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땅에 있던 여진족 마을…재가승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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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땅에 있던 여진족 마을…재가승촌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3.15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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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귀순해 살며 독특한 풍습 유지…두만강 일대에 거주

시인 김동환(1901~1958년)은 함경북도 경성군 금성면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에 그곳에서 자랐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사시로 알려진 그의 「국경의 밤」은 국경지대 두만강변 작은 마을에서 얻은 정서와 강한 낭만성, 향토적 느낌을 주고 있다. 그 시의 여주인공인 순이는 재가승 집안의 딸로 등장한다.

우리나라에도 여진족의 후예가 살고 있었다. 김동환의 「국경의 밤」에 나오는 재가승(在家僧)이란 족속의 뿌리가 바로 여진족이다.

재가승이란 말의 원뜻은 아내를 얻어 사는, 즉 가정을 가진 승려를 말한다. 함경북도 재가승 마을 주민들은 불교를 바탕으로 생활을 했으며, 불교에 능숙한 사람을 촌장으로 뽑았다고 한다. 그래서 재가승 마을은 ‘중골’이라고도 했다. 이들은 두만강 함경산북 북쪽 골짜기에 모여 살면서 화전을 일구며 살아갔다.

그들의 유래에 대해선 ▲고려시대 여진 정벌 후 잔류한 원주민들이 부락을 이루어 살면서 시작되었다는 설 ▲병자호란 후 청에 대한 조공을 위해 여진족들을 뽑아 한 마을에 살게 했다는 설이 있다.

일제때인 1935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재가승 인구는 당시 563호, 3,323명명이었다. 가장 많이 분포한 곳은 함경북도 회령군 창두면 종암동, 그리고 함경북도 온성군 미포면 월파동이었다.

조선초기 두만강 유역에 살던 여진족 부족은 울량합(兀良哈, 우량하이), 울적합(兀狄哈, 우디거), 오도리(斡都里) 등이었다. 세종대왕이 여진족으로 몰아내고 이 곳에 6진을 설치했다. 울량합·오도리의 일부는 두만강 남쪽의 경원·온성·회령 등의 성밖에 살면서 조선에 귀순하는 태도를 보였는데, 이들은 차츰 조선 사람으로 동화되어 후대에 재가승으로 불렸다.

▲ 여진족 분포 /KBS역사저널 캡쳐

 

이들은 우리민족과 다른 독특한 풍습을 유지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대산귀(大山鬼)라는 풍습이다.

마을에 병자가 생겨 무당에게 점을 쳤을 때, 귀신의 탈이 났다고 하면, 마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대대적인 대산귀를 차린다. 비용을 많이 들여 쌀과 돼지, 송아지를 마련하고, 일년에 한두 번 정도 대산귀를 거행했다. 제사를 지낼 때, 하천 가까운 곳에 깨끗한 빈 터를 선택하여 높은 다락을 세 계단으로 만든다. 그 중앙에 장대를 세워 귀신 이름(神名)을 쓴 크고 기다란 천을 매달고, 떡 20~30그릇을 차린 다음 무당 2~3명을 데려다가 밤을 새워 굿을 한다. 마을 주민들은 의무적으로 동원되어 밤을 새웠다. 이튿날 아침 늦게 돼지를 잡아 고기를 올리고 다시 굿을 하면 저녁이 되어야 끝났다. 굿을 하는 중간에 몇 번 점을 쳐 보고 굿이 잘 되지 않으면, 돼지 대신 소를 잡기도 한다. 대산귀가 끝난 다음에는 우선 복술의 집에 떡과 고기를 보내고, 가가호호 떡과 고기를 분배한다.

1년에 두 번 산치성(부군치성)에서 제사를 올리고, 연중 4번 올리는 산제가 있었다. 대체로 마을 사람들끼리 결혼을 했으며, 외지인들이 그들과 혼인할 때에는 그들 마을에 와서 살아야 했다. 또 제사를 지낼 때에는 성인남자는 참여하지 않고 여자와 아이들이 지냈으며 지낼 때에는 붉은 옷을 입었다.

