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소 다로가 믿는 구석은“…20년전 IMF 위기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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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소 다로가 믿는 구석은“…20년전 IMF 위기의 기억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1.11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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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말 일본계 자금이 대량 탈주로 외환 위기 촉발

아소 다로(麻生太郞) 일본 부총리 겸 재무상이 한일 통화스와프 문제를 거론하면서 통화스와프 체결에 따라 한국에 돈을 빌려줬다가 돌려받지 못할 수도 있다고 말해 우리나라 사람들이 불쾌해 하고 있다.

그는 지난 10일 각의 후 기자들과 만나 "(통화스와프 협상은) 돈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신뢰관계로 이뤄지는 것"이라며 "(위안부 합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빌려준 돈도 돌려받지 못할 것이다. 통화 스와프 따위도 지켜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된다"고 주장했다. 아소 재무상의 발언은 부산 일본 총영사관 앞에 위안부 소녀상이 설치된 데 대한 보복 조치 일환으로 일본이 한일 통화스와프 협상을 중단한 것을 설명하면서 나왔다.

이에 외교부 당국자는 11일 아소 발언에 대해 "부적절한 발언으로서, 유감스럽다"며 "책임있는 정치인이라면 발언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통화스와프는 외환 위기 등 비상시에 상대국에 자국 통화를 맡기고 상대국 통화나 달러를 받도록 함으로써 상호 외환 유동성을 확보하기 위해 맺는 계약으로 국가간에 돈을 빌려주고 받는 차관과는 개념이 다르다. 따라서 아소의 발언이 "통화 스와프의 개념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게 아닌가“라는 게 우리측 주장이다.

하지만 뼈아픈 추억이 있다. 한국의 많은 사람들에겐 그 기억이 잊혀졌을지도 모른다. 바로 20년전 IMF 외환위기 때의 일이다. 아소 다로가 20년 후에 이런 말을 하는 배경에는 그때의 일을 되짚어 보라는 얘기일 것이다. 그때의 상황을 되돌아보자.

 

1997년말 일본은행들, 한국서 돈 떼일까 두려워 대탈주

1997년 여름. 태국 바트화, 말레이시아 링기트화, 필리핀 페소화가 도미노처럼 폭락했다. 홍콩 달러를 버티던 고정환율제가 휘청거렸다. 동남아시아에서 불어닥친 통화위기는 북상하며 그해 가을 한국 원화가 휘청거렸다.

당시 원화 폭락의 결정적인 원인은 일본 은행들이었다. 한국의 대외부채중 절반이 일본에서 빌려온 돈이었다. 외화자금중 한국에서 가장 먼저 빠져나간 것은 일본 차관이었다. 일본 은행들은 부실 여신으로 중병을 앓고 있었고, 한국에서마저 여신이 떼일 것을 두려워했다. 일본 은행들은 다른 선진국 은행들보다 옆집 사정을 잘 알았기 때문에 유럽이나 미국계 은행보다 한국을 더 옥죄어 왔다.

 

1997년 10월말 미국 투자회사인 골드만 삭스의 한 시장 분석가가 한국의 외환보유액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 월가 은행들에게 돌렸다. 보고서는 한국의 외환 보유액이 부족하기 때문에 태국처럼 IMF의 지원을 받을 가능성이 크며, 원화 환율이 3개월 내에 1달러당 1,150원, 12개월 내에 1,250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얼마후 메릴린치 증권도 비슷한 내용의 보고서를 돌렸다. 메릴린치나 골드만 삭스의 시장 전략가들이 내놓은 분석은 곧바로 시장을 움직인다. 곧이어 미국의 언론들은 이 분석을 토대로 한국의 외환 사정이 어렵고,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보도했다.

당시 재정경제원과 한국은행은 이런 정보를 무시했다. 오히려 한국 경제는 펀더멘털이 좋기 때문에 동남아 국가처럼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미국과 일본, 유럽등 외국 은행들은 월가 투자회사의 분석과 미국 언론보도를 근거로 한국 시장을 불안하게 바라보았고, 더 이상 손해를 보기 전에 돈을 빼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한국에서의 달러 엑소더스가 벌어진 것이다. 그후 원화는 월가의 분석보다 더 큰 폭으로 하락했고, 한국은 IMF에 손을 내밀지 않을 수 없게 됐다.

10월 27일, 그날은 월요일이었다. 국제 외환 투기자들이 홍콩 달러를 공략하자, 홍콩 당국은 단기 금리를 무려 300%까지 인상했고, 홍콩 증시의 항셍(恒生)주가는 이미 몇주째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뉴욕 월가도 흔들렸다. 월가의 블루칩 주가지수인 다우존스 지수는 사상 최대 낙폭인 554.26 포인트 (7.2%) 폭락했다. 10년전인 1987년 10월 19일 508 포인트 폭락했던 「블랙먼데이(Black Monday)」가 10년만에 재현된 것이다.

