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수 에세이] 추억여행⑤…영화에 젖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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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수 에세이] 추억여행⑤…영화에 젖어
  • 조병수 프리랜서
  • 승인 2017.01.22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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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크 디스트릭트 국립공원…영화 ‘오만과 편견’의 배경

[조병수 프리랜서] 키이라 나이틀리가 주연한 『오만과 편견(Pride and Prejudice, 2005)』이란 영화를 보면서, 그 배경으로 나오는 아름다운 산하와 집들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궁금했었다. 그런데다가 영국여행을 계획할 즈음에 우연찮게 그 원작소설과, 저자인 제인 오스틴(Jane Austen)에 대한 이야기를 접하면서 궁금증과 흥미가 더해졌다.

그래서 영화에서 여자 주인공인 엘리자베스 베넷(키이라 나이틀리粉)이 다아시의 저택인 펨벌리(Pemberley)로 찾아가는 장면들을 촬영했다는 채스워스 하우스(Chatsworth House)를 둘러보기로 정했다. 그곳은 영국 중부지방 더본셔 공작인 캐번디시 가문(Carvendish family)의 저택으로, 여러 차례 “영국에서 특별히 사랑 받는 저택”으로 선정되기도 했다는 곳이다.

그리고 그 저택이 있는 피크 디스트릭트 국립공원(Peak District National Park)에는 영국 내에서 경치 좋은 길로 열손가락 안에 꼽히는 캣 앤드 피들 루트(Cat and Fiddle route)도 있었다. 중·북부지방의 야생화로 뒤덮인 황야지대(moors)와 구릉지 사이를 휘감아 도는 길들을 달리는 운치를 다시 한번 맛보고 싶었으니까 아주 안성맞춤이었다.

빙햄턴 근교의 숙소에서 북쪽으로 약 두 시간 정도를 달린 후 체스터필드를 거쳐서 피크 디스트릭트 국립공원의 동(東)편으로 들어섰다. 도심을 벗어나자 제법 구릉지로 들어선 느낌이 들었다. 1951년에 영국의 첫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이 지역은 대부분이 해발 300미터에 위치하고, 최고 높은 곳은 해발 636미터에 이른다고 한다.

채스워스 하우스 쪽으로 가까워지면서 산자락의 양떼들이 목가적인 분위기와 감동을 물씬 안겨다 준다. 풀밭에 펼쳐진 양들의 모습이 마치 흰색 솜털을 흩어놓은 듯했다. 굴곡지고 경사진 길을 달리느라 차를 세울 수도 없이 지나치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였다.

▲ <채스워스 인근의 길가 풍경> /사진=조병수

이윽고 천천히 눈앞에 펼쳐지는 대저택의 위용과 푸른 초원, 그 앞에 놓여진 강줄기,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을 배경으로 여기저기서 한가로이 노닐고 있는 양떼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라는 다윗의 시 구절이 절로 떠오르는 ‘평화로움’이었다. 연신 탄성을 자아내던 가족들도 빨리 저 푸른 풀밭에 한가로이 거닐고 있는 양들 곁으로 달려가고 싶은 눈치였다.

'하드윅의 베스 (Bess of Hardwick)'로 알려진 엘리자베스 (Elizabeth Talbot, 슈루즈버리 백작부인)가 두 번째 남편인 캐번디시 가문의 영지(領地)로 1549년에 채스워스를 구입하고, 1553년에 새로 집을 짓기 시작했다. 베스는 그 지역의 가난한 집안의 딸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시작된 4번의 결혼으로 엄청난 부와 함께 메리 여왕과 엘리자베스1세 여왕 다음으로 영향력이 높아졌다던 사람이다.

그 채스워스 하우스는 17세기 후반에 고전주의 양식으로 개조공사가 이루어졌고, 이후 1981년에 일반에게 공개되었다고 한다.

▲ <채스워스 하우스 전경> /사진=조병수
▲ <채스워스 하우스 앞을 흐르는 더원트 강(River Derwent)> /사진=조병수

나이 많은 할머니들이 일하는 모습이 인상적인 휴대품보관소에 배낭을 맡기고, 줄지어 늘어선 관람객들의 뒤를 따라 들어선 저택의 내부는, 영국의 다른 성(城)이나 저택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여러 가지 진귀한 그림들과 장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사실 독일이나 프랑스에서 다녀본 고성(古城)들의 상당수는 싱거울 정도로 장식물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에 비해서, 영국의 성이나 저택들은 천정화나 벽면을 가득 메운 초상화, 각양각색의 장식품, 무기류, 가구, 도자기들이 꽉 들어차게 진열되어 있어서 볼거리가 많다.

그런데다가 그 영화에서 관심이 끌리는 남자인 다아시의 펨벌리 저택을 구경하러 온 여주인공의 시선이 머문 곳을 거닌다는 즐거움이 더해지니까 아주 흥미로워졌다. 요즈음 “한류 붐을 타고 많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인기드라마 촬영지를 찾는다”는 기사를 보면서, ‘뭘 그렇게까지 하나?’하는 생각을 한적이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냥 영화 속 그 시절로 들어가 있는 것 같은 기분까지 더해 주었다.

▲ <여주인공이 이모님 내외와 함께 걸어가며 천정의 벽화를 올려보던 Painted Room> /사진=조병수
▲ <여주인공이 다아시의 흉상을 바라다 보던 조각품 전시실(Sculpture Gallery): 내부관람코스의 마지막 장소> /사진=조병수

그렇게 저택과 정원, 강(江)가의 초원을 거닐어 보고, 평화로이 노니는 양(羊)들 곁에서 푸근한 여유로움을 느껴보기도 했다.

