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 아시아 금융위기⑤] 달러 강세의 위력
상태바
[1997 아시아 금융위기⑤] 달러 강세의 위력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1.19 12:3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국 금리인상 따른 일본 엔화 하락이 금융위기의 배경

1995년 4월 18일 뉴욕 외환시장에서 미국 달러화는 일본 엔화에 대해 1달러당 80.63 엔으로 떨어 졌다. 일본 엔화와 달러가 교환된 역사 이래 미국의 녹색 지폐(greenback)는 일본 돈에 비해 사상 최저치로 꺾어진 것이었다. 그해 초 1달러당 110엔에서 출발한 달러는 3개월 사이에 20%나 폭락했다. 사상 최고의 엔고(高)였다.

엔고는 한국과 동남아시아 경제에 절대적 호황을 창출했다. 일본 주변의 아시아 국가들이 연간 10%대의 성장을 한 것도 엔고가 가져온 결과였다. 자국화폐를 달러에 고정시키고 있던 아시아 국가들은 엔화 가치가 오르면 이익을 본다. 경쟁제품인 일본 제품의 수출가격은 비싸진다. 이에 반해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 국가의 제품은 싼 가격으로 수출할 수 있게 된다. 한국은 자동차, 반도체, 철강, 가전제품등 주력 수출산업에서 일본과 경쟁했기 때문에 일본 돈이 강하면 상대적으로 수출이 호조를 보이는 이점이 있다. 86~88년의 3저 호황은 엔고에서 발생한 것이다.

빌 클린턴 미국 행정부의 초대 재무장관인 로이드 벤트센은 94년 1월 엔화에 대한 달러환율이 1달러당 113엔이었음에도 불구, 달러가 너무 강하다며 일본에 엔화 절상 압력을 넣었다. 달러가 약세로 되면(엔화는 강세) 미국의 수출이 늘어나고, 대신에 일본 제품의 가격이 높아지기 때문에 수입이 줄어든다. 벤트센은 늘어나는 무역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달러 약세를 고집었다.

그러나 95년초 벤트센이 물러나고 뉴욕 금융가에서 외환 거래로 잔뼈가 굵은 로버트 루빈이 재무장관에 취임했다.

루빈 장관은 전임 장관과 달리 「강한 달러(strong dollar)」를 주장했다. 그는 취임해서 업무도 파악하기 전에 달러가 폭락하자, 앨런 그린스펀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에게 협조를 구했다. FRB는 그해 8월 65억 5,000만 달러 어치의 엔화와 마르크화를 풀었다. 일본 중앙은행인 일본은행(日本銀行)과 독일 중앙은행인 분데스방크(Bundesbank)도 동시에 달러를 사들이는데 참여, 세계 3대 중앙은행이 달러 강세를 위해 공동 개입했다. 엔화와 마르크화는 약해졌고, 달러는 강세로 돌아섰다.

 

이 무렵, 달러를 강세로 전환시키는 또하나의 중요한 계기가 있었다. 미국과 일본 사이에 벌어졌던 자동차 협상이었다. 미국은 일본 자동차 시장을 개방하라고 강하게 압력을 넣었고, 완성차 뿐 아니라 자동차 부품까지 개방하라고 요구했다. 미국의 요구는 일본에겐 내정간섭에 가까울 정도였고, 일본은 이에 불복, 타결 전망은 보이지 않았다.

95년 여름 어느 날, 미국이 요구 수준을 갑자기 낮췄고, 미-일 양국은 지루했던 협상을 마무리했다. 이때 미-일 양국의 이면 합의가 무엇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협상 타결후 일본이 미국 재무부 채권을 대량 매입했다. 이는 엔화를 풀어 달러를 산다는 것을 의미하며, 달러 강세를 일본이 도와주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또하나 중요한 사실은 미국 연준리가 93년부터 94년까지 1년여에 걸쳐 연방 기준금리를 3%에서 5.5%로 인상했다. 이에 비해 일본 중앙은행은 재할인율을 인하하고 있었다. 91년 6%에 이르렀던 일본 재할인율은 95년에 0.5%로 초저리 금리로 떨어졌다. 미국 은행에서 달러 표시 유가증권을 살 경우 높은 금리를 얻는데 비해, 엔화 표시 유가증권은 거의 이문을 남기지 못하는 구조로 변했다. 국제 유동성 자금이 엔화 시장에서 달러 시장으로 이윤이 높은 곳으로 이동했고, 95년 여름이후부터 뉴욕 증시와 달러 강세는 동시에 진행됐다.

