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조선의 유교 이념이 살아있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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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조선의 유교 이념이 살아있는 곳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1.31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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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역대 왕과 추존왕, 왕비의 신위를 모셔진 사당
▲ 사진=김인영

 

설날 연휴 기간에 종묘(宗廟)를 둘러보았다. 시간 여유도 있었거니와 문화재청이 자유관람제를 실시하는 바람에 시간제의 틀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이유다. 날씨는 찼다. 영하의 날씨에 아침에 눈발이 내렸다.

종묘(宗廟)는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 추존왕과 그의 왕비의 신위를 모시고 국가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조선은 유교를 지배 이념으로 삼았다. 유교가 종교나 다름 없었다. 유교적 세계관으로 볼 때, 사람은 영혼인 혼(魂)과 육신인 백(魄)이 결합된 존재다. 죽으면 혼과 백이 분리되어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묘(廟)와 묘(墓)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廟는 죽은 조상의 혼을 모시는 사당이고, 墓묘는 시신(백)을 모시는 무덤이다. 따라서 종묘는 조선 역대왕과 왕비, 추존왕과 그의 비의 영혼을 모시는 사당이다.

유교국가 조선은 종묘사직(宗廟社稷)을 보전하려고 힘썼다. 종묘는 왕실의 조상을 모시는 곳이며, 사직은 국토의 신인 社와 곡식의 신인 稷을 모시는 사당이다. 유교국가에서 종묘사직이라 함은 왕실의 조상과 나라의 신을 모시는 중요한 두 곳의 사당이다.

유교국가에서는 좌묘우사(左廟右社), 즉 종묘는 좌측에 사직(社稷)은 우측에 세운다는 전통적 관념을 따랐다. 그래서 조선조 주궁궐인 경복궁을 기준으로 사직은 오른쪽에 있고, 종묘는 왼쪽에 자리잡고 있다.

조선 왕조를 연 이성계(태조)는 임금에 오른지 3년이 되던 해에 고려의 도읍지인 개경에서 새 수도인 한양으로 천도를 했고, 천도후 가장 먼저 한 일이 종묘의 건설이었다. 종묘는 궁궐에 앞서 태조 4년(1395) 9월에 준공된다.

종묘는 임진왜란으로 잿더미로 변한다. 전쟁이 끝나고도 선조 41년(1608) 1월에야 중건되기 시작해 광해군이 즉위한 뒤 3개월 후인 5월에 완공된다. 이어 영조, 헌종 시대에 증축이 이뤄지고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 정전의 기둥 /사진=김인영

종묘의 면적은 5만6천여 평. 정전과 영녕전 그리고 부속건물인 어숙실, 공민왕 신당, 향대청, 망묘루, 전사청, 제정, 악공청, 공신당, 칠사당으로 구성돼 있다.

▲ 종묘제례 시연 /사진=김인영

① 창엽문

종묘의 정문이다. 창엽문을 들어서면 곧바로 거칠고 넓적한 박석이 높낮이가 다르게 북으로 길게 깔려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이 길의 가운데 높은 길은 혼령이 다니는 신로(神路)와 향축패가 오가는 향로(香路)가 합쳐진 신향로(神香路)이다. 오른쪽 길은 임금이 사용하는 어로(御路), 왼쪽 길은 왕세자가 사용하는 세자로이다.

 

② 공민왕 신당

정문에서 오른쪽 숲길에 공민왕 신당(恭愍王神堂)이 있다. 종묘 입구 외진 곳에 작고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다.

조선 왕조의 신성한 사당에 고려 왕을 모신 것은 무슨 연유일까. 고려 전통 왕계의 마지막 임금인 공민왕을 모셔 고려를 계승했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공민왕이 사대부 세력과 신진 무관의 중용한 것을 배려해 예우한 것인지, 알길이 없다. 정식 명칭은 ‘고려 공민왕 영정 봉안지당’(高麗恭愍王影幀奉安之堂). 그 안에 공민왕과 그의 왕비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의 영정이 모셔져 있으며, 공민왕이 그렸다고 전하는 말을 탄 인물도가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1994년부터 인근 주민들로 결성된 ‘공민왕 추모회’에서 매년 제사를 올린다고 한다.

 

③ 향대청(香大廳)

종묘에서 사용하는 향축패를 보관하는 창고 건물이다.

 

④ 재궁(齋宮)

임금과 세자가 어로와 세자로를 따라 이곳에 도착해 재례가 시작되기 전에 머물면서 목욕재계하고 의복을 정제해 제사 준비를 하던 곳. 가운데 건물은 재실로서 향축을 모시는 곳이며, 동쪽은 임금이 머물던 어숙소, 서쪽은 목욕을 하던 욕청(浴廳)이다.

▲ 재궁
▲ 조선임금 모형 /사진=김인영

⑤ 정전(正殿)

종묘의 중심건물. 총 35칸의 긴 선형 건물로 조선 왕조 역대 왕과 왕비의 49위(位) 신주를 19실에 봉안하고 있다. 단일 건축물로는 세계적으로 가장 긴 형태로 이는 신위가 늘어날 때마다 감실을 증축했다. 조선왕조가 27대 519년간 통치했기 때문에 동아시아 왕조국가 가운데 이만한 긴 시기를 지배한 왕조가 없는 셈이다. 조선왕조 정전의 길이가 최대이고, 다음은 베트남, 중국이 세 번째라고 해설자가 설명한다.

늘어나는 신위 때문에 정전에는 여러 번에 걸쳐 증축한 흔적이 남아 있다.

정전의 가구는 단순 소박하다. 종묘는 절제와 단순과 반복이다.

정전은 칸마다 제일 깊은 곳에 신위를 모신 감실이 있다.

정전에는 세 개의 문이 있다. 정전의 정면으로 드나들 수 있는 것은 오직 혼령뿐이다. 동문은 집례의 통행로인데, 어숙실에서 출발하는 어로를 정전 동쪽 묘정의 전하 판위와 세자 판위로 이어주는 연결점이기도 하다. 서쪽의 편문은 악사와 악원들의 출입문이다.

정전은 국보 제227호다.

▲ 정전 /사진=김인영

⑥ 공신당(功臣堂)

정전 담장 안 동남쪽에 있다. 역대 왕의 공신의 신주 83위(位)가 모셔져 있다.

▲ 공신당 /사진=김인영

⑦ 칠사당(七祀堂)

정전 담장 안 서남쪽 하월대 아래에 있는 3칸짜리 작은 집이다. 왕실의 제례 과정에 관여하는 일곱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칠사’란 ▲궁중의 신인 사명(司命) ▲출입을 관장하는 호(戶) ▲음식을 주관하는 주(廚) ▲도성의 문을 지키는 신령인 국문(國門) ▲상벌을 담당하는 태려(太厲) ▲도로의 행작을 관장하는 국행(國行) ▲방안에 머문다는 토신(土神)인 중류(中霤)를 의미한다.

 

⑧ 영녕전(永寧殿)

별묘(別廟)라고도 한다. 정전과 더불어 종묘의 중심 영역을 이룬다. 중앙의 4칸이 좌우 협실보다 한 단 높게 솟아 있다.

가운데 4칸의 태실에 목조·익조·도조·환조 등 추존왕의 신위를 서상제로 모셨고, 좌우 협실에는 정전에서 옮겨 모신 15위의 왕과 17위 왕후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 영녕전 /사진=김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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