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금융위기㉑] 폭풍을 비껴간 필리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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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금융위기㉑] 폭풍을 비껴간 필리핀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3.15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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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관리체를 轉禍爲福 계기 삼아 도미노 위기 피해

1997년 아시아 위기가 전염병처럼 번져 나갈 때 가장 위험한 나라의 하나가 필리핀이었다. 국제 외환 투기자들은 태국을 공격한 다음 필리핀 페소화를 공격했고, 필리핀 중앙은행은 페소화 폭락 열흘만에 고정환율제를 포기했다. 그러나 그해 크리스마스 때 동남아 국가들 중에서 즐겁게 캐롤송을 들을 수 있었던 나라가 필리핀이었다. 태국과 인도네시아, 한국 경제가 줄줄이 무너져 내렸지만, 필리핀 경제는 비교적 안정감을 유지했다.

1997년 7월 2일 바트화 폭락을 시작으로 아시아 위기가 확산되자, 필리핀은 가장 먼저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규모는 10억 달러로, 태국·인도네시아·한국이 신청한 금액보다 훨씬 적었다. IMF는 필리핀이 요구한 구제금융을 즉각 지원했다.

필리핀에 대한 IMF 구제금융은 비록 적은 금액이었지만, 멕시코 페소화 위기 이후 IMF가 통화 위기에 처한 나라에 구제 금융을 재개한 첫 케이스였다.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는 IMF의 필리핀 지원을 묵인했다.

 

필리핀은 오랫동안 IMF의 간섭 하에 있었다. 1986년 2월 시민 혁명으로 권좌에서 물러나기까지 장기 집권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Ferdinand Marcos) 대통령은 필리핀 경제에 고질병을 남겨 놓았다. 절대권력은 절대로 부패하는 법. 필리핀도 다른 아시아 국가들처럼 정실 자본주의(crony capitalism)에 시달렸다. 권력과 유착한 대기업은 개방을 싫어했고, 내수시장의 독점에 안주했다. 금융기관은 누적 부실 여신에 시달리면서도 권력에 붙어있는 기업에는 대출을 해주었다.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필리핀 금융기관의 부실 여신 비율은 50%에 이르렀다.

필리핀은 천연자원이 풍부하고, 영어를 구사하는 양질의 인력을 가지고 있는 좋은 조건에 있었지만, 마르코스 독재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부의 집중이 심화됐고, 국민 대다수는 가난의 질곡에 허덕였다. 마르코스 정권의 경제는 권력과 유착한 독점 경제였다. 마르코스의 부하들은 코코넛에서 에어컨에 이르기까지 독점했고, 외국인들의 시장 참여를 배제하기 위해 관세를 높게 매겼다. 식료품가격과 기름 값은 정부의 통제에 의해 정해졌다.

필리핀은 80년대에 사실상 채무 불이행 상태에 빠져 국제사회에 모라토리엄(moratorium)을 선언할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이를 구해준 것이 IMF였고, IMF는 필리핀의 고질병을 고치는데 주력했다. IMF는 필리핀 경제에 시장 경제의 개념을 이식시켰고, 아시아의 호랑이들이 고속성장을 하는 동안 안정적 성장을 가르쳤다.

IMF는 필리핀에 구제금융을 제공하는 대가로 고통스러운 처방을 요구했다. 시장을 개방하고, 관세율을 낮췄다.

예를 들어 마르코스 통치 시절 냉장고 내수의 85%를 장악했던 컨셉션 인더스트리스(Concepcion Industries)의 경우를 보자. 열대국가에 냉장고는 필수품이기 때문에 수요는 널려있다. 외제품은 100%의 관세율을 적용하는 장벽에 막혀 일부 부유층과 외국인을 제외하고는 가난한 필리핀인들이 사기 어려웠다. 굳이 공장 시설을 개선하고, 신제품을 개발하는데 쓸데없는 돈을 퍼부을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IMF는 독점을 방치하지 않았다. 관세를 대폭 낮췄다. 값싼 외제냉장고가 물밀 듯 들어왔다. 컨셉션사는 2,500 달러에 이르는 시설투자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회사의 내수시장 점유율은 50%로 떨어졌지만, 매출액은 과거보다 증가했다. 값싸고 질 좋은 제품이 경쟁하면서 국내 시장 규모가 커졌기 때문이다.