96년초 달러는 일본 엔화에 대해 100엔을 다시 넘었고, 97년 1월말 120엔을 넘어섰다. 95년 최저치에 비해 엔화는 달러화에 대해 40%, 마르크화는 20% 절하된 채 97년 상반기를 맞았다.

불행하게도 한국과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엔화 절하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 한국은 완만한 속도로 원화를 절하함으로써 대응했지만, 엔화 절하속도가 너무 빨라 무역 수지 적자가 누적됐다. 태국, 인도네시아, 홍콩등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들은 자국 통화를 달러에 고정시켜 엔고의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예일대의 제프리 가튼(Jeffrey Garten) 교수는 저서 「10대 신흥공업국(The Big Ten)」(98년 개정판)에서 엔화 약세가 아시아 환란의 원인이었음을 지적했다.

“아시아 통화 대부분이 미국 달러에 고정돼 있었다. 그 결과 인도네시아 루피아, 한국 원화 가치는 달러 강세가 되면서 고평가됐다. 이에 비해 일본 엔화와 중국 위안화가 하락했다. (편집자주: 중국은 아시아 위기 이전에 위안화를 절하했었다.) 이 두 가지 힘이 반대편에서 움직이면서 아시아 이머징 마켓의 수출품 경쟁력이 일본과 중국에 비해 약화됐다. 국제 채권은행과 투자자들은 아시아에 무절제하게 흘러간 자금을 우려했고, 아시아의 수출 엔진이 약화될 것을 걱정했다.”

 

엔화는 아시아 위기 전인 97년 4월 30일 1달러당 127.10엔까지 떨어졌다. 2년전 최저치에 비해 무려 57%나 하락한 것이다.

국제 외환시장에서 미국 달러, 일본 엔, 독일 마르크화 등 세계 3대 기축통화가 춤을 추기 시작한 것은 지난 70년대 미국 닉슨 대통령이 금본위제도 해체를 선언하면서부터였다. 금에 대한 교환 비율을 기준으로 달러, 엔, 마르크의 환율을 정했던 브레튼 우즈체제는 무너지고, 이때부터 미국과 일본, 독일의 세 기축통화의 교환비율은 닻줄 끊긴 배처럼 물위를 둥둥 떠다녔다. 태풍이 불면 언제 좌초할지 모르는 배처럼 국제 외환시장은 불안한 질서를 유지해 왔다.

1980년대 이후 국제 기축통화간 환율은 널뛰듯 변화가 극심했다. 예를 들면 엔-달러 환율의 경우 85년에 1달러당 260엔이었으나, 그후 「달러 약세-엔 강세」가 지속돼 87년에 130엔까지 갔다. 한국의 「3저 호황」은 이때의 부산물이다. 그후 엔-달러는 거꾸로 움직여 90년에 160엔으로 올라갔으나, 다시 역전, 5년후인 95년에 절반인 80엔까지 갔다. 김영삼 정부 초기의 호황은 이 결과였다. 그러나 95년 미국과 일본의 묵계로 다시 달러 강세가 지속되면서 한국과 동남아 경제에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국제 환율 구조는 미국과 일본, 독일등 세나라의 재무부와 중앙은행이 벌이는 힘의 대결에서 형성된다. 특히 미국의 이해가 세나라의 역학관계를 주도했다. 국제 통화질서는 미국이 한쪽에 버티고 서있고, 다른 한편에 일본과 독일이 미국 달러를 견제하는 양상으로 전개돼 왔다. 미국이 국내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해 금리를 올리면 엔화와 마르크화는 떨어지고, 미국이 무역적자 해소를 위해 달러를 절하하면 엔화와 마르크화는 절상됐다. 국제 외환 시장은 미국의 세계 지도력에 의해 요동쳤고, 브레튼우즈 체제가 무너진 70년 이후 그 현상은 더 심화됐다.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