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과의 전쟁⑥…신도시의 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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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과의 전쟁⑥…신도시의 태동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2.08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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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공화국 비화> 정보 샐까 사표 써놓고 입지 물색

“홍 비서관, 전국의 집값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서울 강남지역과 같은 신개발지를 건설하는 방법밖에 없는 것 같소.”

“그렇습니다. 주택문제는 근본적인 처방을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집 공급을 대량으로 해야 합니다. 상계동처럼 교통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주택단지를 만들면 안되고, 서울의 강남 부자들이 살수 있는 새로운 도시를 건설해야 합니다.”

1989년 3월말 청와대 경제비서실에서는 신도시 건설방안이 조심스럽게 논의됐다. 문희갑 경제수석과 홍철 비서관(건설담당) 사이에 오간 이 말은 곧 실행에 옮겨졌고, 오늘날의 분당·일산이라는 거대한 아파트 도시가 들어서는 배경이 여기서 출발한다.

당시 문 수석은 자고 나면 뛰는 서울의 집값을 해결하기 위해 청와대가 직접 나서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3월 8일 경제비서실 내에 ‘주택건설기획단’을 설립했다. 기획단은 문 수석과 홍 비서관을 단장·부단장으로 하고 건설부·서울시·토지개발공사·주택공사·주택개발연구원에서 실무진을 지원받아 구성했다.

문 수석은 기획단을 가동, 서울지역 아파트가격 안정을 위한 신도시 개발 구상을 구체화해 나갔다. 이 기획단의 결론은 신도시를 건설하되, 서울 강남의 부유층을 흡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철통 같은 보안을 유지한다는 원칙 하에 입지 물색에 들어갔다. ‘어디 어디를 개발한다’는 소문이 나면 곧바로 그 지역의 집값·땅값이 천정부지로 뛰는 시절이었으니 모두 사표를 써 놓고 일을 추진했다.

신도시 후보지로 처음 거론됐던 곳은 당시 토지개발공사와 주택공사가 택지개발 예정지구로 검토하고 있던 안양 평촌지구, 군포 산본지구, 남단 녹지(분당지구), 고양 원당, 송탄지구, 의정부 주내동 지구등 6곳이었다.

청와대 경제비서실은 노태우 대통령이 선거공약으로 내세운 주택 200만호 건설정책이 신도시 건설을 포함시켰고, 지도를 펴놓고 후보지마다의 장단점을 검토해 나갔다. 분당과 일산을 최종 낙점하기까지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문 수석은 강한 집념으로 신도시 건설을 밀어붙였다.

홍철 당시 비서관의 설명이다.

“서울의 집값을 안정시켜야 전국의 집값이 안정되는데, 서울에는 남은 땅이 없었어요. 80년대 초에 개포·고덕지구, 84년에 목동지구, 86년에 상계지구를 건설하고 나니 서울에는 그린벨트를 풀지 않고는 택지를 구할수 없는 여건이었습니다. 그린벨트를 풀자니 워낙 반대여론이 거셀 것이고, 그래서 서울 외곽에 신도시를 건설하기로 의견이 모아졌지요.”

노태우 정부가 수도권 과밀을 초래하면서도 신도시 건설을 밀어붙일 정도로 6공화국 초기의 집값은 뛰어도 엄청나게 뛰었다.

1986년만 해도 전국적으로 3만채의 미분양 아파트가 발생했고, 정부가 1가구 2주택의 양도소득세 면세기간을 연장하는등 주택경기 부양조치를 취할 만큼 정책 당국자들은 호시절이었다. 그런데 3저 호황과 12%대의 고성장을 겪으면서 유동자금은 부동산으로 몰렸고, 1987년 여름이 지나면서 상황은 완전히 뒤집어 졌다.

 

“서울엔 남은 땅이 없다” 밖으로 눈돌려

 

서울올림픽을 치른후 집값은 급격한 커브를 그리며 상승했고, 1989년 구정연휴가 끝나면서 서울 송파·서초·강남구의 중대형아파트는 하늘 높은줄 모르고 치솟았다. 그러나 가진 자들의 신바람 이면에는 오르는 전세금을 못 내 자살하는 집 없는 자의 슬픈 사연이 그늘을 드리웠다. 때는 민주화 바람이 거세게 불어 닥치는 시절이라, 무주택 근로자들의 허탈감은 임금인상 요구로 분출했다.

정권이 출범한지 불과 1년, 노 대통령은 아파트 투기릐 심각성을 깨달았다. 1989년 1월초 노 대통령은 문 수석을 불러 “아파트 값을 수습하라”며 공약으로 내걸었던 주택 200만호 정책의 구체안을 빠른 시일 내에 제시할 것을 지시했다.

문 수석이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홍 비서관과 짜낸 구상은 영구임대주택 공급방안이다. 한국개발원(KDI) 출신의 경제학 박사로 1980년대초 전두환 대통령 시절부터 청와대에 근무해온 홍 비서관은 서민주택의 실상을 잘 알고 있는 주공의 방종원 기획본부장을 비롯, 국토개발연구원의 전문가들을 두루 접촉, 의견을 구했다.

