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 아시아 금융위기③] 항복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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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 아시아 금융위기③] 항복문서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1.16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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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반환 다음날 헤지펀드, 태국 바트화 공격

1997년 7월 1일 자정, 홍콩 밤하늘은 불야성을 이루었다. 「대영 제국 왕관」의 보석이라던 홍콩의 주권이 중국으로 넘어가는 것을 경축하는 축포가 터지고, 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은 전세계에 대해 서구 제국주의의 종식을 선언했다. 155년전 대영 제국은 해적들이 저지른 범죄행위를 빌미로 마약전쟁을 일으켜 중국 남쪽의 자그마한 섬을 빼앗았지만, 이름 없던 어촌은 보배가 돼서 중국에게 되돌려졌다. 중국 중심의 중화경제권이 형성되고, 아시아가 다음 세기에 세계 경제 중심지가 될 것임을 기뻐하며, 아시아인들은 이날의 의미를 새겼다. 앵글로색슨족의 모국은 이제 동아시아에서 완전히 깃발을 내리는 뜻깊은 날이었다.

그러나 다음날, 태국 중앙은행은 마침내 월가 헤지펀드의 공격에 무릅을 꿇었다. 태국은 유럽 제국이 동아시아에 경쟁적으로 식민지를 건설할 때도 독립을 유지한 자존심이 강한 나라다. 프랑스와 영국의 틈바구니에서 태국 왕국은 일찍부터 서구문명을 받아들여 국가를 유지했다. 율브리너 주연의 영화 「왕과 나」는 당시 태국이 서양문명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그렸다. 덕분에 태국은 베트남, 캄보디아와 같이 독립과정에 비극적 내전을 치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 태국은 유럽인의 무력이 아니라, 유럽인들의 자본에 무릅을 꿇었다. 거대한 중국이 영국 함대 몇 척에 땅을 내준지 한 세기 후에 태국은 국제투기꾼의 몇 푼 안되는 자금공세에 휘말려든 것이다.

 

1997년 7월 2일 타일랜드 은행은 그 동안 달러에 고정시켰던 환율제도를 포기한다고 발표했다. 1달러당 24 바트에 환율을 묶어두려고 발버둥치며 외환보유고를 풀었지만, 당해낼 힘이 없었다. 고정환율제를 해제, 변동환율제를 도입키로 한 것은 중앙은행이 달러를 풀어 시장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환율 상승, 즉 바트화 폭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태국 정부는 바트화 하락을 방치하지 않겠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차왈릿 총리는 TV 연설을 통해 󰡔바트화를 절하하면 태국은 가난해 집니다󰡕라며 결단코 환율을 방어하겠다고 선언했다.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국제자본에 대항해 국민과 국내기업, 은행을 보호하겠다는 결연한 의지였다.

그러나 선진국 은행들은 태국에 빌려준 단기자금 만기를 연장해주지 않고 돌려달라고 독촉해댔고, 외환보유액은 넉넉지 않았다. 이미 헤지펀드의 공격에 태국은 막대한 보유 외환을 써버렸다. 이대로 가다가는 10년전 중남미 국가들이 겪었던 것처럼 모라토리엄(대외채무 지급정지)을 선언하고, 경제는 파국 상태에 이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거센 폭풍이 부는 바닷가에 배를 묶어두어 부서지느냐, 닻을 끊어 바다 위에 띄워 보내느냐의 갈림길에서 태국 정부는 마침내 닻을 끊어버리기로 결정했다.

차왈릿 총리는 드디어 투기꾼들에게 항복키로 하고, 이틀전의 대국민 약속을 깨버렸다. 그리고 태국 중앙은행은 외국 자본에게 혜택을 주는 두 가지 조치를 단행했다. 하나는 환율 안정장치를 제거, 바트화를 하락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국내 금리를 올리는 것이었다. 외국 자본에게는 엄청난 이익을 돌려주는 것이지만, 국내 자본과 태국민에게는 고통과 인내를 요구하는 조치들이었다. 수상은 국민들이 가난해 지는 것을 더 이상 막지 못했다.

