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명제 파동④…반대론, 베일 벗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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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명제 파동④…반대론, 베일 벗다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3.14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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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공화국 비화> 재계 중심 “단행땐 경제 파탄” 공세

1989년말의 어느날 최종현 선경그룹 회장이 청와대를 예방해 금융실명제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노태우 대통령에게 진언했다.

“각하, 금융실명제를 실시하면 경제가 큰일이 납니다. 경기가 위축된 상태에서 노출을 꺼리는 자금이 해외로 빠져나갈 우려가 높은데 우리 문화에 맞지 않는 실명제는 보류해야 합니다.”

노 대통령은 사돈인 최 회장의 건의를 묵묵히 듣기만 했다.

이 무렵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은 김종인 보건사회부 장관도 노 대통령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한다고 해놓고 못할 공산이 큰데, 대통령이 실명제를 어떻게 한다는 식으로 책임지지 못할 말을 삼가십시오.”

89년 하반기에 접어들면서 실명제 실시에 대한 반발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이른바 ‘3저 호황’으로 3년째 흑자를 기록했던 무역수지가 적자로 반전됐고, 경기가 침체 국면으로 빠져들었다. 실명제 실시를 앞두고 비실명의 뭉칫돈은 해외로 빠져나가거나 아파트니, 골동품이니, 무기명 채권이니 하는 곳으로 몰렸다. 증시도 장기침체 상태에 빠져들었고 돈이 돌지 않았다. 실명제 반대 세력이 명분을 내세울수 있는 경제 여건이 된 것이다.

실명제반대 세력의 집결지는 재계와 여당인 민정당이었다. 이들 세력은 가속페달을 밟아가며 금융실명제와 토지공개념을 밀어붙이는 정부의 개혁세력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이 중에서도 선경의 최종현 회장과 김종인 보사부 장관은 실명제의 문제점을 들고 나왔다. 한 사람은 대통령의 사돈으로서, 다른 한 사람은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받는 측근으로서 재계와 당의 의견을 최고통치권자에 심어주었다.

그러면 전경련을 중심으로 한 재계는 어떠한 과정을 통해 실명제 반대여론을 형성해 나갔는가.

전경련 내에는 당초 실명제를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이 엇갈려 있었다. 최창락 전경련 부회장, 정세영 현대그룹 회장, 구석모 한국경제연구원 부원장이 찬성하는 입장이었고 선경의 최 회장을 비롯해 다수가 반대론에 줄을 섰다.

최창락 부회장은 관료 출신으로 정부 정책에 대놓고 반대할수 없는 입장이었다. 현대의 정세영 회장은 “정당하게 일해 정당하게 세금을 내자”는 자신감이 있었다. 정세영 회장의 이같은 생각은 형인 정주영 그룹 명예회장이 정치에 뛰어들면서 실명제 실시를 공약으로 내세운 것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다.

전경련 내 실명제 찬성론자들은 개별적 입장 이외에도“재벌이 실명제 실시를 반대하는 것은 뭔가 구린데가 있기 때문이 아니냐고 정부에서 의심을 하는데, 그럴 바에야 차리리 찬성하자”는 의견을 내세웠다.

그러나 실명제에 대한 전경련의 기류는 실명제 보류 내지는 반대로 귀착했다. 재벌 치고 정치자금이니, 뇌물이니 하면서 비실명거래를 하지 않는 재벌이 드믈었고, 의류업계의 경우 무자료 거래가 절반쯤 되기 때문에 실명제가 달가운 제도가 아니었다.

전대주 당시 전경련 상무의 설명이다.

“그동안의 정치관행, 경제·사회 구조로 보아 기업으로서는 비실명거래가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뇌물 관행과 같은 제도의 개선이 선행되어야 했어요. 실명제를 실시하더라도 비실명 자금의 과거사를 캐지 않고 비밀을 철저히 보장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세원이 노출되면 실질적으로 세율인상 효과가 나타나 결국 기업의 세금부담만 늘어나게 된다는 점에서 세율인하등 보완을 축구했습니다. 경기도 하강국면에 접어들었지요.”

최종현 회장은 실명제에 관한 전경련 내 의견을 조율한 뒤 실명제 실시의 문제점에 관한 이론화 작업에 들어갔다. 그는 자신이 원장으로 있는 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에 지시, 기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는 한편 실명제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했다.

내부자료로 마련된 이 보고서는 정부안대로 실명제가 실시될 경우 사회·경제적으로 파탄을 초래할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보고서는 실명제 실시에 따른 경제파탄의 경로를 두가지 시나리오로 설명하고 있다.

시나리오①

정부가 증시를 뒷받침하지 않는다면 약 15조원의 돈이 증시 이탈을 희망할 것임. 이중 5조원이 이미 빠져 나갔고 10조원의 매물(주식)이 대기 중에 있으므로 증시가 폭라갛지 않을수 없슴. 실명제는 증시 폭락과 함께 그 실시안이 폐기될 것임.

