 채가 9,430만 달러로 팔려, 세금을 합치면 1억 달러를 넘어섰다. 리펄스 만의 2,100 평방 피트(60평) 아파트가 700만 달러에 호가했다. (당시 한국 환율을 1달러당 800원으로 치면 56억원에 해당한다) 50년전 부르주아지 독재를 타도하고 형성된 공산 중국은 자본주의 세계와 경쟁하기 위해 홍콩 부자들의 부를 인위적으로 부풀리려 했던 것이다.

▲ 홍콩 전경 /홍콩 관광청

 

그러나 세계 금융수도인 뉴욕 월가는 홍콩 시장의 인위적 팽창을 가만 보고 있질 않았다. 홍콩의 주권이 이양된 다음날인 7월 2일, 월가의 헤지펀드들은 중화 경제권의 외곽인 태국 바트화를 무너뜨렸고, 필리핀 페소, 말레이시아 링기트, 인도네시아 루피아를 차례차례 무너뜨렸다. 해외 화교가 경제를 장악하고 있는 동남아 국가들이 하나하나 월가의 손아귀에 넘어갔고, 태국과 인도네시아는 미국이 주도하는 IMF에 자금 지원을 받아 미국식 시장경제로 이행하고 있었다.

8월 중순, 국제 투기자들은 다음 타깃을 찾기 시작했다. 당시 월스트리트 저널지가 싱가포르발로 쓴 기사를 보자.

“지난주 동남아 통화가 지속적으로 평가절하하자, 국제 외환거래자들은 적도의 이 도시국가에 모여 한가지 의문점을 논의했다. 「다음 타깃은 누구인가」 하는 것이었다.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중앙은행이 자국 통화를 평가절하하자, 외환 거래자들과 투기자들은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새로이 공격할 통화를 찾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유롭게 거래되면서도 미국 달러화에 고정시키고 있는 통화에 압력을 가했다. 그것은 홍콩 달러였다.”

투기자들이 다음 목표로 홍콩 달러를 겨냥한 이유는 무엇일까. 대만 달러, 인도 루피, 중국 위안, 한국 원화도 홍콩 달러와 함께 외환 투기자들의 타깃이었다. 그러나 이들 통화는 선물환 거래가 철저히 통제되고 있었다. 투기자들은 일단 홍콩을 건드렸다.

투기자들은 성공을 다짐했다. 그들은 중앙은행인 홍콩 통화국(HKMA:Hongkong Monetary Authority)이 통화 방어에 얼마나 돈을 쓸지를 알고 있었다. 홍콩 정부는 1983년 이래 미국 달러에 대한 홍콩 달러의 교환비율을 7.75대1로 고정시켜 왔다. 홍콩 통화당국이 투기자들과 전쟁할 군자금(보유외환)은 850억 달러로 비교적 든든했다. 1987년 10월 이른바 ‘블랙먼데이’(Black Monday)라는 뉴욕 증시 폭락, 89년 천안문 사태, 94~95년 멕시코 페소화 위기 때도 홍콩 증시가 흔들리지 않았던 것은 바로 이 막강한 외환보유액 때문이었다. 홍콩의 주권을 이양받은 중국이 1,260억 달러의 외환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중국은 홍콩 금융시장에 대한 독자성을 수차례 대내외에 천명해 놓고 있었다.

투기자들의 가설은 두가지였다. 그 첫째는 중국이 홍콩 달러 방어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둘째는 홍콩 정부가 주식시장을 보호하기 위해 고정(페그)환율제를 철폐하고 평가절하를 단행할 것이라는 전제였다. 홍콩 증시는 중국이 국영기업을 상장, 외자를 유치하는 통로였기 때문에 섣불리 홍콩 당국이 증시 하락을 방치하지 못할 것이라고 투기자들은 믿었다.