 

재가승들은 특수한 족속으로 취급받아 천민 생활을 했다.

소설가 강경애(1907~1943년)의 수필 「두만강 예찬」에서는 재가승들이 억압을 받고 살았다고 묘사됐다.

“세종왕은 신하인 김종서를 이 지방에 보내어 여진족을 토벌한 후에 두만강을 국경으로 정하였다. 그 전에는 회령에서 청진까지 일직선을 그어 이남이 조선이었다. 그러던 것이 이때에 와서야 비로소 두만강이 국경이 되었다.

당시에 여진족은 눈으로 차마 보지 못할 압박을 받으며 죽지 못하여 살았다. 지금도 그러하거니와 권력자 앞에 그들의 생명은 풍전등화였다. 불교를 강제로 믿게 하는데 너희들은 가족을 데리고 집에서 믿어라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산에서 믿는 불교를 집에서 믿게 되었다. 이른바 재가승(在家僧)이란 말이 여기서 나온 것이다.“

 

재가승들은 주로 농사를 지었고, 산간으로 도피해 화전을 일구어 주로 귀리를 생산했다. 남자는 종이를 제조하고 여자는 길쌈을 하며 농사도 겸했다.

귀리를 이용해 황지(黃紙)를 생산했다. 황지란 귀리로 만든 종이를 말한다. 귀리는 추운 지방에서 재배되는데, 재가승들은 이 황지 바치는 것으로 세금을 대신했다. 일제시대엔 목탄 제조와 산나물 채취를 주업으로 하기도 했다.

장래 풍습은 원래는 화장이었지만, 이후 현지 풍습을 받아들여 매장도 했다.

언어는 한국어의 하위 방언으로, 동북 방언 및 육진 방언을 구사했다. 특이한 어휘들이 많았다. 예를 들면 나물을 '나마리', 떡고물을 '영에', 지각없다는 말을 '덕새(양소래)없다'고 했다. 호환(虎患, 호랑이에게 당하는 재난) 때문에 생긴 것으로 추정되는 '범이야범이야'라는 말은 욕설이었다.

조상 및 부모의 제사도 장남이 도맡은 것이 아니라 형제끼리 분배했다. 분가할 때 재산을 평등하게 분할했고, 제사도 나누어 주었다.

여자들은 남자와 같이 바지를 입었으며, 저고리를 짧게 하고, 저고리와 바지 사이에는 너비 약 30㎝ 정도의 허리띠를 매어 젖가슴이 크게 노출되었다. 아이들은 돼지 어금니 두 개를 마주 붙여 색실로 감아올린 호신부(護身符)를 지녔다.

식생활은 산간지방과 승려의 풍습에 영향을 받아 잡곡과 산채 등을 주로 먹었지만 특별한 날에는 육식을 했다. 주택은 큰 방 하나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주택의 주위에 울타리는 만들었지만 샤머니즘의 영향으로 주위에 나무를 심지 않았다고 한다.

▲ 재가승 마을 위치 /그래픽=김송현

 

일제시대인 1935년 함경북도 재가승 인구는 다음과 같다. (동아일보 「재가승만고」. 아래 참조)

 

부령군 부령면 허통동 19호 112명

부령군 석막면 금강동 42호 175명

회령군 팔을면 영천동 47호 285명

〃 창두면 무산동 70호 421명

〃 〃 풍산동 18호 126명

〃 〃 영산동 10호 73명

회녕군 창두면 창태동 55호 385명

〃 〃 종암동 92호 684명

〃 〃 어운동 68호 298명

회녕군 벽성면 대덕동 30호 108명

종성군 풍곡면 풍계동 사동 28호 154명

온성군 상포면 풍판동 오제동 8호 52명

〃 미포면 월파동 영월사 53호 309명

〃 〃 풍교동 제봉 10호 65명

〃 온성면 주원동 구암 3호 13명

경흥군 상하면 송상동 보현곡 10호 63명

합계 563호 3,323명

 

