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 아시아 금융위기⑬] 서양의 음모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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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 아시아 금융위기⑬] 서양의 음모론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2.15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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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를 꺾으려는 서구의 악랄한 음모가 개입됐다는 주장이 기승

1997년 7월 28일 아침, 말레이시아 수도 쿠알라룸푸르의 한 호텔. 매들린 올브라이트(Madeleine K. Albright) 미국 국무장관이 잠에서 깨어나 조간신문을 집어 들었다. 말레이시아 유력신문인 「뉴 스트레이츠 타임스(The New Straits Times)」였다. 그 신문은 그날 1면 톱기사로 「유엔 헌장의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제하에 “마하티르 모하마드(Mahatir Mohamad) 총리가 1948년 제정된 국제인권선언을 수정할 것을 희망한다”고 썼다.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총리는 강대국이 가난한 나라의 실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인권선언을 제정했다면서 서방세계는 개발도상국들이 그들의 높은 가치를 받아들일 것을 강요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신문은 또 마하티르 총리의 말을 인용, 헌장이 모든 나라, 모든 국민들의 공동목표를 수용하지 못하고 단정했다.

키는 작지만, 당차기로 유명한 이 여걸은 이날 있을 ASEAN(동남아 제국 연합) 총회에서 무언가 말을 해야겠다고 작정했다. 마하티르 총리는 회의가 열리기 며칠 전부터 미국의 헤지펀드 대부인 조지 소로스를 동남아 외환 위기의 주범으로 지목해서 격렬하게 비난했질 않는가. 민주주의 후원자요, 자선사업가로 존경받는 사람을 이렇게 심하게 공격할 수는 없다고 올브라이트 장관은 생각했다.

마하티르 총리의 공격은 직설적이었고, 당시 동남아 각국의 정서를 그대로 대변했다.

“조지 소로스는 동남아 외환 위기의 배후조정자다. 그는 힘있는 달러화나 파운드화는 건드리지 않고, 가난한 나라의 약한 통화에 시비를 거는 비열한 짓을 했다. 소로스는 정치적 동기를 가진 이중 인격자이며, 동남아가 수십 년간 이룩한 결실을 단 2주일만에 거둬갔다.”

마하티르는 소로스가 동남아 통화를 교란한 이유가 미얀마(옛 버마)를 아세안에 가입시킨데 대한 보복이며, 유태인들이 회교국가인 말레이시아를 전복하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며 ‘유태인 음모설’을 제기했다.

소로스는 헝가리 출신 유태인으로, 그 동안 사회주의 국가인 미얀마의 아세안 가입을 반대했다. 미국 정부도 비공식적이지만, 소로스와 같은 입장으로 미얀마의 아세안 가입을 경계했다.

마하티르의 독설은 근거가 없었다. 그렇지만 환란을 겪고 있는 동남아 국가들에게는 그럴듯하게 들렸다. 실제 외환투기자들이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의 통화를 공격하지 않았던가. 그들은 멀쩡한 나라가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고, 누군가 보이지 않는 세력에 의해 농락당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이런 차에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아시아」라는 책을 쓰기도 한 마하티르 박사가 총대를 맨 것이다.

미국이 즉각 반격했다. 니콜라스 번스(Nicolas Burns) 미 국무부 대변인은 “조지 소로스는 그런 일을 할 인물은 아니며, 어떤 음모도 없다”고 말했다.

아세안 총회가 열렸다. 마히티르 총리를 대신해 말레이시아의 압둘라 아마드 바다위(Abdullah Ahmad Badawi) 외무장관이 개막연설을 했다. 그는 올브라이트 면전에서 「야비한 행동」이니, 「국제적 범죄」이니 하는 썰렁한 단어를 써가며 소로스와 외환 투기꾼들을 공격했다.

“아세안 국가들은 외환투기자들의 야비한 「사보타지」에 의해 외환위기를 겪고 있다. 아세안 국가들은 이들에 대한 반격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그러자 미국에서 대표로 나간 스튜어트 아이젠스탯(Stuart Eizenstat) 국무부 경제담당 차관이 올브라이트의 허락을 얻고 발언대로 올라갔다. 그는 말레이시아 수뇌부의 음모론을 맹공격했다.

“통화 하락은 국가가 경제를 잘못 판단해서 생긴 일이다. 투기자들은 이에 편승했을 뿐, 이를 유발한 것은 아니다.”

그는 이어나갔다.

