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카르타 통신] 21세기에 발생한 '인도네시아 돼지요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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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카르타 통신] 21세기에 발생한 '인도네시아 돼지요괴' 사건
  • 배동선 자카르타 통신원
  • 승인 2021.05.08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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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속문화 발달했던 인도네시아 자바 데뽁지역의 실제 해프닝
'버다한 마을'에 빈번히 발생했던 재물 도난사건에 무속신화 더해져
마을청년들 알몸으로 돼지잡기도...알고보니 마을 종교지도자가 꾸민 자작극
배동선 자카르타 통신원
배동선 자카르타 통신원

[오피니언뉴스=배동선 자카르타 통신원] 코로나 팬데믹사태로 안그래도 힘든 요즘, 자카르타의 위성도시인 서부 자바 데뽁(Depok) 지역의 버다한(Bedahan) 마을에 지난 4월말 '흑돼지요괴' 출현이라는 기이한 사건이 발생,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자바지역의 오래된 전통풍습에 유명세를 누리고 싶은 지역 종교지도자의 그릇된 욕망이 빚어낸 이번 해프닝은 코로나로 인한 경제난, 청년층들의 실업난 등 사회적 불안요소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할 경우 언제든지 사람들이 미신에 쉽게 현혹당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남의 나라 일로만 치부할 수 없어 보인다.  

코로나로 민심 흉흉한 가운데 발생한 도난사건

해프닝이 발생한 버다한(Bedahan) 마을은 시간도 느릿느릿 흐르는 듯 한가한 동네였다. 하지만 1년 넘게 계속된 코로나 팬데믹에 더해 지난 몇 달간 여러 집에서 패물과 현금이 도난당하는 사건이 벌어져 민심이 흉흉해졌다. 

이 마을 사람들은 이게 모두 '바비응예뻿(Babi Ngepet)'의 소행이라 믿었다. 널리 알려진 전설속 요괴인 바비응예뻿은 한밤중에 나타나 이웃의 재산을 훔쳐간다는 '흑마술 도둑돼지'를 말한다.

실제로 버다한 마을에서 이 해프닝의 주인공인 흑돼지 요괴를 보겠다고 몰려든 수백 명의 인파가 모여들었고, 그 장면이 현지 주민 루크만 누르자말(Lukman Nurjamal)의 틱톡 계정을 통해 인도네시아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위키피디아
바비응예뻿. 사진= 위키피디아

'바비응예뻿'라는 자바섬 특유의 무속 스토리는 가난 때문에 싹튼 이웃에 대한 의심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숨길 수 없는 인간의 폭력성을 드러내고 있다. 자카르타 관광문화국에서 엮어 출간한 버타위(Betawi-자카르타 및 인근 지역) 민속서에 따르면 '바비응예뻿'에 얽힌 설화는 이렇다. 

하루는 하루는 한 쌍의 부부가 두꾼(dukun)이라 불리는 무당을 찾아가 자식 같은 가깝고 소중한 사람의 목숨을 바치는 대신 흑마술의 힘을 얻고자 했다. 두꾼을 통해 공물을 바치고 소원을 빌면 돼지요괴가 현신한다. 돼지요괴의 타액을 얻어 집에 돌아가 아직 2차 성징을 보이지 않은 아이의 몸에 바르면 아이는 시름시름 앓다가 죽으면서 돼지요괴에게 제물로 바쳐진 것이다. 대신 부부중 남편은 도둑돼지인 바비응예뻿으로 변신하는 능력을 갖게 된다.

밤이 깊은 후 주머니가 많이 달린 검정색 망토를 걸친 남편이 주문을 외워 멧돼지로 변한 뒤에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집집마다 담벼락에 몸을 긁어 댄다. 그러면 그 집안의 값나가는 패물과 현금이 망토 안 주머니 속으로 저절로 빨려 들어온다고 한다. 최근의 '도난 사건'이 이렇게 전설과 연결됐던 것. 