IMF는 필리핀 금융기관에도 수술의 칼을 들이댔다. IMF는 마르코스 정권의 돈줄이었던 필리핀 내셔널 뱅크(Philippines National Bank)를 민영화했다. 97년말 현재 이 은행의 지분 가운데 54%가 민간의 손에 넘어갔다. 기업과 금융기관의 회계에 「투명성(transparency)」의 개념을 도입했다. 태국·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은행들이 거품처럼 부풀어 오른 땅값을 담보로 기업에 돈을 대주다가 막대한 부실 여신으로 골머리를 앓는 동안, 필리핀 은행은 부동산 대출을 가급적 자제했다. 덕분에 한때 50%까지 이르렀던 금융기관의 부실 여신 비율이 97년말엔 5%로 떨어뜨릴 수 있었다.

IMF는 필리핀 정부와 국민들에게 내핍을 강요했다. 태국과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가 「국민차」 생산계획을 수립하고, 백여 층의 고층빌딩을 짓고, 항공기 제작산업에 손을 댈 때 필리핀은 허황된 꿈을 포기했다. 다른 아시아 국가들이 국가적 자신감, 솔직히 말하면 오만에 빠져 있는 동안에 필리핀은 오기를 부리지 않았다. 그들은 과거 독재정권의 오기가 만들어낸 시장 파괴의 후유증을 앞서 경험했기 때문에 착실한 성장을 다져나갔다.

필리핀은 「토끼와 거북이」의 이솝 우화 중에서 거북이 방식을 도입했던 것이다. 느리지만, 착실하게 가는 것이 IMF의 요구였고, 필리핀은 이를 따랐다. 결국 아시아 위기는 토끼보다는 거북이가 결국 나았음을 입증해 주었다.

아시아 각국의 성장률을 볼 때 96년 필리핀은 5.7%로, 말레이시아 8.3%, 인도네시아 7.8%, 한국 7.1%, 태국 6.5%보다 훨씬 낮았다. 그러나 아시아 위기가 휩쓸고 지나간 98년에는 필리핀도 저성장을 기록했지만, 인도네시아·한국·태국등이 마이너스 성장을 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러나 필리핀도 아시아 위기의 여파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지 않다. 97년 하반기에 페소화는 달러 대비 30%나 하락했고, 주가도 연초대비 35% 떨어졌다. 필리핀 경제가 상대적으로 건실하지만, 국제 투자자들은 필리핀을 인도네시아나 태국과 구별하지 않고 같은 범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하티르가 국제 자본과 대결을 벌일 때 필리핀 은행들이 불만을 터트린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 /그래픽=김인영

 

필리핀은 원래 97년 7월 23일로 수십 년간의 IMF 간섭으로부터 졸업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태국에서 발원한 금융위기의 태풍이 몰아치자 필리핀은 IMF 졸업일을 연기하면서 IMF의 보호막을 이용했다. 필리핀은 1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얻는 대신에 당초 예정보다 반년후인 12월말에 IMF를 졸업했다.

필리핀은 아시아 위기의 와중에서도 97년 성장률 6.3%를 달성했다. 전년 5.7%보다 0.5% 포인트 높은 수준이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태국과 인도네시아를 썰물처럼 빠져나갔지만, 필리핀에서는 철수하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투자가 들어왔다. 미국의 반도체 생산업체인 인텔(Intel)은 생산라인을 확대했고, 대만의 에이서(Acer)사는 수빅만에 컴퓨터 생산라인을 건설중이다.

방콕과 자카르타에선 건설하다가 만 건물이 을씨년 스럽게 서있는데도 마닐라에선 건설 공사가 여전히 진행됐고, 호텔 예약율이 90%를 웃돌았다.

태국과 인도네시아, 한국이 새로이 IMF 구제금융을 받을 때 필리핀은 IMF를 졸업했다.

1997년말 피델 라모스(Fidel Ramos) 대통령은 미국을 방문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미 일찍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지난 5년동안 우리는 절대적이고 단호하게 구조조정과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IMF를 졸업하게 됐습니다.”

한때 아시아의 웃음거리가 됐던 필리핀은 IMF의 지도로 구조조정을 단행했고, 그 결과 다른 나라의 모범이 되었다. IMF는 필리핀의 경험을 거울삼아 한국과 태국, 인도네시아의 구조조정을 밀어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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