시나리오②

정부가 증시를 10조원 이상 떠받친다면 증시는 안정되겠으나 부동자금은 약 20조원에 달할 것임. 이 부동자금이 금융권의 예금으로부터 인출되어 해외유출, 부동산투기, 골동품과 서화의 가격 폭등등 투기장을 유발할 것임. 만일 이러한 사태가 온다면 정부가 20조원의 증시 및 금융권 이탈 자금을 댄 셈이고 이 것이 빌미가 되어 경제가 파탄할 것임. 이러한 파국에다 저축 감소, 투자 위축까지 더해진다면 실명제는 한국 경제를 몇 년 뒤로 후퇴시킬수 있을 것임. 이 또한 어떠한 정권도 쓰러따릴수 있는 대참사라 할 것임.

전경련 보고서의 시나리오는 증시 대책에 초점을 두고 증시부양책을 쓰든 쓰지 않든 경제파탄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고 예고했다. 이 보고서 작업을 주도했던 민병균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당시 정부 계획대로 실명제를 실시했다멵 금융공황이 일어나서 나라가 위태로울 지경이었습니다. 과거를 묻지 않겠다고 했지만 비실명의 뭉칫돈이 증시와 금융권을 빠져가가 투기를 조장하게 될 게 불을 보듯 뻔했습니다. 정부가 증시를 부양하려 한다면 결국 이러한 투기를 조장하는 식이 되고, 결국 악순환이 반복될 뿐이었습니다.”

전경련은 일본의 학자들을 초청해 일본식 실명제인 그린카드제가 초래한 문제점을 주지시켰고, 언론매체를 통해 보완 또는 반대 논리를 확산시켜 나갔다.

 

흔들리는 노태우의 개혁 의지

전경련을 주축으로 한 재계의 실명제 반대 움직임이 본격화할 즈음, 민정당도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7월 18일 이종찬 사무총장은 국회에서 “실명제에 대한 보완대책을 마련하겠다”고 언급, 당내에 잠복한 반대론이 표출되는 듯 싶었다. 그러나 이 총장은 당시 정계개편설, 내각제 개헌론등 정치파문에 휩쓸려 8월 30일 당직 개편에서 밀려났다.

당내의 이같은 반발을 의식해 문희갑 경제수석은 8월 31일 서울 조선호텔에서 21세기 경영인클럽 주최로 열린 조찬회에 참석해 경제개혁의 톤을 높였다.

“정부가 토지공개념과 금융실명제를 동시에 도입하는 것은 금융실명화가 되지 않으면 또다시 투기로 이어져 토지공개념의 효율성이 저하되기 때문입니다. 이들 경제시책은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개혁작업을 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고, 도 이 시기가 아니면 5·16 및 10·26과 같은 불행한 사태가 초래할수도 있습니다. 벌써부터 여권 일각에서 반대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지만 6공화국의 운명을 걸고 추진해 나갈 것입니다.”

문 수석이 체제론을 운위하면서 경제개혁을 다짐했으나, 이 무렵 노 대통령의 개혁 의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9월 5일 당직 개편후 처음 열린 청와대 당직자 회의. 토지공개념제도를 놓고 박준규 대표위원, 이한동 원내총무등 당직자와 문희갑 수석 사이에 설전이 벌어졌다.

노 대통령은 이 설전을 중재하면서 양측에 공평한 점수를 줬다. “소수에 의한 불로소득은 어떤 형태로든 사회에 환수해야 합니다. 그러나 중산층에 대해 부담 주는 개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노 대통령의 이같은 발언은 개혁의지의 약화로 비쳐졌고, 이때부터 실명제 반대론자들의 물밑 작업도 활발해졌다. 이승윤 민정당 정책위 의장, 김종인 보사부장관등 이른바 ‘서강학파’들이 나섰다.

이 의장은 그해말 재무부의 윤증현 실명거래준비단장을 여의도 의원회관으로 호출해 “준비단에서 실명제 실시가 어렵다는 결론을 내려달라”고 주문했고, 김 장관은 안공혁 재무부 제2차관을 불러 “실명제를 왜 실시하려 하오. 실명제를 하면 큰일 나오”라고 걱정을 하기도 했다.

김종인 장관은 국무회의에서 율일하게 실명제 반대논리를 폈으며, 개인적인 친분관계를 활용해 노 대통령에게 몇차례에 걸쳐 실명제 유보를 건의했다.

이같은 상황에 대해 문희갑 당시 경제수석은 이렇게 설명했다.

“논란을 거듭한 끝에 토지공개념법안이 확정되자 기득권 세력들의 분위기가 급속도로 달라졌습니다. 실명제도 실시될 게 분명하다는 우려였어요. 89년과 90년초 실명제 반대세력은 청와대의 기류를 바꾸려는 작업을 수면 하에서 은밀히 진행해 나갔습니다.”

노 대통령은 문의갑 수석의 말보다 김종인 장관의 건의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90년 정초엔 금융실명제는 노 대통령의 의중에서 서서히 멀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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