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 아시아 금융위기⑫] 인도네시아 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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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 아시아 금융위기⑫] 인도네시아 공격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2.14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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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교들, 돈 보따리 홍콩등 해외로 이전하면서 루피아 급락

1997년 7월 21일 메뚜기떼들은 인도네시아 루피아로 몰려들어 일단 공격을 감행했다. 공격해서 무너지지 않으면 다른 나라로 가면 그만이다. 그런데 루피아는 환투기자가 아닌 다른 투자자들에 의해 무너졌다. 그것은 국내 투자자였다. 단단할 줄 알았던 루피아는 쉽게 넘어졌다. 이날 루피아는 최고 7%나 떨어졌다가 네가라 은행이 개입해 간신히 수습되는 듯 했지만, 하루동안 달러당 2,510에서 2,645로 5.7%나 폭락했다. 지난해 한해동안 하락폭보다 큰 폭이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이웃 나라에서 볼 수 없었던 현상이 나타났다. 국제 환투기꾼이 공격할 것이라는 루머에 국내 기업인, 은행들이 달러를 빼돌리며 루피아 폭락을 가중시켰던 것이다. 수하르토 정부가 자국 은행과 기업을 제대로 단속했더라면 투기꾼들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었는데, 국내 자본은 보다 안정된 달러로 이탈하기 시작했다.

인도네시아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국내 자본의 상당수를 화교들이 쥐고 있었고, 수하르토 일가의 토착자본도 화교자본을 따라갔던 것이다. 화교들은 수하르토 정권 밑에서 배척의 대상이었는데, 그들은 루피아가 하락할 것에 대비, 돈 꾸러미를 싱가포르나 홍콩으로 옮겨놓을 준비를 했다.

그래도 이때가지 인도네시아는 태국이나 필리핀보다 건강함을 보였다. 화교자본의 이탈도 큰 문제는 아니었다. 중앙은행이 환율밴드를 더 풀고, 루피아 추가하락을 방어할 능력이 있었다. 인도네시아 중앙은행은 5월말 현재 210억 달러의 외환을 보유하고 있었고, 5억 달러만 풀면 루피아를 방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인도네시아도 태국과 같이 자국 통화가 추가로 하락할 가능성을 제기했다. 국제투기자들이 목숨을 걸고 덤벼들 때 외환보유고는 방제효과가 없기 때문이다. 방콕 정부도 외환보유고가 300억 달러나 남아있는데 고정환율을 풀어버렸지 않던가.

▲ 인도네시아 루피아화 /자료사진

 

투기꾼들은 서서히 도시국가 싱가포르와 홍콩을 넘보았다.

홍콩은 어떻게 될 것인가. 중국 정부가 홍콩 땅을 넘겨받은지 한 달도 못되는 시점이었다. 홍콩 통화당국은 투기자의 공격을 선제 방어했다. 오버나이트 금리(단기금리)를 종전보다 1.25% 포인트 높은 6.25%로 인상했다. 주식과 채권등 자본시장에 들어와 있는 외국 자본에게 큰 이익을 남겨줌으로써 이탈을 막자는 것이다. 싱가포르 달러는 약간의 하락은 있었지만, 곧 안정됐다.

홍콩은 통화를 안정시킬 두 가지 큰 무기가 있다. 그 하나는 나중에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대통령이 만병통치약이라고 믿었던 통화위원회제도(currency board)이고, 다른 하나는 넉넉한 외환보유였다. 통화위원회 제도는 자국 통화가 약세로 돌아설 때 금리 인상을 연동시켜 통화를 안정시키는 방식이다. 아르헨티나가 90년대에 이 제도를 도입, 환율을 방어했다. 홍콩은 또 중앙은행 창고에 636억 달러나 되는 엄청난 외환을 보유하고 있어 투기자들이 공격해도 충분히 방어할 역량을 가지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였다. 홍콩 통화당국은 󰡔홍콩에는 투기자들이 없고, 환율은 안정적이다󰡕고 장담했다.

싱가포르도 1인당 외환보유액이 홍콩을 넘어선다. 싱가포르는 일부 투기자들의 공격에 맞서 1개월 단기금리를 2.437% 포인트 올려 6%대를 유지했다. 그렇지만 싱가포르 달러는 투기자들의 공격에 못 이겨 7월 18일 하루만에 2.3%나 떨어졌다.

