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과의 전쟁⑤…공개념 법안 국회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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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과의 전쟁⑤…공개념 법안 국회통과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2.07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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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공화국 비화> 여소야대 정국이 입법화 길 열어

1989년 9월 6일 문희갑 경제수석은 경제기획원의 한이헌 기획국장, 재무부의 이근영 세제국장, 건서부의 이규황 토지국장을 청와대 경제비서실로 불렀다. 문 수석은 공개념에 대한 노태우 대통령의 의지를 전달했다. 문 수석은 전날 청와대 당직자회의에서 민정당측이 정부의 토지공개념 법안에 집중 성토했음에도 불구, 대통령이 자신의 편임을 확신했다. 그러나 당의 주장을 완전히 무시할수 없었다. 법안을 입법화하려면 여당을 설득해야 했고, 당이 물러설 명분과 퇴로를 만들어 줄 필요가 있었다.

기획원·재무·건설부의 실무국장들은 곧바로 수정작업에 들어갔다. 택지상한제 가운데 한도초과 소유토지에 대한 강제처분 규정을 삭제하고, 대신에 부담금을 징수토록 했다. 그리고 200평 이상 택지에 대해서도 신규매매를 허용했다. 개발이익 환수비율을 당초의 70%에서 50%로 낮췄다. 토지초과이득세 부과대상보다 1.5배 이상 뛰더라도 국세청장이 투기지역으로 지정해야만 세금을 물릴수 있도록 제한했다.

문 수석이 공개념법안 수정을 지시할 즈음, 야당과 재야에서 들고 일어나 정부안에 반대하는 민정당을 ‘반개혁세력’으로 몰았다. 김영삼 총재의 민주당은 즉각 성명을 발표, 정부안을 찬성하면서 총괄적인 토지기본법의 제정을 요구했다. 평민당의 김대중 총재는 ‘그것 보라’는 식으로 민정당을 비아냥거리면서 한술 더 떠 “공개념법을 정부안보다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야경제단체인 경실련은 “정치권이 토지공개념 실시를 막으려 할 경우 범국민적 연대투쟁도 불사하겠다”고 나왔다.

여소야대의 정국이었다. 정부안에 여당이 반대하고 야당이 지지하는 이상현상은 헌정사에 없던 일이었다. 상황이 이쯤 되자 민정당은 민심 이탈을 우려하지 않을수 없었다. 당의 토지공개념제도 심사소위 간사직을 맡고 있던 서상목 경제조정실 부실장은 당 상층부로부터 “공개념에 관한한 정부안에 더 이상 이의를 달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고, 9월 7일 박준규 당대표는 “정부의 토지공개념을 받아들이겠다”고 발표했다. 청와대 당직자회의에서 논란을 벌인지 이틀만에 당이 정부에 두 손을 바짝 든 것이다.

문희갑 당시 경제수석은 그때의 고충을 이렇게 회고했다.

“공개념법안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민정당·재벌 등 파워엘리트들이 반발, 실무자들이 엄청난 압력과 모함을 받았습니다. 어떤 모임에 참석해 경제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했더니, 한 참석자가 ‘미친 사람’ 운운했다더군요. 다소 원안보다 수정되긴 했으나 공개념법안이 통과된 것은 여소야대 정국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공개념법안에 대한 반발과 우려는 민정당에서만 제기된 것은 아니다. 9월 2일과 7일 두차례에 걸쳐 열린 국무회의에서 비경제부처 장관들이 공개념법안의 부작용을 문제 제기했다.

당시 국무위원들의 발언을 들춰보자.

“급격한 토지제도 변화에 따른 행정수요 증가와 행정력 부담이 걱정된다. 행정적 뒷받침이 마련되는 것을 보아가며 단계적으로 실시하는 것이 어떠한가.” (김태호 내무)

“대다수 피해자가 여권 지지자들인데 표가 나오겠는가.” (김강래 총무처)

“법안명칭이 자본주의와 배치되는 인상을 줄수 있다.” (정원식 문교)

“사유재산권에 침해가 가지 않고 시장경제를 위축시키지 않아야 한다. (김종인 보사)

“200평 이상의 택지소유를 금지할 때 현실적으로 분할 매각이 불가능한 기존 소유자들에 대한 처리방안이 있는가.” (최병렬 문공)

비국무위원인 고건 서울시장은 “공개념법이 시행되면 지방자치단체가 걷고 있는 각종 부담금이 조세에 흡수돼 지방행정이 취약해진다”며 공개념세금을 지방세로 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국무위원들의 톤은 민정당 당직자들보다 약했다.

노 대통령이 공개념에 대한 강한 의지를 천명한 만큼 근본적인 반대보다는 부작용을 우려하는 수준에 그쳤다. 그리고 기획원·재무·건설부에서 준비한 법안을 그대로 통과시켰다.

9월 11일 당정회의에서는 정부측이 마련한 공개념 수정안이 잠정 합의됐고, 22일 정부여당 최종안으로 확정되기에 이른다. 민정당 반대도 잠시였고, 조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과 문희갑 경제수석은 속전속결 식으로 당의 방어선을 무너뜨렸다.

