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 아시아 금융위기⑭] 마하티르와 소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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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 아시아 금융위기⑭] 마하티르와 소로스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2.16 16: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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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티르, 아시아적 가치 주창…소로스 “자본통제는 재앙”

1997년 9월 20일에는 마하티르 모하마드 말레시아아 총리와 헤지펀드의 대부 조지 소로스의 정면 대결이 있었다. 이번엔 무대가 홍콩에서 열린 IBRD(세계은행)-IMF 연례총회였다.

마하티르가 선제 공격을 감행했다. 총리는 지난번처럼 소로스를 구체적으로 지목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외환거래자를 「투기꾼」, 「악당」, 「범죄자」, 「인종차별주의자」라는 격렬한 표현을 동원하며 몰아부쳤다. 그는 아예 외환 거래 자체를 부정했다.

“국제 외환거래는 불필요하고, 비생산적이며, 전적으로 비도덕이다. 외환거래를 불법화하고 중단시켜야 한다. 동남아 통화위기는 동남아의 경제발전을 바라지 않는 지극히 부유한 몇몇 사람과 언론들에 의해 조장되고 있다. 그들의 부는 다른 사람을 가난하게 함으로써 얻어진다. 그들은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아 풍요를 누리고 있다.”

총리는 자신의 주장을 실천하는 의미로 “말레이시아에서 외환거래를 무역대금 자체로 제한하겠다”고 밝혔다.

그러자 이번에는 소로스가 정면공세로 나섰다. 그는 지금까지 마하티르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굳게 침묵을 지켜왔다.

“외환거래를 중단하겠다고 한 마하티르 박사의 주장은 대단히 부적절하고, 일고의 가치도 없다. 자본 거래를 제한하는 조치는 재앙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마하티르 박사야말로 그의 나라에 위협요소다.”

소로스의 발언 강도 마하티르에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 그는 가시돋힌 말을 서슴지 않았다.

“그 동안 마하티르는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해가며 자기 실책으로 빚어진 책임을 나에게 덮어씌워 왔고, 국내 언론통제를 통해 그러한 말로 국민들을 무마시키려 했다. 그의 말은 민주화 열망을 억압하기 위한 편리한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언론 자유를 제한하고 부패를 눈감아주는 독재정권이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다.”

그는 연설이 끝나고도 성이 차지 않아 기자회견을 가졌다.

“나는 통화가치가 폭락하고, 주식시장이 붕괴해 피해를 입은 말레이시아인들에게 동정심을 느낀다. 그러나 마하티르에 대해선 조금도 그런 마음이 없다. 그에게 (경제를 망친)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마하티르는 「서구적 가치(Western Value)」에 대항해 아시아적 가치(Asian Value)를 주창해온 정치인이다. 그는 소로스가 반격하자, 서방세계의 가진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도 커지고 싶다. 그런데 우리가 크지 못하는 것은 당신네들이 우리가 큰 사고를 갖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노력했고, 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졌다. 미국이나 유럽국가들이 잘사는 것처럼 우리라고 잘살 수 없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돈만 있으면 대규모 건설공사를 할 수 있는데, 당신네들은 우리가 그 돈을 갖지 못하도록 통화를 폭락시켰다.”

마하티르는 말레이시아에 세계 최고의 빌딩, 아시아 최대의 공항, 미국 실리콘밸리를 모방한 첨단과학단지, 대형 수력발전용 댐을 짓겠다는 웅대한 꿈을 가지고 추진해왔다. 그러나 경제를 밀고 나가는 기관차는 탈선해버렸다. 링기트화는 20~30%나 폭락했고, 달러에 대한 빚이 그만큼 불어났다. 외국돈이 일시에 말레이시아를 빠져나가는 바람에 건물과 다리, 공항의 건설을 중단해야 했다. 국민 소득이 뚝 떨어져, 국민들에게 장밋빛 청사진을 제시했던 것마저 수포로 돌아갈 공산이 컸다. 그는 소로스등 외환딜러들의 장난에 잘 나가던 말레이시아가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그리고 국제대회에서 그런 생각을 공개적으로 내세우며 국제자본과 대항했다.

