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부를 찾아서] 실직군주②…동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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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부를 찾아서] 실직군주②…동해왕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01.06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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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에 지방 총사령관으로 부임…동해안 육지와 바다를 통제

이사부가 실직 군주가 되었을 때 몇 살이었을까. 이사부의 업적은 삼국사기에 여러 차례 등장하지만, 언제 태어나 언제 죽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그렇지만 삼국사기를 토대로 그의 생몰연대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이사부의 활약 시기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실직 군주에 부임한 505년부터 대가야를 함락한 562년까지 57년간이다. 지증왕이 최고 전략지로 선택한 실직의 군주로 이사부를 파견할 때 나이는 적어도 성년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삼국사기 열전에 화랑 사다함이 15~16세에 종군하기를 청하였는데, 왕이 나이가 너무 어리므로 하락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비춰보면 한 지역을 관장하는 군사 책임자로서 20세는 넘었을 것이다. 20대 초라면 한창 팔팔할 나이다. 지증왕은 처음으로 설치한 속주(실직주)의 군주 자리에 20대 젊은 왕족을 임명한 것이다. 그곳은 수도 서라벌에서 약 180㎞(450리) 떨어진 변경이어서 측근을 보내야 했다.

삼국시대 초기 강원도 영동지방에는 예(濊), 실직(悉直), 말갈(靺鞨) 등의 부족국가들이 존재했다. 2세기 초 파사왕 때 신라는 독립국이던 실직국(悉直國)을 정복했다. 이후 영동지방은 예와 말갈의 공격을 수차례 받았고, 4세기 이후 고구려가 영동지역에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이들 소부족을 놓고 두 나라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백제는 한강 유역에서 발원했기 때문에 서쪽에서 고구려와 대치했지만, 경상도 동부지역에서 출발한 신라는 동해안에서 고구려와 그 예하의 부족들과 영토 전쟁을 벌였다.

신라가 강원도 동해안에 대한 지배체제를 구축한 것은 4세기 중엽으로 파악되고 있다. 하지만 이 시기에도 완전하게 신라의 영토로 굳어진 것은 아니었다. 땅을 뺏긴 부족과 그 배후의 고구려가 수시로 동해안을 침략해 왔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내물이사금 40년(395년) 가을 8월, 말갈이 북쪽 변경을 침범했다. 병사를 보내 실직(悉直)의 벌판에서 그들을 크게 쳐부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4세기 말에도 삼척 일대가 신라, 고구려, 말갈의 영토 쟁탈지였음을 보여 준다.

신라가 강원도 영동지방까지 영토를 확대한 것은 잠깐이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신라의 요청으로 군사 5만을 동원해 가야까지 진군하면서 신라는 동해안에 대한 영향력을 잃게 된다. 신라는 왕족인 실성(實聖)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면서 경북 흥해까지 동해안 영토를 고구려에 내주게 된다.

신라가 힘을 다시 회복한 5세기 중엽 이후엔 강원도 동해안을 놓고 신라와 고구려 사이에 밀고 밀리는 각축전이 전개된다. 전투 구역은 북으로는 비열성(함경남도 안변)에서 남으로는 미질부(경상북도 포항시 흥해)까지였다. 그 중심에 실직(삼척)과 하슬라(강릉)가 있었다.

 

① 고구려의 변방을 지키는 장수가 실직(삼척)의 들에서 사냥하고 있었는데, 하슬라성(何瑟羅城, 강릉)의 성주 삼직(三直)이 병사를 내어 습격해 그를 죽였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눌지 34년, 450년 7월)

② 임금이 비열성(比列城, 안변)에 행차해 병사들을 위로하고 군복을 내려줬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소지 3년, 481년 2월)

③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북쪽 변경에 쳐들어와 호명(狐鳴) 등 일곱 성을 빼앗고, 또 미질부(彌秩夫, 흥해)에 진군했다. 우리 병사가 백제, 가야의 구원병과 함께 길을 나누어서 그들을 막았다. 적이 패하여 물러가자 니하(尼河, 강릉 근처로 추정)의 서쪽까지 추격하여 쳐부수고 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소지 3년, 481년 4월)