재가승촌은 일제시대와 해방초까지 조선에 동화되지 않고 계속 유지되었다. 하지만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선후 강제로 동화되어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재가승만고(在家僧漫考)

 

대구 출신의 문학자 이재욱은 1935년 11월 30일자부터 4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재가승에 대한 글을 실었다. 제목은 재가승만고다. 한국의 소수민족인 재가승에 대한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머리말

▲ 1935년 11월 30일자 동아일보에 게제된 재가승만고 기사

 

現今 鴨綠 豆滿兩江의南岸 卽北朝鮮六鎭의 故地山間地方에 在家僧이라는 一種特殊部落이 散在하여 殆히原始的生活을 營爲하고 잇다는것은 너무나有名한 事實이나 그所謂在家僧의 由來에對하여는筆者의아는限 아즉定說이 없다. 從來로 學界에잇어서나 市井에잇어서나 主張或은 傳說이 없지아니하며 또 이 問題에對하여 相當한關心을 가지엿는데도 不拘하고 아직까지 그正體를 究明하지못하엿다는 事實에對하여는 學界를爲하여 甚히遺憾事라 아니할수없다. 이러한 意味下에서 簡粗, 無頭緖의感이 不無하나 在家僧에關하여 若干論述하여 諸賢의 參考에供하고저한다.

 

一, 北朝鮮의史的槪觀

 

지금 在家僧의 居住하는 咸鏡道一帶地方은 古代에잇어서는 現今의咸興一帶는 東沃沮, 咸鏡道豆滿江沿岸一帶는 北沃沮의 根據地엿다. 그다음 三國時代에 들어와서는 高句麗의 興起에依하여 그故地는 高句麗의 領有하는바가되엇으며 新羅眞興王時代에잇어서는 咸興의 北方黃草嶺以南의 地區는 新羅의 勢力範圍內에 들어갓다. 其後 渤海國이興起하여 新羅의北境을 侵犯하엿고 이어서 契丹(遼)이 建國되여 鴨綠江, 豆滿江의 北方一帶를 領有하게되자 女眞族은 그窟穴을 喪失하고 大擧豆滿江沿岸에 避難하여 今日의咸鏡南道를 占據하엿다. 그다음 高麗, 李朝時代에 잇어서의 情勢는 어떠하엿을까.

高麗[1]는 半島를能히 統[2]合하엿으나 그北境은終始女眞族의 侵犯을 받엇고 따라서 睿宗二年에 元帥尹瓘, 副元帥吳延寵은 十七萬의大軍을 거느리고가 女眞을大破하고 拓地定界하여 英州, 雄州, 福州, 吉州, 咸州, 公嶮鎭, 宜州, 通泰, 平戎等九城을 新築하여 徹底的으로肅淸工作을 斷行하엿다. 이肅淸工作의 成功을 記念하기爲하여 其後, 北靑에는 萬賴祠, 利原에는 侍中臺, 鏡城에는 元帥臺, 慶興에는 征北祠를設置하여 春秋의祭祠를 繼續하여온다고 한다. 如斯히 從來, 北境一帶에蟠居하여 邊民을 괴롭게하는 女眞族은 그根據地를 喪失하는等 高麗에게 徹底的掃蕩을當하엿음에도不拘하고 女眞族은 依然히 連歲來侵하여 北境의情勢를 騷亂케 하엿다. 그러므로 高麗時代에잇어서는 今日의 咸鏡道一帶는 高麗, 女眞의 爭奪地化하엿고 따라서 今日의咸興以北에地區는 結局 女眞族의巢窟化하엿다고 보는便이 穩當한觀察이라 하겟다. 다음 李朝에들어와서는 國初에北境一帶에 孔鍾吉等七州를 設置한以後는 北境一帶는 形式上 朝鮮의領有에歸하엿으나 女眞族의 入寇[3]는 依然不絶하엿음으로 世宗十六年에 金宗瑞를 咸吉道觀察使에任하고 國境一帶에 慶源, 會寧, 鍾城, 穩城, 慶興, 富寧等六鎭을設置하여 防禦의 完璧을期하엿다. 그러나 淸太祖가 鴨綠, 豆滿兩江의 北境을 平定하자, 女眞族은다시 難을避하여 大擧半島北境에殺到하여 國境地方은 又復그들의侵寇를받으나 未久에 淸太祖가 支那中原에 進出함을따라 女眞族과의紛爭은 大端緩和되어 國境의情勢는 小康保持하엿다. 이제 萬機要覽의 記錄을通하여 高麗, 李朝時代에 잇어서의 北境地方의情勢一般을 總括的으로 推測할수 잇다고 믿는다.