그리고는 18세기에서 낭만주의 문학기로 넘어가는 시기에 독신의 여성작가인 제인 오스틴이 채스워스 하우스를 배경으로 『오만과 편견』을 쓸 때 머물렀다는 베이크웰(Bakewell)이란 마을도 둘러보고, 채스워스 하우스 부근 산자락에 있는 식료품점(Chatsworth Estate Farm Shop)에서 입에 살살 녹는듯한 샌드위치도 맛보았다. 그곳에서 내려다본 초원의 풍경은 그 자체로 하나의 그림엽서였다.

▲ < Chatsworth Estate Farm Shop 에서 내다 본 피크 디스트릭트> /사진=조병수

이렇듯 자연과 어울리고, 그 아름다운 자연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영국인들의 문화와 인식에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 채스워스 지역을 떠나서, 본격적으로 피크 디스트릭트를 동서로 관통하는 도로로 나아갔다.

벅스턴(Buxton)에서 매이클즈필드(Macclesfield)까지의 ‘캣 앤드 피들 루트(Cat and Fiddle Route)’는 그 거리가 19km남짓이다. 벅스턴을 지나 황야지역의 구릉 사이로 하늘로 치솟는 듯한 A54 도로를 따라 가다가 보니,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햇빛과 바람과 구름이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었다. A537도로로 접어들어서 그 오르막의 정점에 이르자 저만치 식당 같은 표지가 보이길래 무조건 차를 세웠다.

5월말인데도 바깥 바람이 제법 세차고 쌀쌀했다. 저 아래로 보이는 황야지대와 구릉이 곳곳마다 색깔이 달랐다. 구름을 뚫고 내비치는 햇살에 따라 다른 색조를 보이는 그 광경이 마치 '태초의 신비'같은 장엄함마져 안겨주었다.

▲ < Chatsworth Estate Farm Shop 에서 내다 본 피크 디스트릭트> /사진=조병수
▲ <캣 앤드 피들 인 부근에서 바라본 피크 디스트릭트 풍경> /사진=조병수

그 곳이 캣 앤드 피들 인(Cat and Fiddle Inn)이었다. 1813년에 지어진 그 펍(Pub)의 이름을 따서 ‘캣 앤드 피들 로드’라는 길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해발 515미터로 영국에서 두 번째로 높은 곳에 있다는 그 펍에서 맛본 커피 한잔이 그날의 피로를 싹 날려주었다.

‘이런 곳에서 하루 정도 지낼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하고 생각하다가 쓴웃음을 삼켰다. ‘우리 같으면 벌써 대단위 리조트 같은 콘크리트 구조물이 어딘가에 들어섰을 텐데···’하는 생각이 스쳐갔기 때문이다.

그곳을 다녀온 6개월 후인 작년 12월에 그 펍이 문을 닫았다고 한다. 멋들어진 풍광 속에서 200여년을 지내왔다고 하는데, 조금은 안타까운 소식이었다.

▲ <캣 앤드 피들 인> /사진=조병수

거기서 서쪽으로 굽이쳐 내리는 산길을 따라 내려오다가 보니 그냥 지나쳐 버리기에는 너무나 아쉬워서, 무작정 이름도 모르는 작은 길로 핸들을 꺾었다. 겨우 차 하나 다닐만한 길을 따라 가면서, 양떼와 농장들이 평화로이 놓여있는 초원과 구릉 길을 이리저리 넘나들었다.

늦은 오후시간에 그렇게 자연을 음미하며 달리다가 보니, 길가의 어느 농장의 모습이 너무나 평화롭게 보이길래 잠시 차를 세웠다. 저녁 무렵이 되어서인지 저 멀리 집 앞쪽으로 양떼들을 불러 모으고, 이를 지키며 부지런히 움직이는 개들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

▲ <피크 디스트릭트 국립공원 A54길가:: Berry Bank Farm> /사진=조병수

위도가 높아서 저녁 때가 되어도 어두워지지 않는 덕분에, 정말 구경 한번 잘했다, 그리고는 저녁요기를 위해 국립공원 남쪽에 있는 Leek라는 도시의 조그만 이태리 식당을 찾아갔다. 시장한 탓도 있었겠지만 음식 맛이 일품이었다. 인터넷으로 식당 종류만 보고 찾아간 집이었는데 기대 이상이었다.

‘언제부터 영국에서 먹는 음식이 이렇게 맛있어졌나?’ 싶었다. 하기야 원래 그랬었는데, 내가 예전엔 경험하지 못한 채 쉽게 생각한 탓일 것이다.

그렇게 옛 것과 자연을 잘 간직하고 있는 영국이란 나라를 둘러보다 보니, 마음 한편으로는 착잡한 마음도 일어났다.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수시로 허물고 짓고 바꾸는 우리 주변과 비교해볼 때, 자연 그대로, 있는 그대로 자손들에게 물려주는 그들의 문화가 돋보임은 어쩔 수 없다.

건물마다 무엇이 그리 할말이 많은지, 이러쿵저러쿵 써서 덕지덕지 내다 걸고는 “문화”를 말한다. 탄소저감운동의 모체라 할 국제기구를 우리나라에 유치해 놓고도, 도심지마다 휘황찬란한 조명에다가 건물외벽까지 번쩍번쩍 호사를 부린다. 산업혁명의 중심지였던 나라의 겉모습만 둘러보고, 서구(西歐)의 것이 마냥 좋아 보이고 우월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냥 시원한 공기가 그립고,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에 맑고 파란 우리의 가을 하늘을 다시금 보고 싶어진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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