현지 역사가인 크리스토퍼 레인하트(Christopher Reinhart)는 "바비응예뻿 전설은 식민지시대 인도네시아의 농경사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당시 농부들이 벼락부자가 되는 방법으로 자신들을 수탈하던 총독부 관리들이나 네덜란드인들과 결탁해 고리대금업자가 되거나 사채브로커가 되는 길뿐이었다. 그래서 갑자기 경제적 상황이 좋아지는 이웃 농부를 보면 악마의 친구가 되어 흑마술을 부려 재물을 모았다고 경멸했다는 것이다.

식민지시대가 끝난 후에도 빈곤, 사회적 불평등, 계층간 이동의 어려움 등의 문제가 그대로 남아 이웃의 재물을 훔쳐가는 바비응예뻿이나 아기 모습의 도둑귀신 '뚜율(Tuyul)', 후손들이 갖게 될 미래의 부를 현세로 훔쳐오는 마물 '부토이조(Buto Ijo)' 등 재물과 관련한 악마들의 전설과 도시괴담이 이슬람의 수면 밑 인도네시아인들의 무의식 속에서 몸집을 키웠다.

유사한 사건도 다수 발생...실제는 단순 사건

2020년 7월에도 데뽁 지역에서 이런 요괴전설이 얽힌 멧돼지와 관련한 소동이 일어났다. 이 지역의 수크마자야(Sukmajaya) 주택지에서 멧돼지 한 마리가 CCTV에 찍혔는데 사람들은 그때에도 바비응예뻿이라며 한바탕 난리를 쳤다. 앞서 2019년에도 중부 자바의 수라카르타(Surakarta), 동부 자바의 좀방(Jombang)에서 벌어진 일련의 도난사건도 바비응예뻿의 소행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좀방과 수라카르타의 집들을 턴 것은, 솜씨 놓은 인간도둑들이었고 수크마자야 CCTV에 찍힌 것은 현지 주민이 키우다가 우리를 탈출한 몽구스였던 것으로 확인되기도 했다.  

사회학자 바공 수얀토(Bagong Suyanto)는 "이른바 바비응예뻿 사건이 자주 등장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취약한 지역공동체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파국과 그로 인한 빈곤으로의 추락에 대한 집단적 공포가 투영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사회 상위계층으로 진입할 방법이 없는 이들에게 이런 주술이 지름길처럼 보이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 직업교육, 기술습득 같은 정상적 방법 대신 즉시 계층간 사다리를 타고 오를 '비정상적' 방법에 열광한다는 것이다. 

이슬라미닷코(islami.co)에 실린 데폭지역의 흑마술 도둑돼지 포획장면 만평.
이슬라미닷코(islami.co)에 실린 데폭지역의 흑마술 도둑돼지 포획장면 만평.

데뽁 지역 '흑돼지 요괴'사건의 전말은

지난 4월 말 이번 사건이 벌어진 인도네시아 데폭 지역에 이런 절망이 실존하고 있었다. 수도 자카르타에서 20㎞ 정도 떨어진 데폭은 이번 팬데믹으로 경제적 파국을 맞았고, 지난 2월말엔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많은 신규확진자를 내기도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런 상황에서 바비응예뻿까지 마을을 휘젓고 다닌다면 그건 가장 두려워하던 상황일 수 밖에 없었다. 

CNN인도네시아 보도에 따르면 이 당시 아담 이브라힘(Adam Ibrahim)이란 우즈탓(ustad=이슬람 교사)이 데뽁 사왕안(Sawangan)구(區) 버다한 마을에서 도둑돼지를 잡았는데 마을 주민들이 구경하러 왔을 때엔 털덩어리만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고 주장했다. 

이브라힘은 바비응예뻿을 제대로 잡으려면 모든 사람들이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고 알몸으로 돼지를 덮쳐야 한다면서 어느날 밤 용감하고 힘센 주민 여덟 명을 발가벗겨 돼지를 쫓아 포획틀로 몰아넣고 그 지역 종교지도자의 영력이 깃든 겉옷으로 멧돼지를 감싸 잡았다. 마침내 도둑돼지 포획에 성공한 것이다. 