이날 뉴욕에 나와 있는 한국 시중은행 지점들은 하루종일 북새통을 치렀다. 월가에는 󰡔홍콩 다음이 한국이다󰡕는 루머가 지배했다. 외국계 은행들은 한국 시중은행과 기업에 빌려준 단기 자금을 일제히 회수하려고 덤벼들었다. 대출기간 3일 미만의 오버나이트 대출마저 끊어버렸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블랙먼데이」 이후 열흘동안 외국은행들은 한국에 대출한 단기 자금 수백억 달러를 회수한 것으로 분석된다. 아마 세계 역사에서 며칠 사이에 이렇게 많은 자금이 빠져나가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한 나라를 죽이기로 작정을 하지 않고는 이런 일이 있을 수 없다.

단기 자금은 하루짜리에서 만기 1년까지의 대출금을 말한다. 한국 금융기관과 재벌들은 짧은 만기로 돈을 빌려 계속 만기를 연장함으로써 장기로 사용해왔다. 그런데 외국은행들이 한꺼번에 자금을 회수하면 그 많은 돈을 어떻게 갚을 것인가. 외국 은행들은 우선 자기가 빌려준 돈을 떼이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에서 한국에서 대탈주를 단행했다. 천둥소리에 놀란 양떼들이 좁은 계곡을 서로 밀치며 도망치듯 외국은행들은 한국을 빠져나갔다.

한국 경제규모는 앞서 금융위기를 겪고 있는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의 경제력을 합친 규모이고, 세계 11위의 경제대국이었다. 동남아 경제는 핫머니의 공격에 의해 무너졌지만, 한국 경제는 선진국 은행들의 갑작스럽고, 일시적인 대탈주에 의해 붕괴됐다.

 

스위스 취리히에 본부를 두고 있는 국제금융연구소(IIF: Institute of International Finance)가 선진국 은행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해보니, 1997년 7월부터 그해 12월말까지 아시아를 빠져나간 자금은 1,000억 달러나 됐고, 한국을 빠져나간 자금은 이의 절반인 500억 달러나 됐다. 이 연구소는 이 자금이 구체적으로 언제 한국을 빠져나갔는지는 밝히지 않았으나, 국제금융계 인사들의 말을 종합하면 10월말에서 11월초에 집중된 것으로 보인다.

1997년 11월말 한국에서 가장 먼저 빠져나간 자금은 일본 엔화 차관이었다. 일본 은행들은 부실 여신으로 중병을 앓고 있었고, 한국에서마저 떼이면 어떻게 하나, 두려움에 사로 잡혔다. 일본 은행들은 결코 이웃 사촌이 아니었다. 일본 은행들은 다른 나라보다 옆집 사정을 잘 알았기 때문에 유럽이나 미국계 은행보다 한국을 더 죄어들어 왔다.

미국의 신용평가기관인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사의 국가신인도 담당인 존 체임버스씨는 1997년 9월에서 11월까지 3개월 동안 한국을 빠져나간 일본 자금이 90억 달러에 이를 것이라고 추산했다.

일본계 은행들이 왜 한국을 갑자기 빠져나갔을까. 한국 정부가 원화를 방어하지 못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한국 금융기관과 기업들의 해외부채 지불부담이 커져 지불불능상태에 이를 수도 있다는 우려에서였다.

국제금융시장은 탐욕(greed)과 공포(fear)가 지배한다. 은행들은 탐욕에 사로잡혀 황금알을 낳는 아시아로 몰려들었다가, 돈이 떼일 걱정이 생기자 황급히 빠져나갔다. 어쩌면 한국은 국제 은행들의 음모적 히스테리의 희생양이 되었다.

돈의 세계에서 채권자가 늘 왕이지만, 도덕적 관점에서 순식간에 채무자를 지급불능 상태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채권자의 잘못이다. 선진국 채권은행들은 뒤늦게 한국의 잘못을 집중 공격하며 좁은 탈출구를 향해 벌떼처럼 빠져나가 버렸다.

 

외국 은행들이 일시에 대출을 중단하고, 빌려준 돈을 회수하자, 한국 금융기관과 기업들의 달러 수요가 폭증했다. 국내 은행들은 외국에서 빌린 돈을 기업에 대출해 주었고, 기업은 그 돈으로 설비에 투자했는데, 갑자기 설비를 팔아 현찰로 바꿔 빚을 갚을 수 없었다. 그나마 외국 은행과 오랫동안 거래해온 시중은행들은 근근히 달러를 굴릴 수 있었으나, 해외 채무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었다. 신용이 낮았던 종금사는 문을 닫을 길 외에 도리가 없었다. 10월말 현재 종금사들의 대외부채는 모두 200억 달러였고, 이중 65%인 129억 달러는 단기 외채였다.

정부가 시중은행으로 하여금 종금사에 달러 공급을 하라고 지시했으나, 시중은행은 자기 살기 바쁜데 어떻게 남을 도울 여력이 없었다. 정부는 한국은행에 비상시를 위해 쌓아놓은 외환보유액을 풀기 시작했다.

11월초가 되면서 1년 앞을 내다보고 거래되는 국제선물환 시장에서 원화는 31% 절하된 상태에서 거래됐다. 외환 보유액에 바닥이 드러나서야 정부는 외환거래 밴드를 풀었고, IMF의 요구로 금리를 인상했다. 원화 환율은 2,000대까지 곤두박질쳤고, 한국 경제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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