 

450년부터 481년까지 30년 이상, 함경남도 안변에서 경상북도 흥해까지 동해 1천 리 바닷가에서는 고구려군과 신라군의 혈투가 벌어졌다. 고구려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른 눌지마립간은 재위 후반기에 고구려와의 우호관계를 깨고 영동지방에 대한 지배권을 되찾기 위해 공격을 개시했다. 소지왕 시대에는 고구려는 예와 말갈을 연합 세력에 끌어들여 영동지방을 침공했고, 이에 신라는 백제와 가야의 지원을 얻어 고구려에 대항하는 다국적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 삼척시 오분동에 위치한 이사부장군 우산국복속기념비 /사진=김인영

 

실직 군주의 임무

이사부가 실직 군주로 부임한 시기는 소지왕이 함경도 안변까지 갔다가, 곧이어 고구려가 반격해 포항 흥해까지 밀고 오는 대혈투가 벌어진 뒤 그 상흔이 남아 있던 때였다. 신라 입장에서 동해안을 따라 영토를 확대하고 고구려와 말갈 연합군의 공세를 막아내는 것이 중요했다. 이사부가 실직 군주로 가기 한 해 전에 신라는 동해안 일대의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흥해에서 삼척까지 대대적으로 성을 구축한다.

 

“지증왕 5년(504년), 파리(波里), 미실(彌實), 진덕(珍德), 골화(骨火) 등 열두 개 성을 쌓았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파리는 지금의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미실은 포항시 흥해읍으로, 지증왕 초기에 동해안 일대에 신라 성들이 줄지어 건축된다. 일종의 해안 방어망이다. 지증왕이 이사부를 실직의 군주로 보내기 앞서 해안선 경비를 강화한 것이다.

이사부가 실직 군주로 부임했을 때 신라는 하슬라에 대한 지배를 공고히 다지지 못했다. 따라서 지증왕은 이사부를 실직에 보내 그곳을 북진의 전초기지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사부는 505년 실직 군주에서 512년 하슬라 군주로 부임지를 변경하는데, 이 7년 사이에 신라의 동해안 영역이 삼척에서 강릉으로 확대되고, 울릉도 정벌을 위한 준비를 한 것으로 파악된다.

당시 영동지역에 오랫동안 터를 닦아 온 원주민인 예족과 말갈족이 고구려에 붙어 신라에 적대적이었다. 정복당한 실직국인들은 동족인 예족의 움직임에 민감하게 대응했을 것이다. 고구려와 말갈이 단숨에 서라벌 인근인 미질부성(흥해)까지 밀고 내려올 때 그 중간에 있던 실직 원주민의 협조가 있었을 것이다. 소지왕 때 전투에 승리해 간신히 영동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했지만, 언제 고구려에 동조해 반란을 일으킬지 모르는 시기였다.

지증왕이 국가체제를 정비해 주군현(州郡縣) 제도를 만들고 실직주에 처음으로 군주(軍主)를 둔 것은 전략적으로 동해안에 대한 고구려의 침공을 막고, 영동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겠다는 의지를 보여 준 것이다. 그곳에 첫 군주로 보낸 인물은 가장 믿을 만한 조카 이사부였다.

그러면 군주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말 그대로 군대의 수장이다. 이사부가 실직 군주가 되고 19년 후인 법흥왕 11년(524년)에 세워진 ‘울진 봉평신라비’에는 실지군주(悉支軍主)와 실지도사(悉支道使)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실지’는 ‘실직’을 말한다). ‘도사(道使)’라는 표현은 이사부가 실직 군주로 파견되기 직전인 501년(지증 2년)과 503년(지증 4년)에 각각 세워진 ‘포항 중성리비’와 ‘영일 냉수리비’에도 등장한다. 도사는 현지에서 세금을 걷고 백성의 관리하는 행정직이다. 이에 비해 군주는 외적의 침공을 막고 때론 공세적으로 주변을 공략하는 전투 조직의 수장을 의미한다. 신라는 외직을 임명할 때 군사직과 행정직을 나눠 운용했다. 신라가 삼척 일대 동해안을 영토화하면서 서라벌 출신의 ‘왕경인(王京人)’ 행정관을 보내 직할통치를 했음을 의미한다.