 

卽 萬機要覽 六鎭開拓條에 『宗瑞密爲書以啓曰, 高麗始祖力能統[4]合三韓, 威不及於朔方, 只以鐵嶺爲界, 其在睿宗, 謀臣騁[5]智, 誘翦[6]戎[7]醜, 遂置九城, 然旋[8]得旋失』이라하엿고 그다음에 『…世宗壬子, 兀狄哈攻斡木河[9]殺管禿父子, 其黨凡察反伊[10]等, 款[11]塞願處慶源近地, 不許, 敎兵曹曰, 我國北界豆滿江, 太祖始置慶源府于孔州, 太宗移府治于蘇多老, 皆所[12]以重肇基之地也…於是, 以金宗瑞爲咸吉道觀察使, 設置慶興, 會寧, 鍾城, 穩城, 慶源, 富寧, 築城實民, 凡六年而鎭之[13]』 라하여 這間의消息을 傳하고잇다.

 

二, 由來

今日, 咸鏡北道의 邊境一帶에 居住하는, 所謂 在家僧은 一便 僧侶로 行世를하면서 一便 俗人과같은 生活을 營爲하며, 蓄妻鞠子한다는 것은 周知하는바이어니와, 李能和氏는 朝鮮佛敎通史에서 在家僧에 對하여, 다음과같이 말하엿다—

『海東僧史, 有一奇事, 卽 北邊之在家僧是, 蓄妻食肉, 俱爲無碍, 可謂朝鮮之眞宗也, 咸鏡北道慶興, 慶源, 會寧, 富寧, 鏡城, 穩城等沿邊各郡, 特有一種僧侶, 群聚居生于山谷中, 自成村落, 其所居村落名山門, 必有公共佛殿一處, 婚喪之禮, 行於寺, 號曰在家僧, 血脈法脈, 兩俱相續, 以別良俗, 不令雜處, 劃定村落, 使有增殖……』이라 하여 大略 在家僧에 對하여 論述하엿고, 그由來에 對하여는 高麗圖經의 所說에 左袒하엿다. 그러나, 이由來問題에 對하여는 學界에잇어서는 尙今그結論을 얻지못하엿고 各其蓋然的所見을 披瀝하는 程度를 지나치지못하고잇는現狀이다. 從來로 이由來問題에對하여는 大體로 三說이流布되고잇으니 그것은 奴隸說(僧軍說), 僧侶說, 藩胡說인것이다. 勿論 主從을 달리하는程度에 지나지못하고 그根本問題인 種族問題에對하여는 女眞族에大體로歸一하는듯도하나 然이나 各其所說의根據가 薄弱하야信憑할만한決論을 얻기에는 아직前途遼遠이라 아니할수없다. 只今左[1]에 各說을紹介檢討하고저한다.