홍콩은 독특한 통화체계를 가지고 있다. 이른바 ‘통화위원회제도(Currency Board)’라는 제도인데, 홍콩 달러 환율을 미국 달러에 법률로 정해놓고, 외환 유입을 금리로 조절했다. 화폐를 중앙은행이 발행하지 않고, 시중 은행들이 외환 보유 비율에 따라 발행하도록 돼 있다. 따라서 외국 돈, 즉 달러가 홍콩 국경 내에 많이 들어오면 금리가 낮아지고, 시중은행이 그에 상응하는 양의 돈을 찍어 낸다. 반대로 달러 유입이 줄어들면 금리가 올라가고, 화폐 발행량도 줄어든다.

 

8월 중순 외환 투기자들은 홍콩 달러를 공략했다. 선물환 시장에서 홍콩 달러를 팔아 미래의 홍콩 달러 가격을 떨어뜨린 다음 홍콩 달러를 대대적으로 매각하기 시작했다. 홍콩 당국은 6%인 단기 금리를 7.5%로 1.5% 포인트 인상함으로써 홍콩 달러를 방어했다. 금리가 오르면 주가는 떨어지는 게 공식이다. 현금의 이자율이 올라가면 주가 차익에 대한 매력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홍콩 항셍 지수가 충격을 받아 서서히 떨어졌다.

항셍 지수가 20% 상승하면 홍콩 증시에 1,000억 달러의 자금이 유입된다. 그러나 홍콩 당국이 통화 방어에 나서면 금리를 올려야 하고, 그렇게 되면 유동성이 홍콩 증시를 떠날 수밖에 없다. 투기자들은 이점을 노렸던 것이다.

홍콩은 동남아 국가들보다 맵집이 강했다. 보유외환이 많기도 하지만, 아시아에서 동경 다음의 국제 금융센터가 아닌가. 동남아 국가들보다 펀더멘털이 좋았고, 무역 흑자국이었다. 기업과 금융산업의 건전성에서도 동남아와 비견할 바가 못되었다. 게다가 홍콩의 금융인들은 월가의 투기수법을 내리 꿰고 있었다.

홍콩 통화국은 통화를 방어하는 대신에 주가를 포기했다. 투기자들의 공격이 시작된 후 2개월째인 10월 22일 항셍 지수는 8월 중순의 최고치에 비해 23%나 폭락했다. 외국인 투자자들도 밀물처럼 홍콩을 빠져나갔다. 월가의 투자회사인 모건 스탠리는 아시아 이머징 마켓 투자비율을 4%에서 0%로 줄여버렸다. 홍콩 주가 하락은 중국 국영기업의 해외 상장에도 큰 타격을 입혔다. 중국 굴지의 통신회사인 「차이나 텔레콤(China Telecom)」이 10월 22일 월가에 40억 달러 규모의 주식을 상장했는데, 상장 가격은 주당 2.5 달러로 월가 은행인 골드만 삭스사가 예상한 28 달러의 10%에도 미치지 못했다. 중국 대기업은 월가에서 치욕적인 대접을 받아야 했다.

투기자들은 홍콩 당국이 주가 하락을 더 이상 방치하지 못하고, 홍콩 달러를 절하할 것으로 믿고 최후 고지를 향해 치열한 공격을 단행했다.

홍콩의 무기는 이자율이었다. 홍콩 정부는 3개월 짜리 단기금리를 7%에서 10%로 인상했다. 둥젠화 홍콩 행정장관은 이런 고금리에도 홍콩은 끄덕 없다며, 투기자와의 전쟁에서 이기겠다는 결사항쟁 의지를 보였다.

10월 23일 드디어 홍콩 정부는 마지막 카드를 던졌다. 단기금리를 300%로 올린 것이다. 대학에서 경제원론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금리 300%를 감히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그것도 아시아 금융중심지인 홍콩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 홍콩 방어의 배수진이었다. 항셍 지수는 하룻만에 10.4%나 떨어진 1만426에 마감, 일주일 사이에 23%나 폭락했고, 두달전 최고치에 비해 50% 이상 떨어졌다. 투기꾼들에겐 홍콩 함락이 눈앞에 온 것 같았다. 이 절대 절명의 순간에도 북경 당국은 홍콩 시장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천명했다.