이사부가 실직 군주로 갈 때, 이사부와는 별도로 누군가를 실직 도사에 임명해 파견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 도사는 실직주의 행정을 관할하고, 이사부는 서라벌에서 파견한 군대를 관장하는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이사부는 현지인으로 구성된 군을 관할했다기보다, 중앙에서 파견한 군을 맡았고, 병졸 또는 하위직에 현지인을 썼을 것이다.

신라시대에 경주에서 삼척까지 사람을 보내 연통을 넣거나 물자를 실어올 때 적어도 몇 주는 걸렸다. 또 다른 왕경인이 실직 도사를 맡았더라도 왕족 가운데서 최고의 실력자가 국경에 부임했으므로, 왕국 수도의 지시, 보고 없이도 통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을 것이다. 이사부는 동해안 일대와 동해 바다를 관장하는 육군과 해군의 최고 사령관이었고, 식민지 총독으로서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후세는 그를 ‘동해왕’이라고 부른다.

 

실직은 동해 제해권의 거점

이사부는 실직 군주로 부임하면서 어떤 길로 왔을까. 삼척군지(三陟郡志)에는 이사부가 가장 처음 실직에 부임했을 때 “수륙군(水陸軍)을 동원하여 오십천 하구로 상륙하였다”로 기록돼 있다. 김태수 삼척문화예술센터 소장(국학박사)은 “이사부가 실직 군주로 부임해 올 때 해로로 왔다는 것이 정설”이라는 의견을 주었다.

경주에서 삼척까지 육로는 험난하다. 동해안을 따라가면 곳곳에 해안절벽이 가로막고 있고, 경상도 내륙을 거쳐 태백산을 넘어가는 길은 그 당시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길은 하나밖에 없다. 바닷길이다. 이사부가 실직 군주로 임명되던 해 겨울, 지증왕이 선박 이용제도를 개편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신라가 강원도와 경상도 일대의 동해안을 직할통치하고, 나아가 울릉도를 복속시킴으로써 왜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한 사전준비였을 가능성이 높다.

삼척은 동해안 교역로의 중심에 있었다. 신라에 의해 멸망한 실직국은 멀리 남해안의 금관가야에서 북으로는 옥저, 예국까지 철광석을 무역하는 해상왕국이었다. 실직인들은 선박 건조 능력은 물론 항해술도 뛰어났다.

삼국시대 초기에 함경남도에서 강원도, 경상북도에 이르는 동해안 일대는 동이(東夷)족의 한 갈래인 예족)濊族)이 지배하고 있던 곳이었다. 함경남도 안변에서 강원도 속초, 강릉, 삼척, 경상북도 울진, 영해에 이르는 지역이다. 이사부가 실직 군주로 부임했을 때 신라와 예국의 경계선은 삼척과 강릉 사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사부가 실직에서 하슬라로 임지를 바꾼 505년에서 512년 사이 7년 동안 그의 공적을 언급한 사료는 아직 찾을 수 없다. 하지만 당시 이사부는 우산국을 공략하기에 앞서 삼척에서 강릉 이북까지 내지화(內地化)하고, 북쪽으로 양양, 서쪽으로는 태백산맥을 넘어 평창으로 추정되는 니하泥河를 재탈환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신라군을 강릉까지 밀어붙인 후 이사부의 다음 목표는 왜(倭)와 연합해 신라에 저항하는 우산국을 정벌하는 것이었다. 동해를 내해화(內海化)하기 위한 것이다. 그동안 동해는 신라의 바다라고 할 수 없었다. 지증왕 이전인 소지왕 시대까지 왜는 수시로 안방처럼 신라를 공격했고, 왕성인 금성(金城)을 포위해 노략질하며 무고한 백성들을 살상하거나 끌고 갔다. 결과적으로 지증왕의 뜻은 왜구 소탕에 있었다. 드디어 이사부는 임금의 뜻을 받잡아 동해로 눈을 돌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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