다음날 새벽 수백 명의 마을 사람들이 잡힌 요괴를 보려고 그의 집에 구름처럼 모여들었고 이 소식은 소셜미디어를 타고 들불처럼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이 사건을 수사한 사왕안 경찰서장인 리오 또빙(Rio Tobing) 경위장은 그 돼지가 흑마술에 의한 것도, 인간이 변신한 것도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발표했지만 사람들은 그의 설명은 일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버다한 마을은 이 기이한 돼지를 보러 몰려올 호기심 많은 사람들의 성지가 될 판이었지만, 팬데믹 상황에 많은 외지인들이 몰려드는 것을 꺼린 마을 사람들은 돼지를 죽여 파묻었다. 흑마술로 돼지가 되살아날 것을 우려해 머리를 잘라 따로 묻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우스탓 이브라힘은 멧돼지로 변한 도둑의 가족이 아들의 시신을 가져가기로 서로 약속했음을 공개했다. 바비응예뻿이 죽어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면 원래의 사람 모습으로 돌아간다는 바비응예뻿 전설 그대로였던 것.  

하지만 다음날 아침 경찰들이 버다한 마을에 들어와 매장한 돼지 시체를 발굴해 갔다. 그 안에 있던 건 사람 모습으로 돌아간 도둑이 아니라 이미 썩기 시작한 작은 멧돼지였을 뿐이다. 

여기서 생각지도 않은 반전이 벌어졌다. 이브라힘이라는 우스탓이 사건을 조작한 게 아니냐는 의심이 일기 시작한 것. 이브라힘은 처음으로 주민들에게 바비응예뻿이 돌아다닌다며 경계심을 품게했고, 알몸 포획작전을 진두지휘한 사람이었다. 

경찰이 심문을 시작하자마자 그는 간단히 모든 것을 자백했다. 자신이 종교적 명성을 떨치기 위해 스스로 꾸민 자작극이라고 실토했다. 그는 당시 마을에 횡횡하던 도난사건을 지역사회에서 자신의 명성을 높일 절호의 기회로 보았던 것이다. 

그는 친구의 도움을 받아 소셜미디어를 통해 동물애호가 그룹으로부터 새끼돼지 한 마리를 90만 루피아(약 7만 원)에 사와 집에 만들어둔 우리 속에 은밀히 숨겨두었다. 

그런 후 사냥이 벌어진 날 밤, 그는 돼지를 풀어놓고 자신도 알몸이 되어 돼지를 잡으러 온동네를 죽어라 달렸던 것이다. 

알고보니 종교지도자의 자작극..."더 유명해지고 싶어서"

“그는 더 유명해지고 싶었던 겁니다. 그는 이미 마을에서 존경받는 이슬람 교리선생이었어요. 하지만 그리 유명하진 않았죠. 그는 이번 일을 벌여 세간의 주목을 끌려 했어요.” 경찰청장인 임란 에드윈 시레가르(Imran Edwin Siregar)는 이렇게 말하며 혀를 찼다. 알몸으로 돼지를 잡아야 한다는 기묘한 디테일도 모두 이브라힘의 상상력의 산물이었다.

가짜 흑마술 도둑돼지 사건을 자작해 데폭 식에 체포된 아담 이브라힘. 출처 =tribunenews.com
가짜 흑마술 도둑돼지 사건을 자작해 데폭 식에 체포된 아담 이브라힘(가운데). 출처 =tribunenews.com

이런 류의 이야기들 말로가 늘 그렇듯 이번 버다한 마을의 기묘한 '흑마술 도둑돼지 사건'도 사실은 경제난과 거짓, 그리고 덧없는 욕망이 빚은 한바탕 코미디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 배동선 자카르타 통신원은 1995년 당시 (주)한화 무역부문 주재원으로 인도네시아에 입성했다. 2016년 제18회 재외동포문학상 소설부문 수상했다. 한국영화진흥위원회 인도네시아 통신원을 지냈고, 재인도네시아 한인 100년사 편찬위원회 공동 총괄편찬위원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수카르노와 인도네시아 현대사>가 있고, 한국외대 양승윤 명예교수와 함께 <막스 하벨라르>를 공동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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