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동열의 콘텐츠 연대기] ㉜ 콘텐츠 제국 '월트 디즈니’ 탄생 비화 (상) – 불운과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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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열의 콘텐츠 연대기] ㉜ 콘텐츠 제국 '월트 디즈니’ 탄생 비화 (상) – 불운과 고통
  • 문동열 레드브로스대표
  • 승인 2021.06.25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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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나이에 뛰어든 애니메이션 업계, 실패를 거듭하던 월트 디즈니
꿈의 도시 헐리우드에 입성하지만, 돌아온 건 잔혹한 무관심
그에게 손을 뻗은 단 한 명의 사람, 그녀로 인해 역사가 바뀌었다
문동열 레드브로스 대표.
문동열 레드브로스 대표.

[문동열 레드브로스 대표] 현재 최고의 콘텐츠 제국이라 불리는 디즈니 컴퍼니. 그 디즈니 월드를 만든 건국 황제 월트 디즈니가 애니메이션 업계에 처음 뛰어든 건 그의 나이 19세의 일이다. 

어떻게 보면 어린 나이에 당시로선 신기술에 가까운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애니메이터의 길을 선택한 건 월트에게는 그렇게 어려운 결심은 아니었다. 

워낙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고, 애니메이션이라는 새로운 장르가 앞으로 크게 성장할거라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녹록지 않았다. 

사회 경험이 없는 젊은 청년들이 가진 건 열정밖에 없었다. 궁핍한 집안 환경으로 집으로부터의 도움도 기대하지 못했다. 

새로운 애니메이션을 만들겠다는 그의 도전은 자금 부족과 경험 부족으로 번번히 무너졌고, 아무리 열정을 가지고 일을 하더라도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동료들과 큰 뜻을 품고 시작한 ‘Laugh-O-Gram Studio’가 파산하자 모든 것을 잃은 월트는 1923년 21세의 나이에 고향 캔자스 시티를 떠나 ‘꿈의 도시 할리우드’에 입성한다.

젊은 시절의 월트 디즈니. 출처=위키피디아.
젊은 시절의 월트 디즈니. 출처=위키피디아.

디즈니의 할리우드 입성

월트가 고향인 캔자스시티를 떠나 헐리우드가 있는 로스엔젤레스가 온 가장 큰 이유는 형인 로이 디즈니가 LA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파산으로 한순간에 빈털터리가 되어버린 월트에게는 그나마 자신과 친한 로이형을 찾아가는 것이 최선이었을 지도 모른다. LA를 찾은 월트는 당시 세계적인 영화 제작의 메카가 되어가고 있는 할리우드에서 자신의 일을 찾을 수 있기를 기대했다. 

평생의 파트너인 형 로이 디즈니(왼쪽)와 함께. 사진출처=위키피디아.
평생의 파트너인 형 로이 디즈니(왼쪽)와 함께. 사진출처=위키피디아.

월트가 처음 생각한 일은 지금까지 해온 애니메이터가 아니라 실사 영화 감독의 일이었다. 지난 몇 년간의 고생으로 인해 월트의 애니메이션의 대한 열정은 많이 사그라든 상태였다.

생각과 달리 애니메이션은 실사 영화보다 제작 비용이 많이 드는 일이었다. 모든 그림을 일일이 수작업으로 그려야 하는 탓에 인건비가 많이 들고, 제작도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많은 영화 제작자들이 애니메이션의 매력을 인정하면서도 쉽게 애니메이션 제작에 뛰어들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월트 역시 지난 실패들로 인해 애니메이션의 한계를 느끼고 실사로 전환하기를 원했다. 만일 이 때 그의 바람대로 실사 감독의 일자리를 구했다면 아마도 지금의 디즈니 제국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월트의 구직 활동은 신통치 않았고, 그는 파산한 ‘Laugh-O-Gram’의 마지막 남은 재산이었던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 (Alice’s Wonder Land)’를 팔기 위해 동분서주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길은 없었다.

마지막 궁지에 몰린 월트는 수많은 배급사와 투자자들에게 일일이 편지를 쓰며 작품 판매에 모든 것을 걸었다. 하지만 현실은 늘 그랬듯이 잔혹했다. 스튜디오가 건재한 상황에서도 팔리지 않았던 작품이 파산까지 한 상태에서 팔릴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그의 작품을 사겠다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고, 월트의 꿈도 열정도 그리고 그의 지갑도 서서히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디즈니에 관심을 가진 단 한 명의 사람

월트가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를 팔기 위해 보낸 편지를 받은 사람 중에 마가렛 J. 윙클러라는 사람이 있었다. 

워너 브라더스의 창립자 중 한 사람인 해리 워너의 개인 비서로 영화계 경력을 시작한 그녀는 워너에서 일하는 동안 업무적으로 좋은 인상을 남겼다. 

여성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던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워너는 그녀를 신뢰해 윙클러 프로덕션이라는 그녀의 이름을 딴 배급사를 설립할 수 있도록 도왔다. 윙클러는 당시 인기 캐릭터였던 ‘고양이 펠릭스’의 판권을 확보하고 애니메이션을 제작해 큰 성공을 거둔다. 

마가렛 J. 윙클러. 그녀가 내민 손길로 월트는 다시 한번 애니메이션의 길을 걷게 된다. 출처 = 위키피디아.
마가렛 J. 윙클러. 그녀가 내민 손길로 월트는 다시 한번 애니메이션의 길을 걷게 된다. 출처 = 위키피디아.

잇단 성공에 고무된 ‘고양이 펠릭스’의 원작자인 팻 설리반 프로덕션은 더 큰 욕심을 부렸고, 윙클러와 끊임없이 다투기 시작했다. 둘 사이의 합의점을 찾지 못하자 1923년 결국 ‘고양이 펠릭스’의 계약을 해지하고, 윙클러는 졸지에 가장 큰 수익원을 잃게 된다. 

새로운 수익원을 찾기 위해 고민 중이던 윙클러의 눈에 띈 건 한 젊은 애니메이터가 보낸 편지였다. 바로 월트 디즈니였다.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라는 이름의 애니메이션의 파일럿 릴을 본 윙클러는 어린 소녀가 등장하는 이 애니메이션에 관심을 보였고, 이 것을 제작한 스튜디오가 파산했다는 사실을 알고도 디즈니와 1년 계약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이 계약으로 파산 상태의 월트는 다시 한번 재기의 기회를 얻게 되었고, 곧 헐리우드에서는 최초의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인 ‘디즈니 브라더스’를 설립한다. 오랜 방황과 굶주림의 고통 속에 다시 한번 재기의 기회를 얻은 월트 디즈니였지만 그의 고통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다음 편에 계속)

●문동열 레드브로스 대표는 일본 게이오대학 대학원에서 미디어 디자인을 전공하고, LG인터넷, SBS콘텐츠 허브, IBK 기업은행 문화콘텐츠 금융부 등에서 방송, 게임, 영화 등 다양한 콘텐츠 기획 및 제작을 해왔다. 콘텐츠 제작과 금융 시스템에 정통한 콘텐츠 산업 전문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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