 

甲, 奴隸說(僧軍說)

첫재, 이在家僧의 由來에 對하여, 世間에 傳하는所謂 僧侶說, 或은藩胡說以外에, 宋의徐兢의所謂奴隸說을 紹介하려고 한다. 卽그의著, 高麗圖經에依하면,

『在家和尙, 不服袈裟, 不持[2]戒律, 白紵窄[3]衣, 束腰皁帛, 徒跣以行, 間有穿履者, 自爲居[4]室, 娶婦鞠子, 其於公上, 負載器用, 掃除道路, 開治溝洫, 修築城室, 悉以從事, 邊陲[5]有警, 則團結而出, 雖不閑於馳逐[6], 然頗壯勇[7], 其趨軍旅之事, 則人自褁糧[8], 故國用不費而能戰也, 聞中間契丹爲麗人所敗, 正賴此輩, 其實刑餘之役人, 夷人以其髡削鬚髮而名和尙耳.』라 하여 所謂, 在家僧은 袈裟를 입지아니하고, 戒律을 가지지아니하며, 邊境에서軍務에服하여, 所謂屯田兵과 恰[9]似한種類의 것임을말하고 잇는듯하다. 다시말하면, 世間에서, 이特殊階級을 在家和尙이라 指稱함에至한 그根據가 그들이鬚髮을髡削함에잇으나, 그實은 그들이 刑餘之役人인限, 이 階級을 在家和尙이라함은 틀림없이 誤謬를犯한 見解라고 보고잇는듯 하다.

그다음, 李能和氏는 在家僧의 由來에對한 一說로서 그著 朝鮮佛敎通史에서 世間에서는 이在家僧의由來를, 仁祖十四年에 勃發한 淸兵의 入寇[10], 卽, 丙子胡亂때에, 淸兵이 大擧南漢山城을 攻圍하여 四十五日만에 媾和解圍한 故事에 關聯시켜, 그當時, 淸國은 그媾和條件의一로서 朝鮮에 對하여, 그要求가잇는 卽時로, 大乳人 三千人과 牝馬三千匹을, 寧古塔에 入送하라는 要求를 하엿음으로, 北邊沿郡에 居住하는 女眞遺族으로서 이要求에 應할計劃을 樹立한後, 이를保護하엿고, 現今, 北邊沿郡에 蟠居하여 一種特殊部落을 形成하고잇는, 在家僧의 由來가여긔서 發足하엿다고 傳하는者가잇다고 하엿다. 그러나, 이說은 所謂在家僧이 高麗時代에벌서 邊境에서, 特殊 集團生活을 營爲하고 잇[11]엇다는 記錄이 儼然히 現存하는 以上, 坊間의一種俗說에 지나지못할것이다. 그러나, 徐兢의 刑餘之役人說은 그記錄이오래인點과, 當時의 政治的 特殊性을 吟味한다면, 在家僧의 由來問題檢討에 關하는限 一顧할만한 說이라고 하겟다.

 

乙, 僧侶說

다음에, 李能和氏는, 前揭書에 잇어서, 다시在家僧由來에 對하여 다시一說을 紹介하엿다. 卽,

『又說, 高麗尹瓘[12]驅逐女眞, 其殘落者造寺院, 以安處之, 使之奉佛, 族居爲僧…』이라하엿다. 只今, 그由來에對한所說을보건대女眞邊人을僧侶로變換시켯다는데, 그根據를찾고저하는說이다. 또盧□[13]氏는그著 淸津府一方面茂山郡會寧郡鍾城郡穩城郡各管內及間島古蹟調査의顚末에서

『初金宗瑞之驅出女眞也, 其窮不能徒去者, 歸化則斷髮區別之, 旣斷髮則, 屬之寺刹, 謂之在家僧, 戰時則運搬軍需(軍幕等)而在前驅, 平時則, 造黃紙以供官用, 極賤不可與平民同等故, 土豪亦皆以奴隸使之, 諸般討索, 罔有紀極, 距今前西北經略使魚允中, 革袪其賤役, 然慣習猶存故, 官每欲復其身役則, 渠自呼訴于京司, 僅民造紙之役, 然在鄕役不得免焉…』이라하여 女眞遺民을 政策上 斷髮시켜, 邊境各寺刹에分屬시켯다는데서 그由來를찾고저하는說이다. 勿論, 이女眞遺族의僧侶說도 充分히 在家僧 由來問題檢討上 그對象[14]이될만한 說이라하겟으나 이說을 肯定하기까지에는 아즉 相當한根據와時日이要하지안흘가한다.