태국정부의 항복이 발표되자, 그날 뉴욕 맨해튼 남쪽에 포진한 외환딜러들은 미칠 듯이 기뻤다. 그들은 환호를 지르며, 승리의 축배를 들었다.

▲ 바트화 /방콕 포스트 캡쳐

타일랜드 은행이 고정환율제를 포기하자 이날 하루동안 바트화는 1달러당 24.70 바트에서 29.55 바트로 무려 19.6%나 폭락했다. 태국에 100만 달러를 투자한 외국인은 하루만에 19만6,000 바트를 거져 얻는 폭리를 취하지만, 달러 빚을 지고 있는 태국인들은 그만큼 큰 부담을 안게 됐다. 태국 제품의 수출 가격이 낮아지고, 수입제품의 가격이 높아져 무역 적자를 해소하는데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바트화로 표시되는 태국 은행과 기업의 대외채무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결과를 초래했다. 태국 은행과 기업이 지고 있는 부채가 700억 달러에 이르렀으므로 하루아침에 200억 달러에 해당하는 바트화 부담이 커진 것이다.

게다가 타일랜드 은행은 외국 자본이 태국 국경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금리를 대폭 인상했다. 중앙은행이 시중은행에게 빌려주는 단기 자금의 금리, 즉 재할인율은 하루만에 2% 포인트나 올라 12.5%로 치솟았다. 태국에 돈을 빌려준 선진국 뱅커들은 높은 이자 혜택을 누리지만 돈을 빌려쓴 태국 은행과 기업들은 이자 갚기도 벅찼다.

 

태국 정부와 언론들은 이 모든 원인이 미국의 헤지펀드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공격해 오지 않았더라면 경제 개혁을 통해 단계적으로 대외채무를 해소하고, 경제병을 치유할 수 있었는데, 벌떼처럼 덤벼든 국제 단기자본의 습격에 치명상을 당했다는 것이다. 고도 성장국가로 경제기반(펀더멘털)이 좋은 나라가 갑자기 파국으로 간데 대한 분노의 화살은 국제 투기자본으로 날아갔다.

태국언론의 타깃은 월가의 큰손 조지 소로스의 헤지펀드의 퀀텀 펀드였다. 90년대초 영국 파운드화 폭락에서 단물을 빨아먹은 경험이 있는 소로스의 펀드는 40억 달러로 태국 시장을 공격했다고 현지 언론들은 보도했다.

이에 대해 소로스 사단의 사령관인 스탠리 드러큰밀러는 태국 언론의 주장을 부인했다.

“40억 달러를 베팅했다는 얘기는 대단히 과장됐다. 바트화 하락으로 큰 이득을 볼 것으로 기대했지만, 태국 중앙은행이 바트화 하락을 지연시키고, 역외 바트화 거래를 조이는 바람에 어려움을 겪었다. 바트화 전쟁에서 이긴 것은 타일랜드 은행이지, 투기자가 아니다. 많은 투기자들이 돈을 잃었고, 중앙은행은 투기자들의 투매를 전환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소로스 측은 그러나 자신의 펀드는 약간의 이득을 보았음을 인정했다.

 

차왈릿 도박의 성패는 외국자본의 이탈을 막고, 환율을 진정시킬지 여부에 달려있었다. 차왈릿이 비장의 카드를 던진 그날, 태국 증권거래소의 SET 지수는 7.9%나 폭등, 잠시나마 승리의 기대를 갖게 했다.

그러나 서방의 자본들은 차왈릿 총리의 도박을 대단히 위험하게 바라보았다. 한 펀드매니저는 󰡔그가 미쳤거나, 대단히 용감하거나 둘 중의 하나다󰡕고 말했다. 차왈릿 총리는 분열 직전의 연립 여당을 7개월째 이끌고 있었다. 외국 펀드들은 바트화가 더 떨어질 것으로 예측했다. 주식이나 채권, 외환시장에서 가격이 하락할 때 팔고, 상승할 때 사는 것은 투자자의 기본 원칙이다. 태국 중앙은행이 달러 보유자들에게 하루아침에 20%에 가까운 이상의 고수익을 보장했지만, 그들은 더 큰 것을 바라면서 태국 땅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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