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동열의 콘텐츠연대기] ㉘ 한국의 대중문화와 콘텐츠 산업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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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열의 콘텐츠연대기] ㉘ 한국의 대중문화와 콘텐츠 산업 (下)
  • 문동열 레드브로스대표
  • 승인 2021.04.26 16: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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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초 민초부터 시작한 한국의 대중문화
오늘날 BTS, 윤여정, 봉준호, 박찬욱, 임권택 탄생 밑거름
문동열 레드브로스 대표.
문동열 레드브로스 대표.

[문동열 레드브로스 대표] 20세기초 조선이 무너지고 일제 강점기로 넘어가는 시점. 무너져 내린 조선왕조 사회이자 대한제국에서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았던 모던 세대들이야 말로 한국 콘텐츠 산업의 선구자들이었다.

이들은 결국 오늘 대한민국의 BTS, 윤여정, 봉준호, 박찬욱, 임권택 등등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 쇄국 정책을 고집하며 외부 문물들을 거부했던 조선이었지만, 그 뒤를 이은 대한제국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문호를 개방하고 세계의 여러 문물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활동 사진이라 불리는 영화에서부터 커다란 나팔이 붙은 기계에 검고 동그란 원판을 넣으면 소리가 나는 축음기까지, 전등이나 전차, 전화 같은 것들도 신기했지만, 대중들은 생전 보지도 못한 새로운 서양 문물에 빠져들게 되었다.

신문이나 길거리의 포스터는 연일 새로운 대중 문화들을 홍보하기에 바빴고, 새로운 대중 문화를 향유하는 그 모습 자체가 하나의 새로운 트렌드이며 부의 상징이 되는 사회 현상까지 나타났다. 1910년대는 한국 역사에서 보면 수치와 치욕의 시기지만, 한국 현대 콘텐츠 산업의 역사로 볼 때는 지금의 거대한 한국 콘텐츠 산업의 태동이 있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당시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았던 모던 세대들이야 말로 한국 콘텐츠 산업의 선구자들이었다. 사진은 당시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모던세대 풍자 비평. 사진출처=위키피디아.
당시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았던 모던 세대들이야 말로 한국 콘텐츠 산업의 선구자들이었다. 사진은 당시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모던세대 풍자 비평. 사진출처=위키피디아.

한국 현대 음악 사업의 시작

한국 현대 콘텐츠 산업의 시작의 순간은 보는 시각이나 시작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지만, 보통은 1907년 최초의 상업용 유성기 음반이 만들어진 시기로 보는 견해가 많다. 지금은 세계 곳곳에서 울려 퍼지고 있는 K-POP의 원조격이라 할 수 있는 이 음반은 경기명창 한인오와 관기(官妓) 최홍매가 취입한 국악 음반이다.

주로 경기잡가, 유산가, 양산도, 가사 황계사 등 당시에 유행했던 전통 음악과 유행가, 신 민요등이 담긴 이 음반은 당시 한국에 녹음 시설이 없어 가수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취입을 하고, 원반(原盤)을 미국에 보내 음반으로 찍은 뒤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판매되었다. 이 음반은 최초의 상업용 음반이라는 점 외에 한국에서 본격적인 대중 음악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의미를 지닌다.

이들 최초의 대중음악 가수들은 주로 명창들이나 기생들이 맡았는데, 기생들이 가수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은 대중들이 당시 선호하던 잡가(雜歌)를 전문적으로 불렀던 것이 당시의 기생들이었기 때문이었다.

2018년 한 골동품 상에서 발견된 한국 최초의 상업용 유성기 음반 ‘매화사'. 사진출처=위키피디아.
2018년 한 골동품 상에서 발견된 한국 최초의 상업용 유성기 음반 ‘매화사'. 사진출처=위키피디아.

판소리나 전통 민요의 수요도 있었지만 당시 유행하던 기생들의 잡가들은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끌게 되었고, 이를 중심으로 한 미국이나 일본 자본에 의한 상업용 음반 시장이 성장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소위 말하는 유행가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한국의 음악 시장이 성장하면서 1908년 미국 빅타 레코드는 기생이나 가객들을 모아 100여곡의 음반을 서울에서 취입하는 등 서서히 한국 내에서 제작 인프라를 갖추게 되면서 많은 음반들이 제작된다. 지금 와서 보면 이 시기의 음반들은 한국 음악사에 있어 아주 중요한 자료들이라 할 수 있다. 아직 일제 강점기에 들어가지 않은 시기였기에 일제에 의해 왜곡되지 않은 한국 전통 음악의 옛 모습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사료들이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의 시작과 한국 대중문화

1910년 한일합방이 이루어지고 일제 식민지배가 시작되면서 한국 대중 문화는 광복 전까지 일본 자본에 의해 예속되는 모습을 가지게 된다.