재가승만고 (3)

 

在家僧漫考 (三)

 

丙, 藩胡說[1]

以上에서 在家僧의由來에 對한 諸說을 檢討紹介하는 便利上奴隸說, 僧侶說等으로 分立시켜, 各其그主要點을 紹介하엿거니와 當時의 社會的情勢로보아서 寺刹과軍隊는想像以上으로 密接한 關係下에 잇엇음으[2]로 이兩者를全然分離하여서 在家僧과의 關係를檢討함에는 너무나 無理가잇다고생각한다. 只今 여긔서 紹介檢討하려고하는 藩胡說을말하드래도 이在家僧의由來에對한 諸說의 大多數가 그種族問題에對하여서는 그見解가女眞族에 一致함에도 不拘하고 구태여 여긔서 藩胡說이라는 項目을設함은 蛇足의感이 不無할줄아나 檢討의順序上 그由來가奴隸關係에 잇지아니하고 또 僧侶關係에도 잇지아니한다고 假定한다면 이項目을設함은 全然無意味하지는아니할것이다. 于先 北路紀略에依하면—

『……或曰在家僧, 惟西北邊境有之, 舊之藩胡所住近處也…但以擁髮而居我境故謂之僧耳, 司敎之地, 宜有以變之也, 明川以南始有僧.』이라하엿으며 記錄을通하여서는 藩胡의奴隸 或은僧侶와의關係를 到底히把握할 餘地가없고 在家僧의 正體는 하마알아볼方途가 없다는感을준다. 따라서 學徒의興味는 더욱더욱眞劍味를 加하는것은 當然한歸結이라고 아니할수없다.

以上에서 在家僧의由來에 關한諸說을紹介檢討의便利上奴隸說, 僧侶說, 藩胡說로大別하여若干紹介한바잇엇거니와 畢竟 그正體를 究明하지못하엿다는것은 肯定하여야할事實이다. 그러나 다음의 記錄에依하여 그由來究明에 잇어서적지아니한 暗示를 얻을 것이다. 北塞紀略(孔州風土記條)에依하면

『山僧多在家, 挾妻食肉, 子孫繼襲爲僧』이라하엿고 北路紀略에依하면,

『僧皆在家, 娶[3]妻生子, 食肉飮酒, 謂之在家僧, 世襲爲僧…』이라하엿다. 따라서吾人은그由來卽그正體究明에잇어서更一步한感이 不無하나 依然五里霧中에서 헤메는感이적지아니하다. 그러나最後의注意할만한 記錄은 水原儒生禹夏永의著, 時務策中에보이는六鎭僧徒議의 記錄일것이다. 이說을以上의諸說과 아울러 考察한다면在家僧의 由來의 輪廓이 자못 鮮明해질것이라고 믿는다.

 

六鎭僧徒議에依하면,

『北路豆滿江沿邊六鎭 及三甲列邑 與彼界隔一衣帶而, 水狹灘淺, 間多[4]徒揭之處, 彼我人民, 因其採獵, 潛越往來之弊, 種種難禁, 況且逐年開市, 與彼通貨, 彼人之多年來往於市門者, 能爲我國之言, 對面酬酢, 少無差誤, 但其服着與我有異, 故能辨[5]爲彼人, 今所隱憂者, 彼若換着一白衲潛越我界, 混跡於本國僧徒則, 無以辨[6]別, 脫有僧俗中不逞之徒, 引入寺刹闌間販貨, 一過沿江之邑則, 雖遍行國中, 孰知其爲彼人也哉, 何況逐利興商彼我人情之所同一, 有邊禁之疎虞則, 潛機轉入固其勢也』라하여, 在家僧의 由來問題檢討上, 적지아니한 示唆를주는 記錄이라하겟다.