그러나 투기자들도 많은 피를 흘려야 했다. 투기는 위험도(리스크)가 높다. 한번 성공하면 떼돈을 벌지만, 실패하면 패가망신한다. 마치 카지노 도박판 같은 것이 외환투기자들의 세계다. 홍콩 정부가 두달동안 고정환율제를 방어했기 때문에 숏포지션(매도)에 섰던 헤지펀드들은 줄줄이 초상을 치러야 했다. 헤지펀드는 3%의 단기 이익을 내지 못하면 손해를 본다. 시중 금리보다 높은 금리의 차입금으로 투기를 하기 때문에 장기전에 약하다.

또 홍콩이 살인적인 금리를 적용하면서 연안을 봉쇄하자, 홍콩 증시에 투자했던 뮤튜얼펀드등 미국 투자자들이 졸지에 엄청난 손해를 보아야 했다. 단기 자본을 운영했던 헤지펀드나 뮤튜얼펀드의 일부는 홍콩에서 물린 돈을 갚기 위해 미국 주식을 대량 투매했다.

10월 27일 그날은 월요일이었다. 블랙먼데이를 겪은지 10년이 지났다. 이날 상오엔 뉴욕 증시는 그럭저럭 넘어갔다. 하오 들면서 홍콩을 공략하던 월가의 투기자들이 거꾸로 미국 주식을 투매했고, 소액투자자들은 군중심리에 말리면서 증권거래가 두 번이나 정지됐다. 당시 증권거래법상 다우존스 지수가 150 포인트 이상 하락하면 주식 거래를 30분간 정지하도록 돼 있었다. 이날 다우지수는 554 포인트(7.18%)나 폭락했다. 지수 상으로는 최대, 낙폭으로는 10년전 블랙먼데이 이후 두 번째였다.

뉴욕 증시 폭락은 지구촌 증시를 동시 폭락시켰다. 월스트리트 저널지는 이날의 폭락을 「피의 월요일(Bloody Monday)」라고 명명했다. 그해 1월 일본 증시가 10% 이상 폭락하고, 독일 경제가 침체에서 허덕일 때도 끄떡치 않았던 뉴욕 증시는 홍콩의 충격에 간단하게 무너졌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중국이라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홍콩이 평가절하를 단행하면, 중국도 위안화를 절하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한국, 일본이 평가절하를 단행할 우려가 있다. 헤지펀드들이야 홍콩에서 이문을 챙겨 달아나면 그만이지만, 아시아 경제의 축이 흔들리면 미국 경제라고 안전할 수 없다. 결국 미국과 중국의 화해가 필요했다.

장쩌민 국가주석의 뉴욕 증권거래소 방문으로 월가 투기자들이 홍콩 공략을 중단했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그 이후로 투기자들의 공격목표가 바뀌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 목표가 바로 한국이었다. 한국은 선물환 거래를 통제해 투기 대상으로는 적절치 않았으나, 결정적인 약점을 갖고 있었다. 국내 금융시스템이 와해되고 있었고, 은행과 기업들의 단기 외채가 1,000억 달러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한국은 또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홍콩에서 손해를 본 투기자들은 한국의 허점을 노렸다. 12월 원화가 붕괴되고, 한국 정부가 IMF에 구제금융을 받기로 한후 이듬해초 투기자들은 또다시 홍콩 공격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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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30 19:13:47
너무 유익한 기사네요! 감사합니다!

스테네 2018-05-31 11:19:58
마지막 문단, "국내 금융시스템이 와해되고 있었고, 은행과 기업들의 단기 외채가 1,000 달러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외채가 1,000 달러라고 되어 있는데 단위가 빠진 듯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