홍 비서관은 구정 연휴도 집에서 보내지 못하고 텅 빈 서울 시태의 한 안마시술소로 건설부의 이동성 주택과장, 한현규 사무관을 불러 냈다. 임대주택의 보증금은 얼마로 해야 적정한지, 임대기간은 몇 년으로 하며 입주대상은 어떻게 정해야 하는 등등의 문제를 논의했다.

구정 연휴가 끝나자마자 홍 비서관은 문 수석에게 지시사항에 대한 방안을 보고했으나, 문 수석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10차례나 퇴짜를 놓았다. 퇴근 직전에 퇴짜를 놓은 대책안을 밤새 수정해 올려 놓으면 또 퇴짜를 놓고…. 그러기를 열흘이나 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방안이 임개기간을 영구히 하고 6대도시 생활보호대상자 23만 가구보다 많은 25만 가구의 임대주택을 짓겠다는 내용의 영구임대주택 방안이다. 3조5,000억원의 건설비는 정부 재정에서 투자하고 건설은 주공과 6대 도시의 지방 정부에 맡겼다.

이 임대주택 추진과는 별도로 서민들의 내집 마련을 위해 국민주택기금에서 6조원을 동원, 분양주택 25만호와 임대주택 35만호 등 모두 60만호를 건설하는 방안을 동시에 마련했다.

노 대통령은 문 수석으로부터 보고받은 이 방안을 취임 1주년 전날인 1989년 2월 24일 민정당이 주최한 ‘보통사람들의 밤’ 행사에 발표했다.

“손바닥만한 판잣집에 서너 세대가 부벼대고 사는 우리 이웃이 늘어나고 열심히 일하는 보통사람들에게 내집 마련의 꿈은 아득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을 방치해 놓고 보통사람들의 위대한 시대는 열릴수 없습니다. 생활보호 대상자들과 의료부조자들이 방 한두 개와 부엌, 화장실이 딸린 안락한 주택에 100만~200만원의 보증금과 3만~4만원의 월세만 내면 영원히 살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정부가 막대한 돈을 들여 서민주택을 짓겠다고 유례없는 정책을 발표했지만 영구임대주택 공급방안은 아파트투기를 잠재우기는 역부족이었다.

영구임대주택 방안 발표 열흘 뒤인 3월 8일 문 수석은 청와대에 주택건설기획단을 설치, 부동산투기 척결과 주택건설을 직접 챙기고 나섰다. 기획단 실무진들은 낮에는 건설부·토지개발공사·주택공사등 각자의 사무실에서 일하고 밤에는 남산 외인아파트에 마련된 사무실에 모여 작업에 들어갔다. 기획단 멤버들은 전국의 아파트투기에 대한 실태 조사에서 주택공급방안에 이르기까지 다각도로 대안을 세워보았으나 이내 고민이 빠졌다. 서울에는 대규모 주택단지를 건설할 택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서울에는 주거지역 80만평과 녹지지역 200만평 등 410만평의 땅밖에 남아있지 않았고, 그나마 약속한 영구임대주택과 서민주택 부지를 떼어내면 민간아파트는 7만호밖에 지을수 없었다. 더욱이 집을 지을만한 땅은 강북지역에 편중돼 있었다.

그래서 박승 수석 시절에 검토한 바 있는 신도시 건설 구상을 다시 들춰 내게 됐다.

6공화국 초대 경제수석을 지낸 박승씨는 1988년 5월 도태우 대통령에게 신도시 건설방안을 만들어 보고했다.

“주택 200만호 건설 공약을 달성하기 위해 수도권에 신도시를 건설해야 합니다. 서울에서 전철로 30~40분 거리에 건설하면 적당합니다.”

박 수석은 노 대통령의 재가를 얻은 후 최동섭 건설부장관에게 신도시 입지를 물색해달라고 요청했다. 최 장관이 토지개발공사와 주택공사에 입지 물색을 주문했고, 그 결과, 분당·평촌·산본·중동·송탄등 5곳을 대상지로 신청했다.

박 수석은 홍 비서관과 이들 입지를 분석한 결과 송탄은 너무 멀고 중동은 경인지역 교통난 해소에 대한 근원적 해결책이 없는 한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분당·평촌·산본등 3곳을 대규모택지개발 예정지구로 정했다.

그런데 최동섭 건설장관이 박 수석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했다. 최 장관은 “분당은 자연녹지로 돼 있으나 박정희 대통령 때 그린벨트에 준하도록 제한했기 때문에 이 지역에 신도시를 건설하면 사실상 그린벨트를 해제하는 효과를 초래한다”며 반대했다.

박 수석은 최 장관의 의견을 존중, 분당을 신도시 후보지에서 제외했으며 평촌·산본 신도시 건설을 88년 8월 착공했다.

박승 당시 경제수석의 말이다.

“88년 경제수석을 할 때만 해도 주택문제가 그다지 심각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경제수석으로서 주무장관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한다는 입장이었어요. 그래서 최 장관의 의견대로 분당을 최후의 예비지역으로 남겨 두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일산은 거론되지 않았다. 박 수석을 이어 문 수석이 부임할 무렵 극에 달한 아파트투기 과열현상은 분당을 더 이상 자연녹지로 남아있게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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