 

아시아에서 빠져나간 달러는 중남미와 유럽 증시로 흘러 들어갔다. 국제금융시장의 펀드매니져들은 수익이 나지 않는 곳에는 투자를 하지 않는다. 핫머니들은 순식간에 돈을 빼내 이익이 나는 곳을 찾아 나선다. 자신들이 투자한 돈이 조금이라도 손해를 볼 우려가 있거나, 보다 수익이 많은 곳을 발견할 땐 언제라도 돈을 빼낸다. 아시아 국가들은 두 가지 모두에 걸려들었다. 경기가 하강했고, 투기자와 핫머니 펀드매니저들은 수익이 나는 곳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국제시장의 펀드매니저들에겐 아시아가 이젠 매력이 없는 나라로 전락했고, 중남미가 꿀이 흐르는 샘으로 여겼다. 그들은 94년 멕시코와 아르헨티나, 브라질에서 대거 빠져나와 동남아로 몰려들었지 않는가. 그들이 몰려 다니는 곳엔 주가가 오르고 빌딩이 올라가지만, 그들이 빠져나간 곳에는 폐허와 가난이 기다리고 있다.

헤지펀드들은 그해 동남아를 휩쓸기 앞서 폴란드의 즐로티, 그리스의 드라치마, 체코의 코루나, 슬로바키아 코루나등 중유럽 통화를 공격, 이미 한몫을 잡았다.

 

여기서 환투기꾼들이 체코를 공략하는 과정을 살펴보자.

체코 정부는 1997년 4월 자국통화를 방어하는데 2주일여 동안 약 30억 달러를 까먹었다. 체코 중앙은행(CNA)은 4월 26일 하루에만 코루나의 급격한 환율 하락을 막기 위해 프라하와 런던 외환시장에서 10억 달러를 쓸어 넣었다. 30억 달러는 4월말 기준 체코 외환보유고 117억 달러의 4분의 1 수준. 과다한 보유외환 사용에 역부족을 느낀 체코정부는 다음날 두손을 들고 말았다. 󰡔시장 환율에 코루나를 맡기지 않겠다󰡕고 포기선언을 한 것. 바츨라프 클라우스 총리는 이날 재무장관등 일부 각료까지 경질했다.

국제 환투기꾼들의 코루나 공략은 체코의 나빠진 경제사정과 관련 있다. 그 해초 4개월간 무역적자폭이 536억 코루나(17억9,000만 달러)를 기록했다. 환투기꾼들은 체코 경제가 급속한 수입초과를 보이자 조만간 코루나가 평가절하될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때문에 환율이 떨어지기 전에 팔아치우고 떨어진 뒤에 사들여 시세차익을 노렸다.

체코의 외환위기는 주변국으로 확산됐다. 체코 위기가 확산되면서 외국 자본이 중유럽에서 빠져나갔다. 1995년 멕시코 외환 위기때 외국자본이 인접 중남미 국가들에서도 철수했던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중유럽의 경제여건은 동남아시아와 비슷했다. 유럽의 기준화폐가 되고 있는 독일 마르크화는 95년초 이후 미국 달러화에 대해 37% 하락했다. 독일 경제의 영향력 하에 있지만, 달러에 환율을 고정시키려고 했던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 그리스 등이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헤지펀드들에게 좋은 약탈 조건이 형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 엔화는 같은 시기에 달러에 대해 46% 하락, 마르크화보다 하락폭이 컸다. 아시아 국가들은 엔화보다 더 큰 폭으로 통화를 절하해야 일본 상품과 가격경쟁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달러에 환율을 고정시키려고 애를 썼다. 그것을 헤지펀드들이 모를 리 없었다.

 

7월 25일 아시아 11개국의 중앙은행 총재들은 헤지펀드의 공격에 대한 공동대비책을 마련하기 위해 중국 상하이에 모였다. 그들이 합의한 내용은 고작 자국 통화가치 유지에 관한 공동연구를 하자는 것. 공동으로 헤지펀드의 공격을 방어하자는 합의를 도출하는데 실패했다. 각국 중앙은행들이 보유하고 있는 외환이 급속히 고갈되고 있었고, 그 동안 수억 달러에서 수십억 달러까지 통화 방어에 부었던 중앙은행들은 이제 자기 살길을 찾아야 했다. 동남아시아의 통화 한두개쯤 무너지는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로 되었다.

아시아 중앙은행들의 모임으로 공격의 강도를 다소 늦추었던 헤지펀드들은 다시 먹이감을 찾아 공세에 나섰다. 그들은 동남아시아에서 서서히 북상, 홍콩 달러와 한국 원화를 넘보았다. 월스트리트 저널에 따르면 한국 원화는 이미 7월말에 헤지펀드의 공격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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