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부를 찾아서] 실직국③…안일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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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부를 찾아서] 실직국③…안일왕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1.12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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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의 마지막 왕…경북 울진에 전설만 남아

사료에 희미하게 나타나는 실직국의 모습을 완전 복원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다만 고고학적 연구업적이 살을 보태고, 삼척, 강릉, 울진 일대의 지형지물을 살펴보면서 실직국의 윤곽을 그려보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실직국의 강역은 북쪽으로 강원도 강릉시 옥계면에서 경북 동해안인 영덕에 이르는 동해안 해상왕국이었다. 서쪽으로는 백두대간(白頭大幹)과 낙동정맥(洛東正脈)이 흐르고, 그 사이 바다 쪽으로 뻗친 지맥 사이로 소하천이 형성되고 있다. 실직국은 강원도 남부에서 경북 북부에 이르는 동해안에 좁고 길게 연맹체를 형성했다. 안데스 산맥(Andes Mts.)에 가로막혀 길쭉하게 국토를 형성하고 있는 남미의 칠레를 연상케 한다.

동해안 유적을 살펴보면 실직국은 해상왕국으로서 북의 옥저, 남의 진한, 변한을 연결하며 중계무역으로 번성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강릉 교황리 유적에서 철 생산과 관련 있는 유구가 출토되고, 동해 망상동과 송정동 유적에서 송풍 파편이 발견됐다. 이는 실직국이 금관국의 철기를 수입해 자체적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북쪽의 예국에 수출한 사실을 입증하고 있는 셈이다. 실직국의 수출품은 어물과 소금, 임산물 등이 아니었을까. 강릉 유적지에서는 중국 한대(漢代)의 오수전이 발견되는데, 동해안 해로가 오래전부터 운영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증거다.

고려조 이승휴가 남긴 기록에도 있듯이 삼척, 울진 등지에서는 맑은 날에 울릉도가 보이고, 울릉도에서도 육지가 보인다고 한다. 따라서 실직국과 우산국 사이에도 교역이 있었고, 실직인들은 삼척에서 울릉도까지의 해로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기록상으로 이사부가 실직주 군주가 되기 300년 전에 실직국은 이미 존재했다. 실직국은 동해를 장악한 고대 해상왕국이었고, 실직국인들은 해류와 해풍의 방행과 이용법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박 제조술은 물론 발달한 항해술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신라는 숱하게 왜의 침공을 받아 왔기 때문에 제해권의 중요성을 일찍이 깨달았다. 때문에 지증왕이 가장 신뢰하는 왕족을 실직 군주로 보낸 것은 동해의 제해권을 장악하라는 뜻이었다. 실직국은 멸망했지만, 그 후예들이 보존해 온 선박 제조술, 항해술은 나중에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하는 데 충분히 활용됐을 것이 분명하다.

▲ 지명으로 남아있는 경북 일진의 안일왕산. 해동지도. /삼척시청 자료

 

안일왕 전설

실직 왕국의 전설은 살아남은 백성들 사이에서 이어져,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동해안 일대에 남아 있다. 삼척문화원 웹사이트에 기록되어 있는 경북 울진군 서면 왕피리(王避里)의 실직국왕 전설을 소개해 보기로 한다.

 

지금부터 2천여 년 전 동해안에는 강릉 지역의 예국(濊國), 삼척 지역의 실직국(悉直國), 울진 지역의 파조국(波朝國) 또는 파단국(波但國)이라 불린 군장국가가 공존해 있었는데, 이들 세 나라를 통칭해 ‘창해삼국(滄海三國)’이라 불렀다. 철기시대를 맞아 다량의 청동제 및 철제 무기를 소유한 이들 세 나라는 영역 확장을 위한 전쟁을 하게 되고, 기원후 50년경이 되면 마침내 삼척의 실직국이 울진의 파조국을 침공해 합병하게 된다. 그로부터 10년 후 실직국은 강릉의 예국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안일왕(安逸王)은 울진으로 피난하여 산성을 쌓고 방비를 했다. 이 산성은 안일왕이 피난 와서 축조한 성城)라 하여 ‘안일왕산성(安逸王山城)’이라 부르는데 경북 울진군 서면 소광리에 가면 지금도 정상부에 산성의 형태가 잘 남아 있다. (중략) 실직국의 왕 가운데 유일하게 그 이름이 남아 있는 안일왕은 울진 지역에서만큼은 안일왕보다 ‘에밀왕’으로 불린다. 그곳의 70∼80대 노인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어릴 적에 울음보를 터뜨리면 어른들이 “예(濊) 나온다, 그쳐라”, “예 쳐온다, 그쳐라” 하고 달랬다고 한다. 즉 강릉의 예국이 쳐들어오니까 울음을 그치라는 뜻이다. 안일왕산성 주변의 통고산(通高山)은 안일왕이 이 산을 넘으면서 하도 재가 높아 통곡했다 해서 ‘통고산’이라 한다. 삿갓봉의 복두괘현(僕頭掛縣, ‘박달재’라고도 함)은 안일왕산성이 함락되자 안일왕이 신하와 옷을 바꿔 입고 도망가다가 이곳에서 복두, 즉 임금이 쓰던 모자를 벗어 놓고 샘물을 마시던 중 적군의 추적이 가까워지자 미처 걸어 놓은 복두를 쓰지 못하고 도망간 곳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울진군 서면 왕피리는 임금이 피신했던 곳, 병위동(또는 병우동)은 안일왕의 군사가 머물렀던 곳, 포전(飽田)은 왕이 피난 당시 군속과 같이 갈증을 풀고 포식한 곳, 임광터(또는 임왕기)는 임금이 앉아 쉬던 곳, 핏골은 왕이 적에게 붙잡힌 곳, 거리곡은 실직국의 군량미를 저장하는 창고가 있었던 곳이라 해서 그런 지명이 붙여졌다는 유래가 전해져 오고 있다.

 

2000년 전 실직국의 숨결이 경북 울진에서 설화와 지명의 형태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실직국의 중심지였던 삼척보다 울진 지역에 실직국 설화가 잘 남아 있는 것은 울진 지역의 지형적 고립성 때문으로 해석된다.

신라 파사왕 때 멸망한 실직국을 건설한 사람은 실직인, 부족을 ‘실직씨’라 불렀는데, 지금은 그 성씨가 남아 있지 않다. 잃어버린 왕국의 후손은 어찌 성씨를 쓸 수 있으랴. 일부에서는 울진 ‘봉평신라비’를 해석해 실직국 부흥운동이 벌어졌다고 주장하는데, 딱히 동의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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