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상희의 컬쳐 인사이트] 욕망과 사랑의 위험한 변주곡, 영화 ‘데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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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희의 컬쳐 인사이트] 욕망과 사랑의 위험한 변주곡, 영화 ‘데미지’ 
  • 권상희 문화평론가
  • 승인 2021.09.01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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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뉴스=권상희 문화평론가] 블랙컬러일 수밖에 없는 욕망은 빛을 피해 은둔한다. 욕망은 비밀과 가장 잘 어울리는 단어다. 비밀이 된 그것은 때로 삶의 가장 큰 에너지로 치환된다. 물론 예상 가능한 부정적인 에너지로 말이다. 삶을 송두리째 잠식시키는 파격적인 에너지는 파멸하고 만다.

그래서 영화 ‘데미지’는 펄떡이는 욕망과 사랑이 혼재 돼 있는 위험한 변주곡이다.

늪에 빠진 남자, 그를 조종하는 여자

어두운 배경, 음울한 음악, 짧은 순간 서로에게 끌리는 두 사람, ‘아버지와 아들의 여자’. 라는 위험한 설정만으로 모든 것을 눈치 챌 수 있는 영화다. 하지만 ‘데미지’는 결코 뻔하지 않게, 세련되게 자극을 터치해주는 고품격 ‘욕망 보고서’다.

젊고 아름답다. 게다가 거부할 수 없는 묘한 슬픔을 지닌 여자 안나 바튼(줄리엣 비노쉬 분). 우아한 아내와 기자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아들을 둔 가정적인 남편, 사회적으로도 성공한 정치인, 눈을 떼기 힘든 중후함이 넘쳐나는 매력적인 남자, 스티븐 플레밍(제레미 아이언스 분).

짧은 첫 만남에서 통(通)했음을 직감한 두 사람. 어려서부터 본능대로 살아온 그녀가 그에게 먼저 손짓한다. 자신의 집주소만을 알려주고 끊은 그녀의 전화는 스티븐에게 어떤 말보다 강렬한 시그널이 된다. 

유혹 그리고 시작된 일탈, 그 둘은 만나자마자 서로의 몸을 탐닉한다. 말은 거추장스러운 액세서리일 뿐이다. ‘아들의 여자’는 그렇게 모든 걸 다 갖춘 남자 스티븐에게 늪이 돼버린다. 그는 빠져버렸고 허우적거리며 그 곳에서 나오려고 노력했지만 육체에 잠식당한 이성은 모든 걸 버리고서라도 그녀가 아니면 안 된다. 욕망은 그렇게 멈출 타이밍을 찾지 못한다. 

그를 거부하지 않는 그녀는 부자지간을 오가며 위험한 외줄타기를 즐긴다. 그녀에게 ‘애인의 아버지’라는 존재는 꽤나 자극적이다. 그래서 포기할 수 없다. 아직 들키지 않았기에. 죽은 오빠를 닮은 애인은 현실의 도피처다. 그녀는 사랑을 말하지만 어디에도 사랑은 없다. 사랑의 가면을 쓴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을 뿐.

아버지, 아들을 질투하는 초라한 남자

아들과 함께 프랑스로 휴가를 떠난 그녀. 출장 중에도 그녀가 못 견디게 그리운 남자, 스티븐은 안나를 만나기 위해 브뤼셀에서 한달음에 그들이 있는 숙소로 향한다. 교회 근처에서 아들의 체온이 채 식지도 않은 그녀에게 자신의 욕망을 토해내는 그다. 거친 신음소리와 교차하며 들리는 교회 종소리는 금기를 망각한 한 인간의 끝없는 욕망이 곧 구속될 것임을 암시한다. 물론 그는 알지 못했지만. 알았다고 한들 거기서 멈췄을까.

아들과 함께 있는 그녀를 건너편 숙소에서 바라보는 스티븐은 세상에서 가장 초라한 남자다. 아들을 질투하는 아버지는 그래서 고통스럽다. 그녀를 온전히 갖고 싶다. 아들의 여자가 아닌 내 여자로. 질투는 채워지지 못한 소유욕의 다른 언어다. 

그녀에 대한 소유욕이 커질수록 처음에는 옷을 입은 채로 서둘러 했던 두 사람의 섹스가 시간이 지날수록 알몸의 섹스로 변하며 열정적으로 숨 막힐 듯한 오르가즘을 토해낸다. 세상이 부여한 많은 수식어를 잊고 알몸이 된 스티븐은 결국 마지막 수식어인 ‘아버지’마저 벗어버리는 참극을 맞는다. 

영화 '데미지' 스틸 컷
영화 '데미지' 스틸 컷

욕망과 추락... 그리고 살아내기

두 사람의 정사장면을 목격하고 충격에 추락사해버린 아들. 안나와 함께 아무도 모를 동굴에 갇혀 있던 그는 알몸으로 주검이 된 자신의 아들을 안고 오열한다. 아들의 여자는 그 또한 운명이라며 체념한 듯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난다. 그녀에게 뜨겁던 욕망이 식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또한 익숙하다는 듯이. 애인이 죽은 이상 불안한 외줄타기의 스릴도 이제 끝이다. 이 여자, 참 비정하다. 

한순간에 세상의 중심에서 추락해버린 남자. 그가 쌓아올린 견고한 성은 이제 어디에도 없다. 비밀이 없는 삶은 남루한 삶이라고 하지만 그 비밀이 삶을 남루하게 만들 수도 있음을 그는 미처 몰랐다. 

“우리가 사랑에 굴복하는 건 알 수 없는 뭔가를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 이외의 것들은 무의미하다” 홀로 남겨져 이방인이 돼 버린 그의 두 눈 가득 벽에 걸린 사진 속 안나가 들어온다. 쓸쓸한 독백을 통해 그는 여전히 사랑을 말한다. 아직도 그녀를 잊지 못하는 스티븐은 살아가기가 아닌 ‘살아내기’ 중이다. 누군가는 잔인하게 잊었을지도 모를 일을 여전히 곱씹으며.

영화는 주체하지 못한 욕망이 결국 모든 걸 삼켜버린다는 것을 알려주고야 만다. 불온한 상상 속에 봉인되어 있는 ‘금기’가 해제 될 때, 삶은 파멸한다. 

그런데도 스티븐은 후회하지 않는 걸까. 사랑 이외의 것들은 정말 의미가 없는 걸까. 뜨거운 욕망으로 시작한 영화가 던진 차가운 질문이다.

 

●권상희는 영화와 트렌드, 미디어 등 문화 전반의 흐름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글을 통해 특유의 통찰력을 발휘하며 세상과 소통하길 바라는 문화평론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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