要컨대 現今北邊에群居하는 在家僧은 그種族問題에잇어서는 적어도 女眞遺族이라고보는 것이妥當하다고 믿으며 또 그들이 在家僧이라는 指稱을받으면서 一種特殊部落을 形成하게되기까지의 過程에對하여서는 速斷을不許하나 女眞族中의 逐利興商을 圖謀하는者가 邊境의僧侶와 結託하여 僧侶로 假裝하여入居하엿다는 事實에서 그由來를 찾을수없을가한다. 그러나 이在家僧의 由來問題는今後學者들의 檢討硏覈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到底히 速斷은못할것이다.

 

三, 分布와俗習

첫재, 北朝鮮에 잇어서의 그들의分布狀況을보건대 前者에 잇어서도 屢說한바와같이 그들은咸鏡道奧地一帶에서 集團生活을 營爲하고잇으며 그들은 大槪 深山幽谷에 그住家를가지는 關係上, 그들의 人口乃至戶數에對한 正確한調査의 至難함은 勿論이다. 그러므로 故今西博士의 調査報告를紹介하려고한다. 그러나 이報告는 그들의 人口乃至戶數에對한 全般的調査가 아니며 또 最近의 調査가아니나마 于先여긔들어 이問題에關心을가지는 諸賢의 參考에供하고저한다. 要컨대 最近에 잇어서는 그들은 諸般社會的情勢 卽世運의進展, 朝鮮內地人과의 交涉等의 影響으로말미암아 漸次, 朝鮮內地人에 同化되어가는 傾向이며 今日에잇어서의 純全한在家僧의 主要住居地는 富平郡下南碩寺, 穩城郡下月下洞, 會寧郡下魯雁洞, 靈山洞等이다. 이제 咸北一帶地方에 群居하고잇는 在家僧은 大略다음과같다고 한다.

 

富寧郡 富寧面 虛通洞 一九戶 一一二人

富寧郡 石幕面 金降洞 四二 一七五

會寧郡 八乙面 靈泉洞 四七 二八五

〃 昌斗面 茂山洞 七○ 四二一

〃 〃 豊山洞 一八 一二六

〃 〃 靈山洞 一○ 七三

會寧郡 昌斗面 蒼苔洞 五五 三八五

〃 〃 鍾岩洞 九二 六八四

〃 〃 漁雲洞 六八 二九八

會寧郡 碧城面 大德洞 三○ 一○八

鍾城郡 豊谷面 豊溪洞 寺洞 二八 一五四

穩城郡 桑浦面 豊判洞 烏啼洞 八 五二

〃 美浦面 月波洞 映月寺 五三 三○九

〃 〃 豊橋洞 諸峰 一○ 六五

〃 穩城面 周源洞 鳩岩 三 一三

慶興郡 上下面 松上洞 普賢谷 一○ 六三

 

以上은 在家僧의 分布를 大略말한것이요 그後 多少의 變動이 잇엇다는 點을 充分 諒解하여주기바라는바이외다. 그리고 比較的 最近의 報告에依하면 茂山地方一帶에 잇어서는 그數爻가 漸次減少하여지고 그勢力이 逐年衰弱의一路를 밟는다고 傳한다.

다음에는 그들의 習俗에對하여 그大綱을 말한다면 그들은 職業으로서는 農業(火田)을 爲主하나 그居所를 殆히 山嶽重疊한 深山幽谷에 擇하는關係上 그土地가狹小하고 또地味가 瘠薄하여 豊足한生活은 到底히 期待할수 없는 狀態이다. 그리고 平時에는 黃紙를製造하여 公私 文書用에 供한다. 그리고 그들은 社會的 地位는 最下階級에 屬하며 一般平民과의 通婚은勿論 甚至於 交際까지못하는 狀態이다. 또 各其家庭에는 佛像佛具가없고 但[1]只 部落外에 寺院을建立하여 各其守護의任에 服한다. 그들의 衣服制度는 어떠할까? 卽그들은 婦女子의裝身具, 衣服의 貌樣等은 距今約三十年前의 朝鮮內地人의 婦女子의그것에 恰似하다고 傳한다. 그食事는 僧侶의 行世를하면서도 肉食을不禁하며 그住居를 深山幽谷에擇하는 點은그들의 어느部落에가든지 第一눈에먼첨뜨이는事實이라한다.

