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기의 도보기행] 배롱나무, 화무백일홍(花無百日紅)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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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기의 도보기행] 배롱나무, 화무백일홍(花無百日紅)의 세계
  • 박성기 도보여행 칼럼니스트
  • 승인 2021.08.11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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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 명재고택, 담양 명옥헌을 걷다
여름과 가을거쳐 100일동안 피는 배롱나무 꽃의 향연
목백일홍(木百日紅) 세상을 붉게 물들이다
박성기 도보여행 칼럼니스트.
박성기 도보여행 칼럼니스트.

[박성기 도보여행 칼럼니스트] 세상의 많은 꽃은 열흘을 넘기지 못한다는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에 상대(相對)해서 백일동안 붉게 피는 꽃을 백일홍(百日紅)이라 부른다. 

백일홍(百日紅)은 중국 송나라의 시인 양만리(楊萬里; 1127~1206)가 “누가 꽃이 백일동안 붉지 않고(誰道花無百日紅), 자미화가 반년 동안 꽃핀다는 것을 말하는가(紫薇長放半라年花)”라고 노래한 것에서 처음 등장한다“(역사와 문화로 읽는 나무 사전, 강판권)

배롱나무의 꽃은 여느 꽃과는 달리 여름에서 가을까지 백일동안 한여름의 뜨거움을 견디며 핀다. 어디에 나무가 있는가에 따라 심은 뜻이 다를지라도 이루고자 하는 것은 하나다.

배롱나무꽃이 백일을 넘게 피고, 수피(樹皮)의 겉과 속이 한결같아서 선비는 지조와 절개를, 스님들은 용맹정진을 이 나무에서 찾았겠다. 

논산 명재고택(明齋 故宅)의 배롱나무

한여름 뜨거운 햇살이 사정없이 내리쬔다. 땀이 송글송글 이마에 맺힌다. 답답한 마음 풀기 위해 뜨거운 여름의 꽃 백일홍을 관상하러 명재고택에 들른 길이다. 고택 입구에 윤증의 어머니인 공주이씨의 정려각(旌閭閣)에서 잠시 열부의 삶을 보고는 고택에 들어선다. 

정면에서 바라 본 논산 명재고택 전경. 사진=박성기 칼럼니스트.
정면에서 바라 본 논산 명재고택 전경. 입구 정면에 배롱나무가 보인다. 영글지 않은 꽃잎은 여름과 가을을 거쳐 100일이나 시들지 않는다. 사진=박성기 칼럼니스트.

명재고택은 노성산(魯城山)의 기운이 남쪽으로 흘러 산자락 명당에 노성향교와 나란히 터를 잡은 조선 숙종대 소론의 영수 명재(明齋) 윤증(尹拯)의 집이다. 여느 양반네처럼 솟을대문이나 담장도 없이 활짝 열린 고택이라 마음이 한결 가깝게 다가섰다. 

고택에 들어서니 넓은 바깥마당과 이웃한 네모난 연못에는 수초가 물 위에 가득하고, 인공의 작은 섬에 심은 300년 된 배롱나무에 꽃들이 가득하다. 나무를 떠난 꽃은 풀풀 날리며 연못 수초 위로 살포시 산산하게 내려앉았다. 

정방형의 명재고택 연못. 사진=박성기 칼럼니스트.
정방형의 명재고택 연못. 사진=박성기 칼럼니스트.

명재고택은 연못을 지나자 정면을 명재고택은 본채와 사랑채로 이뤄져 한옥의 기품을 제대로 드러내놓고 있다. 고택과 어우러진 배롱나무가 한옥의 운치를 더 풀어내고 있다. 

본채를 돌아 사랑채에 이르렀다. 사랑채는 왼편에 걸린 ‘이은시사(離隱時舍·속세를 떠나 은거하며 때를 기다리는 집)’란 현판이 눈에 띈다. 현실에 타협하지 않고 꼿꼿했던 그의 성품을 나타낸 듯하다.