다음은 마하티르 총리가 미국의 비즈니스 위크(98년 5월)와 가진 인터뷰의 한 대목.

- 조지 소로스와 유태인의 음모론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는데요.

▲ 한부분은 「예스」이고, 다른 부분은 「노」라고 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소로스에 관한 한 그가 (아시아 위기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가 무언가를 할 때는 다른 무리들이 그를 따르지요. 좋은 표현이 아닐지 모르지만, 리더가 정하는 방향에 따라 이리 저리 움직이는 버팔로(들소)떼들 같다고나 할까요.

- 유태인 음모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 유태인 음모설에 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대부분의 외환거래자들이 유태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사실이 동아시아 이슬람국가에 영향을 미쳤고, 사람들은 이를 유태인의 음모라고 생각하고 있지요. 나는 유태인 음모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 유태인 (외환)거래자들이 말레이시아를 망치려고 했다고 생각합니까.

▲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돈을 원할 뿐입니다. 통화 폭락 과정에서 단기투매를 할 경우 많은 돈을 벌 수 있습니다. 모두가 돈을 원합니다. 나라도 컴퓨터 앞에 앉아서 수십억 달러를 벌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그렇게 할 것입니다.

통화 폭락의 폭풍이 스쳐지나간 동남아 국가들의 지식인들은 마하티르 총리의 주장을 심정적으로 동조했다. 태국의 타농 비다야 재무장관은 “국제 외환 투기자들이 통화폭락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도네시아의 한 신문은 외환딜러를 100 달러 짜리 지폐를 마스크로 하고 나타난 무장테러리스트로 표현하고 “루피아를 지키자, 인도네시아를 지키자”고 주장하는 만화를 실었다.

▲ 마하티르 모하마드(왼쪽) 말레시아아 총리와 헤지펀드의 대부 조지 소로스 /위키피디아

 

국제투기자본에 대한 반감이 아시아에서 번져나가자, 이번에는 월가의 백전노장 로버트 루빈(Robert Rubin) 미국 재무장관이 나섰다. 그는 지난번 올브라이트 국무장관과 같이 소로스를 직접적으로 두둔하지는 않았다. 그는 마하티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의 잘못을 지적해주었다. 루빈은 월가에서 26년간 근무했고, 월가의 내로라는 투자은행인 골드만 삭스에서 회장까지 지낸 사람이다. 그는 국제 투자자들의 입장을 잘 이해했다. 투자자들의 마음을 읽으면서 세계 최대 경제대국인 미국의 살림살이를 꾸려온 노련한 사람이다.

그의 연설은 마하티르를 겨냥한 것임에 분명했다.

“마하티르 총리의 주장대로 외환 거래를 중단하고, 자국 주식시장을 부양하는 조치를 취할 경우 국제투자자들이 말레이시아를 이탈하게 된다. 국제적 투자자들이 말레이시아에서 빠져나올 자세(숏 포지션)를 취하면, 말레이시아 금융시장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마하티르는 그의 정책을 180도 수정하게 될 것이다.”

루빈은 시장, 정확히 말하면 국제금융시장의 논리를 믿었다. 그는 시장이 때때로 극단적으로 흐르기도 하지만, 장기적으로 시장논리를 수용한 나라에는 보답하고 그렇지 못한 나라는 처벌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국제자본시장의 논리를 잘 이해하고 따르는 것이 거대경제를 운용하고 있는 미국 행정부로서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루빈의 말은 맞았다. 마하티르 총리는 동남아의 다른 어떤 지도자보다 강하게 국제자본시장을 격렬히 비난했지만, 나중에는 국제자본의 논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제임스 울펜손(James Wolfensohn) 세계은행 총재도 중재에 나섰다. 총재는 마하티르를 만난 자리에서 󰡔당신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소. 그러나 자본 거래를 중단시킬 경우, 기술 이전이 중단될 위험이 있소󰡕라며 은근히 겁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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