이제 冠婚喪祭의 儀式에잇어서 그들의習俗을 살펴보기로하자. 그들은 冠婚喪祭의場所에는 招請의有無를勿論하고 全家族이 參席한다고한다. 따라서 欽定滿洲源流考에보이는,

 

『女眞飮宴, 賓客盡携親友而來, 相近之家, 不召皆至…』라한 이記錄은, 在家僧의女眞族由來說에만흔興味를 加함을알겟다. 只今 冠婚의習俗에 對하여, 于先 말한다면 在家僧은 自己以外의 他族과는絶對로 通婚을하지아니하고 嫁娶時에는 牛馬를使用한다고한다.

또 그다음 喪祭의習俗을보건댄 一律로火葬을하며 그遺骨은 그것을粉碎하며 五方에散布하며 人間은죽으면 靈魂은釋尊의 側近에歸依하는것이라고 確信하는 關係이라고한다.

그다음 이在家[2]僧의習俗에 對하여 金基哲氏는 그의著『關北大觀』 中에서 詳細論述한바잇거니와 只今 그大要를 紹介한다면 다음과같다. 이記錄에 依하여, 在家僧의 由來와 그들의 日常生活의 全貌가 더욱 鮮明化할 것이다. 卽,

그들은元來, 女眞族의 歸順한種族이라하야, 一般이 그들을 奴隸視하며, 그들은 部落全體의 共同寺刹을建設하여, 部落全體가奉祀하나, 佛經을 讀하는 者없고, 但[3]只 佛前에 禮拜할뿐이며, 그들은元來, 姓名을 가지지아니 하엿으나, 近來에는, 任意로 姓名을 지여 使用하며, 또, 在家僧을 僧軍이라고하는 傳說이잇으나, 何等의 實蹟이없고, 武器를가진 形跡도없다한다. 또, 在家僧은 音聲과 姿態가 朝鮮內地人과달너, 逃亡은 極難하다하며, 그住居의入口에는 반드시 石墻을 設한다. 이것은 他部落과 區別함이그目的이며, 萬一그區域을 넘어서 居住하면, 朝鮮內地의 兩班에게, 捕獲되어, 奴隸가되는 事實等을 紹介하엿다.

 

四, 結言

以上에잇어서, 朝鮮北境一帶에 蟠居하여, 一種特殊階級으로서時代의風潮를超越하고, 殆히, 原始的生活을 營爲하고잇는 在家僧에 對하여, 所見의一端을 披瀝하엿으나, 現在에잇어서는, 아즉 그正體를[4] 究明斷定할 何等의根據가 없는故로, 그斷案은 保留하거니와, 자못, 北境에 이러한 特殊部落이存在하여, 어떠한意味에잇어서나, 이問題는 朝鮮學徒의 當面한 重要硏究對象[5]의 하나임을 알어두어야할 것이다. 그리고, 最後에, 이在家僧에 對한 槪括的私見을 披瀝하여둔다. 卽, 在家僧은 그種族問題에 잇어서는 女眞遺族이라고보고십흐며, 그들이 今日과같은生活을 營爲하며, 在家僧이라는 指稱을받는 動機에 對하여는, 逐利興商을圖謀하는 女眞人이 그利害關係上, 北境列邑의僧徒와 結託하여, 官憲의 監視를避하고저 하엿는데, 그 原因을 차즐수가 없을가생각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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