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금융위기㉒] 대만의 풍부한 보유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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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금융위기㉒] 대만의 풍부한 보유외환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3.19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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넉넉한 보유외환이 방파제 역할…보수적 금융시스템

1997년 7월 태국에서 발원한 통화위기의 태풍이 북상, 홍콩을 스치고 한국을 휩쓸며 쑥대밭을 만들었는데, 대만은 비교적 태풍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었다. 태풍의 진로가 대만을 거쳐가지 않았기 때문일까. 아니다. 대만에도 태풍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 그러나 대만은 태풍에도 견딜 수 있는 든든한 바람막이가 있었다. 그리고 대만 경제는 태국이나 인도네시아, 한국보다 건강하게 뿌리내리고 있었다.

아시아 경제위기의 소용돌이에서 대만을 지켜준 바람막이는 막대한 외환보유액이었다. 돈과 돈의 싸움이 국제 외환시장이다. 헤지펀드들이, 국제 외환 딜러들이 대만 달러가 무너질 것으로 판단, 대만 통화를 투매를 해도 대만 통화당국은 중앙은행 지하창고에 쌓아둔 막대한 보유외환을 풀어 방어했다. 물론 전세계 외환 딜러들이 모두 덤벼들었다면 대만이라고 살아남을 리 없었겠지만, 외환 딜러의 생리상 대만 달러는 공격해야 먹을게 없다고 생각했다.

1998년 연초 기준으로 대만의 외환보유액은 830억 달러에 이르렀다. 한국은행이 통화위기 이전에 보유한 외환의 두배를 훨씬 넘는다. 그렇지만 아시아 위기 발생후 대만도 자국 통화가치를 15%나 절하해야 했다. 한국보다 작은 경제 규모에 많은 외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비록 약간의 통화 하락을 감수했지만, 통화 붕괴를 거뜬히 방어할 수 있었다.

대만의 또다른 장점은 보수적인 금융시스템의 운영에 있다. 이미 86~90년에 부동산 거품현상을 겪었기 때문에 일본이나,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가 거쳤던 부동산 거품 경기는 사그라져 있었다. 대만 중앙은행은 시중 은행의 민간대출을 엄격하게 규제했다. 위험성 있는 해외 단기 차입을 억제했고, 은행들도 기업에 대출할 때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하며 돈을 주었다.

중국 민족은 유태인에 비견할 만큼 상술이 뛰어난 민족이다. 돈을 아끼고 금을 땅속에 묻어두는 관습이 강하다. 남에게 돈을 빌려줄 때 상대방이 돈을 갚을 능력이 있는가를 꼼꼼히 따져본다. 서양의 금융관행을 도입하기 앞서 중국인들은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상술 속에서 신용과 대출의 상관관계를 알고 있었다. 금융위기가 아시아 지역을 무차별로 짓밟고 지나갔지만, 중국, 싱가포르, 홍콩, 대만의 경제가 무너지지 않은 것은 어쩌면 중국민족의 상관행 즉, 엄격한 돈 관리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화교가 상권을 쥐고 있지만 원주민이 정권을 장악하고 성장을 주도한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의 경제가 붕괴하거나 위태로운 지경에 처한 것과 분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 /그래픽 = 김송현

 

대만 기업인들은 또 해외투자의 상당액을 홍콩을 거쳐 본토에 투자하고 있다. 비록 국민당과 공산당이 정치적으로 적대적 관계에 있지만, 기업인들은 이런 관계를 무시한다. 본토와 대만 정부도 이를 용인했다. 93년에 대만 기업 해외투자의 15%에 불과했던 본토 투자 비율이 97년에는 30%에 이르고 있다. 97년 중국에 대한 외국인 투자가 전년대비 3% 증가하는데 그쳤지만, 대만인의 본토 투자는 전년대비 22%나 늘어났다. 지난 10년동안 대만 기업인들이 본토에 투자한 금액은 350억 달러에 달했다.

대만 기업의 본토 투자 확대는 중화 경제권의 동시 안정의 틀을 만들어주고 있다. 중국과 홍콩 경제가 안정되면 대만 기업의 본토 투자가 수익을 얻어 경제 안정에 기여를 한다. 또 아시아 위기로 중국 본토가 외국인 투자 감소를 겪었지만, 대만 자본이 상대적으로 많이 본토에 유입됨으로써 이를 상쇄하는 효과가 있었다. 대만 해협을 둘러싸고 미사일 포격전이 벌어지고, 양국 정부가 군사적 대결을 벌이더라도 경제적인 문호를 닫지 않은 중국 민족의 대륙적 기질이 아시아 위기를 넘기는데 일조를 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대만은 아시아 위기가 한참이던 98년 2월 곤경에 처한 아시아 국가를 돕겠다고 나선 적이 있다. 대만정부는 이른바 「아시아 기금(Asian Fund)」를 만들자는 제안을 공식적으로 제시했다. (대만의 제안은 일본이 제기한 아시아통화기금(AMF)와는 별도로 제시됐다.)

대만은 “IMF만으로 아시아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며 새로운 기금의 창설을 주장했다. 내용도 비교적 구체적이었다. 아시아 국가의 부채를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APEC)」가 지급보증해서 국제시장에서 채권으로 발행하자는 방안이었다. 또 금융위기를 겪고 있는 태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이 일본이나 대만과 같은 건실한 국가가 지급 보증하는 국채를 신규 발행하는 방안과 대만에 전환사채를 발행해 빚더미에 올라있는 아시아 기업을 도와주는 방안도 제시됐다.

그러나 대만의 제안은 IMF와 미국에 의해 묻혀버렸다. 미국은 IMF 이외의 기금 창설을 원천적으로 봉쇄했다. 미국이 마음대로 움직이는 국제 단체 이외에 다른 단체나 기금이 생기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물론 대만 경제가 아무리 건전하다고 해도 아시아를 블랙홀처럼 빨아 당기는 금융위기에서 건져낼 여력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본토에 밀려 국제 정치무대에서 왜소해진 처지에서 탈피하고, 아시아에 불어닥친 경제 위기 도미노에서 넘어지지 않았다는 자신감을 보여주고 싶어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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