음반 시장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의 기술과 인프라를 일본 회사들이 가지고 있어서, 한국 자체의 콘텐츠를 만들 수 있는 환경은 없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전통 문화에 대해서는 강경한 입장을 취하는 일본 식민정책이 대중 문화까지는 간섭이 덜했기에 일본 자본과 일본 회사들이 한국 시장을 겨냥해 만드는 ‘조선 음반’들이 제작되어 대중들에게 전파되었다.

1919년 전국적인 만세 운동에 놀란 일본 총독부가 기존의 무단 통치 식민 정책을 변경하게 된다. 그 동안 조선의 독립 의지를 꺾기 위해 실시해왔던 조선인에 대한 차별을 완화하고 조선인에 대한 교육기회를 제공하는 등 이른바 ‘문화 통치’를 실시하게 된 것이다.

실상은 강압적 식민 통치에 대한 대외적인 이미지 개선을 노린 ‘눈 가리고 아웅’식의 보여주기 정책이기는 했지만, 대중 문화적으로 볼 때는 이전보다 다양한 계층의 많은 사람들에게 대중 문화가 전파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식민 정책의 변화로 인해 이른바 ‘모던 세대’라 불리는 새로운 세대들이 나타난다.

모던 세대들은 당시 20대를 주축으로 한 식민지 근대화를 경험한 세대들로 최근의 X세대나 밀레니얼 세대와 같이 기성 세대들과 구별되는 사고방식과 행동 양식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이들 모던 세대들은 대중문화에도 전향적인 태도를 보였다. 기성 세대들에게 퇴폐적이고 향락적이라 손가락질 받기는 했지만 이들은 적극적인 대중 문화 소비자이자, 콘텐츠 생산자들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만세보에 실린 축음기 광고. 사진출처=위키피디아.
일제강점기 만세보에 실린 축음기 광고. 사진출처=위키피디아.

모던 세대들이 만든 한국 대중문화의 기반

1920년대 나타나기 시작한 모던 세대들이 주로 활동한 곳은 서울의 남촌, 지금의 명동, 회현동 일대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 곳은 백화점과 카페, 그리고 신식 음식점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모던 세대들은 이 곳의 카페나 음식점에 모여 축음기로 최신 음악을 듣거나, 신문이나 책을 읽으며 인근 단성사에서 활동 사진을 보거나 했다.

이들이 만든 대중 문화의 소비 시장은 인천, 부산 등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서서히 번지게 되면서 이를 노린 일본 회사들이 본격적으로 한국 시장 공략에 나서며 지금의 한국 대중 문화의 기반이 조성되게 된다.

모던 세대에 대한 평가는 그때도 지금도 마찬가지로 엇갈리는 부분이 있다. 당시의 모던 세대들은 이전 조선에서 천시되어 오던 ‘물신주의’와 ‘황금 만능 주의’에 찌든 속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영화를 보고 패션을 따라하거나 영화에 나온 ‘과장된’ 연기를 실제 서양인들의 행동으로 착각하고 그것을 그대로 모방하는 일부 모던 세대들의 몰지각한 무조건 서양 따라하기에 당시 많은 지식인들이 나라가 망하니 젊은이들이 썩어간다고 개탄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모던 세대들이 만들어 낸 다양한 ‘조선’ 대중 문화들은 우리 문화가 일본 식민 지배 기간 동안 일본 문화에 완전 흡수되지 않게 막아주는 역할을 했다.

장엄한 독립 운동까지는 아니지만 지금의 한국 대중 문화의 기반을 만드는데 이들 모던 세대들의 공이 컸다는 점은 인정해줄 수 있지 않을까.

●문동열 레드브로스 대표는 일본 게이오대학 대학원에서 미디어 디자인을 전공하고, LG인터넷, SBS콘텐츠 허브, IBK 기업은행 문화콘텐츠 금융부 등에서 방송, 게임, 영화 등 다양한 콘텐츠 기획 및 제작을 해왔다. 콘텐츠 제작과 금융 시스템에 정통한 콘텐츠 산업 전문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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