“아까 개막연설에서 말한 「사보타지」란 말은 잘못됐다. 그렇게 투기자들을 비난하지만 증거가 없지 않는가. 아세안 국가의 경제를 망쳐놓고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양국 외무 당국자들간에 설전이 벌어지고 있는 사이에 마하티르는 좀더 포괄적인 내용으로 서방국가를 비난했다. 그는 심지어 “과거엔 양극체제 때문에 아시아국가들이 고통을 겪었는데, 지금 단일 체제가 됐지만, 별 나은 것이 없다”며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를 은근히 비아냥 거렸다.

올브라이트는 화를 꾹꾹 눌러 참았다. 남의 말에 참견하기를 좋아하고, 면전에서 직설적인 말을 삼가지 않는 그녀가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기회는 그날 저녁에 있었다. 각국 외교관들이 만찬을 가지면서 장기자랑을 하는 장소였다. 올브라이트는 영화 「에비타」의 여주인공 복장을 하고 노래를 불렀다. (그해 미국에서는 마돈나 주연의 영화 「에비타」가 흥행에 성공하고 있었다) 곡명은 「에비타」의 주제곡 「아르헨티나여, 나를 위해 울지마오」라는 곡을 개작한 「아세아인들이여, 나를 위해 울지마오(Don't Cry for Me, Aseanies)」였다.

“아세아인들이여, 나를 위해 울지마오/정말로 나는 당신을 사랑하오/…/나는 당신네 지도자들과 이야기하러 여기에 왔소/그런데 그들은 모두 골프장에 가버렸소/그래서 나는 홀로 돌아와 조지 소로스를 불렀소/그와 함께 시장의 힘과 음모론을 이야기 나눴소/그것은 역사였소”

외교관답게 부드럽고 완곡하게 표현했지만, 올브라이트는 시장의 힘에 아시아 경제가 망한 것이지, 소로스의 음모에 의한 것이 아님을 노래로 응답했다.

▲ 1997년 아시아 위기때의 마하티르 모하마드 총리와 안와르 이브라힘 부총리 /위키피디아

 

아시아 외환 위기는 여러 가지 형태의 음모론을 낳았다. 모두가 외형적으로 정교한 듯 했지만, 논리적 설득력이 부족했다.

마하티르 총리의 「유태교의 예정설」이 대표적인 예다. 그는 세계 금융시장을 쥐고 있는 유태인들이 성공한 이슬람 국가인 말레이시아를 전복하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고 내세웠다. 그가 말하는 이슬람교는 말레이시아를 비롯, 인도네시아가 포함된다. 그렇지만, 유태인 예정설은 불교국인 태국과 기독교국가인 필리핀 통화폭락을 설명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마하티르는 1년후 유태인 음모설을 부정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IMF가 구제금융을 지원하면서 이것저것 거시정책에 간섭을 하자, 집권층에서 음모론이 나왔다. 수하르토 대통령의 아들 밤방(Bambang Suharto)은 인도네시아의 경제적 고통은 자신을 겨냥한 국제적 음모라고 공공연히 말했다. 그는 IMF 구제금융이 아버지를 와해하기 위해 자신의 가족을 명예훼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IMF 요원들이 구제금융 지원패키지를 제시하면서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은행을 파산시킨 것을 그 예로 들었다.

태국 정치인들은 미국 자본이 자국 시장을 개방시키기 위해 경제를 교란시켰다고 비난했다.

중국 상하이에서는 아시아 위기 뒤에 “영국이 뒤에 있다”는 루머가 떠돌아 다녔다. 영국이 홍콩을 중국에 넘기고 나서 과거 식민지를 파괴하고 싶어한다는 것이었다.

중국의 칼럼니스트 장 이핀은 인민해방일보 1면에 실린 낸 기고문에서 “장막 뒤에 보이지 않은 검은 손이 있다󰡕면서 "그 손은 서방세계에 의해 움직인다”고 주장했다. 그는 “금융중심지인 홍콩을 와해시키려는 음모”라면서 “서방의 검은손은 홍콩을 무너뜨리기 위해 주변국을 하나하나 붕괴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론은 많은 중국사람들에게 먹혀들었다. 이제 막 서구식 자본시장을 도입한 중국인들은 “서방세계 특히 미국의 우파세력들이 홍콩 경제를 교란하고, 궁극적으로 공산세계를 와해하려한다”고 믿었다.

음모론은 경제 혼란이 아시아 전역을 휩쓸면서 더욱 기승을 부렸다. 아시아 경제를 거꾸러뜨리려는 악랄한 음모가 있었기 때문에 주가가 무릅을 꿇고 통화가치가 내려앉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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