명재고택 사랑채 왼편에 걸려있는 '이은시사' 현판. 사진=박성기 칼럼니스트.
명재고택 사랑채 왼편에 걸려있는 '이은시사' 현판. 사진=박성기 칼럼니스트.

사랑채 마당을 건너 멀리서 사랑채를 다시 바라본다. 주인을 닮은 집과 은은하게 스며드는 배롱나무의 단아함이 어우러져 태곳적부터 그 자리에 있는 듯 조화롭기만 하다. 

배롱나무의 아름다움에 빠져 사랑채 옆 배롱나무에는 줄지어 사진을 찍으려고 기다리는 모델들이 많아 오롯한 배롱나무 사진을 담으려 한참을 기다린다. 세상의 가장 멋진 자태로 꽃과 하나가 되는 사람들의 모습에 한낮의 더위는 사라지듯 물러섰다. 

배롱나무 뒤 명재고택의 백미인 장독대의 배열이 가지런하다. 장독대마다 사연을 담으려다 깨진 장독이 한두 개가 아니라는 집주인의 말에 문득 대나무에 이름을 새기는 못된 문화의식을 본다. 문화재는 내 것처럼 훼손하지 말아야 한다는 명제를 되새겨본다. 

고택의 장독대는 오른편 작은 언덕 커다란 느티나무 서 있는 자리에서 봐야 제대로다. 장독대의 모습을 담기 위해 작은 언덕으로 부지런히 올랐다. 이르게 온 터라 아직 사람이 많지 않아 느티나무 사이에서 장독대를 조망할 수 있었다. 

명재고택 장독대와 느티나무. 그리고 작은 언덕. 사진=박성기 칼럼니스트.
명재고택 장독대와 느티나무. 그리고 작은 언덕. 사진=박성기 칼럼니스트.

겨울 명재고택의 눈 쌓인 장독대의 고독한 모습을 찍은 사진을 보고 빠져들었는데, 장독과 고택의 사랑채와 배롱나무와 어우러져 풀어내는 경치에 입을 다물지 못하겠다. 이 자리가 아니면 절대 이뤄질 수 없는 광경, 어떤 말로도 이 감정을 설명하지 못하겠다. 배롱나무를 보러왔다가 만나게 되는 부채살 모양으로 펼쳐있는 장독대 풍경은 내가 명재고택에서 만난 또 다른 선물이다.

담양 명옥헌(鳴玉軒)의 배롱나무

담양 명옥헌은 번잡할 것 같아 사람들을 피해 이른 아침에 찾았다. 마을을 들어서니 담장마다 홍보의 장이다. 친절하게 명옥헌 가는 길이란 글씨가 보여 명소를 알리려는 마을 사람들의 기발함이 즐겁다. 명옥헌의 시작은 배롱나무꽃이 가득한 연못을 만나면서 시작된다. 연못을 중심으로 가운데는 작은 섬이 있고 양쪽 연못의 둑에는 섬을 옹위하듯 배롱나무가 줄줄이 이어져 둘러쌓고 있다. 

연못 한가운데 섬에는 외로이 배롱나무 한그루가 서 있다. 아직 꽃이 덜 영근 붉은 꽃이 점점(點點)이 듬성듬성하다. 연못 밖으로 둘러싼 붉게 타는 배롱나무들은 빨리 피어나라 떼를 부리는 듯한 성화에 못 이겨 며칠 뒤면 붉게 타오르겠다. 

담양 명옥헌 연못위의 작은섬과 배롱나무. 꽃잎은 아직 영글지 않았다. 사진=박성기 칼럼니스트.
담양 명옥헌 연못위의 작은섬과 배롱나무. 꽃잎은 아직 영글지 않았다. 사진=박성기 칼럼니스트.