공개념 반대세력의 또다른 집결지는 전경련을 정점으로 하는 재계였다. 9월 12일 낮 서울 플라자호텔. 조순 부총리는 내무·재무·상공·농림수산노동장관과 문 수석등 공개념 추진위원 전원을 대동하고 재계와의 간담회를 열었다.

유창순 전경련 회장, 김상하 상의 회장, 한승민 기협 회장, 신병현 은행연합회장, 노진식 무협 부회장, 이동찬 경총 회장등 6명이 재계 대표로 참석했다. 정부측 공개념 입법안에 대한 설명이 끝나자 재계측 한 인사가 “토지의 소유와 매입을 꽉 묶어 버리면 돈 있는 사람은 무슨 재미로 돈을 버느냐”고 물었다.

이에 조 부총리가 발끈하면서 “가진 사람은 앞으로 돈 벌어 땅 살 생각을 하지 말고 그 대신에 에어로빅등 고상한 취미를 생각해야 할 것”이라며 “미국의 대부호 록펠러 일가도 아파트에 사는데 땅 좁은 우리나라에서 200평은 과분하다”고 따끔한 충고로 응수했다.

비록 이날 설전은 일과성으로 끝났지만 땅을 가진 자와 이를 규제하려는 정부측과의 갈등은 이후 점점 깊어만 갔다.

▲ 야당이 토지공개념 법안을 지지한다는 기사를 1면 톱으로 올린 동아일보 1989년 9월 6일자 지면.

 

노태우, 30대 그룹총수 불러 당부…재계 아랑곳 없어

9월 27일 전경련은 이사회를 열고 토지공개념 법률안에 대한 의견을 채택해 정부와 국회를 대상으로 본격적인 로비활동에 들어갔다. 전경련의 주장인즉 공개념법률은 토지공급을 제한해 오히려 땅값을 부추길 우려가 있고 따라서 기업활동을 위축시키지 않는 법위 내에서 입법돼야 하며, 토지토과이득세는 유보해야 한다는 것.

전경련이 입법저지를 위한 로비활동을 전개할 기색을 보아지 경실련이 맞불 작전에 들어갔다. 경실련은 즉각 “소수의 재벌이 투기척결을 원하는 국민의 뜻을 저버리고 불로소득을 계속 유지하려 한다”며 전경련의 로비활동에 대한 역로비 활동의 전개를 선언했다.

전경련과 경실련이 장외에서 논쟁을 벌이고 있는 동안에 공개념 3법은 국회로 이송됐다.

공개념 법률안은 10월 20일 국회 심의에 부쳐지기 시작했고 여당보다 야당인 민주·평민당이 더 적극적이었다. 건설·재무·법사위와 본회의를 거치는 동안 공개념법률은 약간의 문구 수정만 거쳤을뿐 정부안이 그대로 통과됐다.

택지소유상한법·개발이익환수법·토지초과이득세법은 12월 18일 여야 합의로 국회를 통과, 90년 1월 1일 그 효력을 발휘한다.

공개념 입법만으로 투기바람을 잡을수 없었다. 공개념 입법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 노태우 대통령은 재벌의 토지소유에 대해 일정한 규제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1989년말 노 대통령은 30대 재벌그룹을 6차례로 나누어 하루에 5개 재벌의 회장을 청와대로 불렀다.

“기업이 정부를 쳐다보며 특혜지원만 생각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기업이 골프장이나 짓고 레저사업에 몰두할 때가 아니라, 경제회생을 위해 노력해 주십시오. 기업들은 이제부터라도 부동산 투기를 자제해 주십시오.”

이때까지만 해도 재벌총수들은 ‘盧心’의 깊은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공개념 법률이 기업활동을 위축시킨다는 주장을 펴기는 했지만, 재벌 스스로는 투기행각을 자제하지 않았다. 재벌그룹들은 각기 부동산 전담팀을 두고 전국의 땅을 보러 다녔으며, 총수 자신이 골프를 치러 다니며 경기도의 좋은 땅을 눈여겨 보아두고 있을 정도였다.

문 수석은 재벌의 부동산 투기에 대한 대통령의 의중을 받들 여력이 없었다. 문 수석 자신은 공개념 입법이 서사된후 1989년 연말 실명제 실시 반대론자들의 공세로 궁지에 몰려 있었고 ‘물리적 규제보다는 법률을 통해 재벌을 규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재벌에 대한 토지규제. 이느 문 수석에 이어 부임한 김종인 수석에 의해 ‘5·8 부동산특별조치’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공개념 입법에 간여한 국토개발연구원 K박사의 주장이다.

“공개념 법률과 5·8 조치는 시차를 두며 별개로 진행됐습니다. 당시 공개념연구위원회에서 기업의 토지과다보유에 대한 규제가 거론됐으나, 입법화되는 과정에서 청와대의 지시에 의해 삭제됐어요. 5·8 조치는 김종인 수석 부임후 공개념과 다른 차원에서 추진된 것이지요.”

토지공개ㅑ념이 여소야대의 정국에서 정부 단독의 힘만으로 구체화된 것이라면, 5·8 조치는 3당 통합후 힘을 집결한 정부가 재벌에 대해 단행한 강경조치다. 6공화국의 부동산정책은 시기가 지날수록 그 강도를 더해갔으며, 동시에 문제점도 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면 토지공개념 도입과 병행해 추진된 주택 200만호 정책과 신도시건설 정책을 짚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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