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과의 전쟁②…과표 현실화 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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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과의 전쟁②…과표 현실화 공방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2.01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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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공화국 비화> 경제팀·내무부, “땅투기 근절” “조세저항” 이견

“박 장관, 공시지가를 과세표준으로 삼을 경우 국민들에게 엄청난 세금을 추가로 물리게 됩니다. 조세 저항이 커질 텐데 어떻게 막겠소.”

“본 의원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무부도 과표 현실화에 대해 ‘민란이 일어난다’며 반대하질 않습니까. 공시지가를 과세표준으로 하는 것이 과표 현실화 정책과 다른 게 무엇입니까.”

1989년 3월 7일 국회건설위원회. 박승 건설부 장관은 ‘지가공시에 관한 법률’을 심의하는 자리에서 건설위 소속 의원들, 특히 민정당 의원들로부터 집중 포화를 당하고 있었다. 여소야대의 국회에서 여당 의원들마저 반대하니, 자칫하다가는 법안 자체가 무산될 위기에 봉착했다. 토지 소유자들의 말없는 저항이 국회의원들의 입을 통해 터져 나온 것이었다.

박 장관은 당황했다. 거래가격(시가)의 15% 밖에 되지 않는 토지과표를 현실화해 땅을 가진 사람들에게 세금을 많이 물려야 부동산 투기를 잡을 수 있다는 게 경제수석 시절부터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토지보유 과세(재산세 토지분·토지과다보유세)는 지방세로 내무부 관할 법률이었고, 내무부는 조세 저항을 이유로 토지과표 현실화에 사사건건 반대했다. 내무부의 반대를 피해 만든 게 지가공시법인데, 이마저 국회에서 벽에 부딛쳤다. 박승 장관은 타협안을 제시했다.

“공시지가를 과표로 삼는다는 내용을 삭제하겠습니다. 입법 취지를 살려 법안을 통과시켜 주길 바랍니다.”

건설위 의원들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돌았다. 삭제 내용은 지가공시법의 알맹이였고, 박 장관의 타협은 굴복이나 다름 없었다. 국회는 이내 이 법안을 정해진 수순에 따라 통과시켰다.

벅숭 당시 건설부 장관의 회고다.

“공시지가는 땅에 대한 과세를 현실화한다는 점에서 당시로는 가장 실효성 있는 정책이었습니다. 그러나 여야 모두 반대하는 바람에 공시지가를 과세 기준으로 한다는 내용이 모법에서 삭제됐습니다. 나중에 시행령에 이 규정을 집어 넣었는데, 결국은 국회에 거짓말을 한 셈이지요. 여당이 후에 이를 알았지만, 모른체 해주었습니다.”

지가공시법을 둘러싼 정부 여당의 마찰은 토지공개념 관련법안 심의로는 첫 번째 당정 갈등이었다. 이 갈등은 후에 택지소유상한법·개발이익환수법·토지초과이득세법 등 공개념 3법의 통과 시에도 재연되었다.

노태우 정부는 출범과 동시에 부동산 투기와의 전쟁을 벌여야 했다. 88올림픽을 앞두고 수도권을 중심으로 땅값·집값이 오르기 사작했고, 투기 열기가 달아올랐다. 실제로 땅값이 올라도 너무 올랐다. 1975년에서 1988년 사이에 국민소득과 도매물가가 2.9배 오른데 비해 주택가격은 4.7배, 땅값은 8.4배나 뛰었다.

근로자들은 죽자사자 땀 흘려 일해도 봉급으로 집 한 칸 마련하기 힘들어 졌다. 알뜰살뜰 저축하면 집값·땅값이 오르고 뛰어오르는 물가를 따라가기 바빴다.

반면에 땅 부자들은 가만 앉아 있어도 땅값이 올라 엄청난 돈을 벌었다. 이들은 부동산을 담보로 은행에서 돈을 빌려 또 땅을 샀다. 이들은 은행 빚을 갚고도 빌린 돈보다 몇 갑절의 이익을 챙겼다. 기업 하는 사람도 노조로부터 욕지거리를 들으면서 노사분규에 시달리느니, 부동산 투자는 그야말로 돈놀이로는 최고였다.

1988년 8월초 나웅배 부총리겸 경제기획원 장관은 청와대를 방문해 노태우 대통령에게 토지정책의 근본적 전환을 건의했다.

“부동산이 투기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임시적인 대책이 아니라, 근본적인 대책을 세우겠습니다. 토지는 공공재의 성격이 강하므로, 토지공개념 제도를 확대, 도입하겠습니다.”

나 부총리가 노 대통령의 결재를 받아 발표한 내용은 이른바 ‘8·10부동산 종합대책’이었다. 이 대책은 토지거래허가·신고제의 확대, 검인계약서 시행을 단기 대책으로, 개발이익환수제·택지소유상한제·지가공시제의 도입을 장기 대책으로 각각 설정했다.

이 때붙처 ‘토지공개념’이라는 단어가 정부의 공식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했고, 이 때 발표된 장기 대책은 나중에 토지공개념 3개 법안으로 입법화된다.