능수버들처럼 연못을 향해 고개를 숙인 나무에서는 붉은 꽃잎이 눈처럼 연잎에도, 연못 가에도 내려앉았다. 연대에 기댄 연잎끼리 바람에 흔들리며 수런댄다. 그 사이로 소담하면서도 화려한 연꽃이 배롱나무꽃과 짝을 이뤄 하나하나 모인 풍광이 물감이라도 확 뿌린 듯 총천연색이다. 

연못을 지나 야트막한 언덕 위 명옥헌이다. 명옥헌에 올라앉아 좌우를 두리번거리다 몸을 돌려 지나왔던 연못을 바라본다. 

연못은 눈에서 사라져 보이지 않고 배롱나무꽃으로 산을 이뤘다.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모양이 영락없는 동산이고 꽃구름이다. 

담양 명옥헌 전경. 사진=박성기 칼럼니스트.
담양 명옥헌 전경. 사진=박성기 칼럼니스트.

정자 뒤로 흘러 내려오는 시내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제자 오기석(吳祺錫·1651~17012)에게 써줬다는 바위에 새긴 ‘명옥헌 계축(鳴玉軒 癸丑)’은 글씨가 마모되어 희미하게 보인다. 

바위에 새긴 우암 송시열의 글씨. 명옥헌 계측이라고 새겨져 있다. 사진=박성기 칼럼니스트.
바위에 새긴 우암 송시열의 글씨. 명옥헌 계측이라고 새겨져 있다. 사진=박성기 칼럼니스트.

뒷동산에서 작은 계곡을 따라 연못으로 ‘흘러내리는 물소리(鳴)가 옥구슬(玉)’ 같다 해서 명명된 이름이 명옥헌(鳴玉軒)이다. 계곡의 물소리가 지금에도 똑같은 걸 보면 사람의 감정은 먼저와 나중이 같은가 보다.

어머니의 배롱나무

내 고향 배롱나무는 가지가 방사형으로 사방에 뻗쳐 있어 꽃이 가지에 가득하면 마치 공작새가 날개를 편듯한 아름다움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본다. 나에게 배롱나무는 어머니의 역사이기도 하다. 

어릴 적 고향 집 뒤란은 대숲이었다. 아버님은 항상 입버릇처럼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대숲 뒤 명당에 모신다고 하셨는데, 할머니를 앞서 대숲 뒤 명당에 가시게 되었다. 어느 날 어머니는 뒤란의 대를 모두 걷어내시고 묘소 주변에 배롱나무를 가져다 심었다. 

수십 년 다정한 손길로 묘소의 배롱나무를 가꾸시니, 배롱나무에 가득한 꽃이 근동에서 제일이었다. 사람들은 어머니를 따라 묘소에 목백일홍을 심더니, 지금은 마을 어귀에 배롱나무가 가득하다. 직접 심으신 여름의 붉은 꽃을 보시기에 얼마나 좋으실까. 집 뒤 안의 백일홍을 보면서 사랑의 깊이를 깨달았다.

논산의 명재고택(明齋故宅)과 담양 명옥헌(鳴玉軒), 고향의 어머니 배롱나무로 이어진 여정을 다산 정약용의 시구로 대신한다.

마루 앞에 한 그루 백일홍이 피었는데   
쓸쓸할 사 그윽한 빛 시골집과 흡사하다.
번갈아서 피고 지며 백일을 끌어가는데  
백 가닥의 가지마다 백 개 가지 또 뻗었네.

堂前一樹紫薇花
寂寞幽光似野家
半悴半榮延百日
百條仍有百杈枒

● 박성기 도보여행자는 동국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현재 '도서출판 깊은샘' 대표이다. 일상에 쫓겨 바삐 살다가 어느 순간 길이 눈에 들어왔다. 그 길이 궁금해져서 휴일이 되면 배낭과 카메라를 메고  우리나라 곳곳을 30년째 걷고 있다. 어떤 길이 펼쳐질지 길 위에서 누구를 만날지 많은 기대와 소망을 안고 길을 나서고 있다. 저서로는 '걷는자의 기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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