▲ 대규모 아파타단지가 들어서기 이전의 1990년대초 서울 관악구 봉천동 일대의 달동네 / '재벌 때문에 나라망하겠소' 책자 자료 사진

 

나 부총리, 다섯 차례 설득 끝에 타협안

‘토지공개념’이라는 용어가 정책 수단으로 정착하기는 실로 10년만의 일이다. 1978년 중동 특수로 유입된 오일머니가 부동산 투기 바람을 일으켰고, 당시 박정희 정부는 토지거래허가·신고제의 도입을 골자로 하는 ‘8·8조치’로 대처했다. ‘8·8 조치’ 발표후 신형식 당시 건설부 장관은 국회에서 “토지는 일반적인 경제 재화이나 공급이 제한된 만큼 사적인 면만 강조할 것이 아니다. 자분주의 경제에서도 토지공개념이 도입되어야 한다”며 ‘토지공개념’이란 용어를 처음 썼다.

박원석 당시 건설부 토지정책 과장의 설명이다.

“8·8 조치 이후 10년만에 투기 바람이 재연됐습니다. 토지는 국민의 재산권이지만, 뭔가 제한을 가해야 한다는 여론이 정부 부처 간에 확산돼 나갔습니다. 토지공개념 제도는 예전부터 건설부가 주장해온 것인데 땅값이 들먹거리면서 구체적인 정책으로 받아들여진 것이지요.”

토지제도에 대한 손질은 토지과표 현실화에서 시작했다.

당시 땅을 가진 사람에게 물리는 세금으로는 지방세인 재산세토지분이 주종을 이루었는데, 세금을 매기는 기준(과표)이 엉망이었다. 도심지와 개발 예정지등 비싼 땅의 과표는 시가에 비해 1~5%에 불과한 곳이 허다했고, 시골의 전답은 과표가 시가에 근접했다. 전국토지의 과표 평균은 시가의 15%에도 미치지 못했다.

나 부총리는 “재임중 토지제도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고쳐 후세에 물려주겠다”며 토지과표 현실화에 매달렸다. 다섯 차례나 정관회의를 열어 내무부를 설득한 끝에 1988년부터 93년까지 5년간의 기간을 두고 토지의 경우 시가의 60%, 건물은 시가의 50%까지 과표를 현실화한다는 합의를 도출하기에 이른다. 1988년까지만 해도 땅값 상승률이 위력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단은 다음해에 벌어졌다. 8·10 조치에도 불구하고 89년 들어 전국의 지가가 급격한 커브를 그리며 상승하자 새로 부임한 조순 부총리겸 경제기획원 장관이 과표 현실화 기간을 5년에서 3년으로 단축하려 했다. 이에 내무부가 반발했다. 경제 관료와 내무 관료의 이질성이 드러났다. 이춘구·이한동 장관등 권력실세를 등에 업은 내무 관료들은 경제기획원 장관을 정점으로 하는 경제부처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민정당도 내무부의 편을 들었다.

김영진 내무부 차관은 “기획원이 주장하는 과표 현실화는 조세 저항을 불러 일으키므로, 국가 안보 상 곤란하다”며 반대론을 폈다. 또 윤한도 내무부 지방세국장은 한이헌 기획원 기획국장, 이근영 재무부 세제국장, 이규황 건설부 토지국장의 연합팀에 맞서 “과표를 현살화하면 민란이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내무 관료들 중에는 회의 도중에 “더 이상 얘기를 못하겠다”며 뛰쳐 나가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조 부총리로서도 어쩔수 없었다. 기획원과 내무부의 과표 현실화 논쟁은 기간을 5년으로 유지하되, 기속력이 없는 정책방향으로 한다는 내용으로 어정쩡하게 결론짓고 마무리됐다.

내무 관료의 집단 반발에 패배한 뒤 경제 수장은 내무부를 우회하는 새로운 전략을 채택했다. 지가 공시법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 정부의 지가 표준은 ▲내무부 과표(재산세 토지분 기준) ▲국세청 기준시가(양도소득세 기준) ▲건설부 기준시가(토지수용 보상 기준) ▲한국감정원 기준시가(은행 담보 기준) 등 4가지로 각각 달랐는데, 조 부총리는 이들 지가의 통합을 내세워 건설부 입법으로 지가공시법 제정을 추진했다. 이마저 민정당의 반발에 부딛쳐 알맹이가 빠진 법률이 국회를 통과했다.

과표 현실화와 지가공시제도의 도입은 토지공개념의 전초전에 불과했다. 토지공개념 제도의 본격적인 도입은 문희갑 서석이 정부 내에 토지공개념 대책반과 공개념 연구위원회를 설치한 뒤 일일이 간여하면서부터라고 할수 있다.

문희갑 전 수석의 말이다.

“토지공개념 3개 법안을 직접 간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당정 마찰은 물론 부처간 대립이 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대통령이 부동산 투기의 심각성을 인식, 입법을 추진했으므로 청와대 비서실에서 대통령 결정사항으로 직접 조정하게 된 것입니다.”

박승 건설부 장관은 이 대목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택지상한제·토지토과이득세·개발이익환수제는 문 수석이 주무 장관인 본인과 협의도 하지 않고 거의 독단으로 처리했습니다. 문 수석의 스타일이기도 했지요. 이들 공개념 3개 법률은 시장 기능을 무시하는 법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반대했습니다. 토지보유과세(종합토지세)가 정상화되면 이들 법은 빨리 없어져야 합니다.”

당시 문 수석과 박 장관의 얘기를 종합하면 경제팀 내에서는 부동산에 대한 세금을 무겁게 하자는 보유과세 강화론과 토지소유에 대한 물리적 제약을 강화해야 한다는 토지소유 제한론의 두 가지 기류가 있었다. 1989년 문 수석이 경제 개혁의 일환으로 토지공개념의 도입을 진두지휘하면서 토지소유를 제한하는 택지소유상한법·개발이익환수법·토지초과이득세법이 자리를 잡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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