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5월 혁명, 보수 결집이 좌파 막았다
상태바
프랑스 5월 혁명, 보수 결집이 좌파 막았다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6.12.19 18: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드골 하야 시위에 맞서 맞불 집회…총선·대선서 보수당 압승

요즘 정국 상황을 1968년 프랑스에서 발생한 대규모 시위 이후의 정치현상과 비교하는 분석이 많다. 이른바 「퐁피두 현상」이다.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전 비상대책위 대표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1969년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이 파리 시민들 때문에 물러났을 당시 10년 지속된 드골 정권이 물러나니까 다들 자연적으로 야당으로 정권이 넘어갈 것이라는 게 모든 사람들의 얘기였다. 그러나 결과를 보니까 전혀 다른 현상이 나타난 것"이라고 언급했다. 김종인 전 대표의 발언은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했으니, 다음 정권은 당연히 야당에게 돌아올 것이라는 환상을 버리라는 경고의 의미로 해석된다.

한국에서 4·19 혁명이 발생한지 8년후인 1968년 5월 프랑스는 대규모 학생시위와 노동자 파업으로 점철됐다. 프랑스 경제는 완전히 스톱했다. 경찰은 내란 또는 혁명을 우려했다. 정부는 멈춰 섰고, 샤를 드골 대통령은 몇시간 샹젤리제 궁을 떠나 도피하는 일도 발생했다. 수십만명의 시위대들은 피킷을 들고 노래를 부르며 드골 대통령 하야를 외쳤다. 드골 대통령은 마침내 하야했다. 이를 역사적으로 「5월 혁명」 또는 「68 혁명」이라 부른다.

48년전 프랑스의 상황은 최근의 한국 정치와 비슷한 측면이 많다. 하지만 다른 측면도 있다. 100만 시위대, 1,000만 파업에도 불구하고, 곧이어 실시된 총선거에서 집권 보수당은 3분의2 이상의 의석을 차지했고, 이듬해 대통령 선거에서 드골의 후계자인 조르주 퐁피두가 승리했다.

그러면 혁명에 가까운 시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에서 드골주의를 따르는 보수세력이 재집권한 배경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보수 결집이었다. 공산당 주도의 시위대가 파리를 점거, 파리 코뮌의 위험이 고조되면서 드골주의자들도 그만큼의 시위대를 형성해 균형을 맞췄다. 그 결과로 집권 보수당과 좌파 정당이 선거로 결판내자는 합의가 이뤄졌다.

둘째는 좌파 시위대에 대한 프랑스 국민의 염증이 커졌다는 점이다. 혼란뒤 안정을 희구하는 염원이 보수 세력에 표를 던졌다.

▲ 1968년 5월 파리를 가득메운 시위대 /위키피디아

1968년 프랑스 5월 혁명은 어떻게 전개됐는지를 살펴보자.

발단은 그해 3월 파리 근교의 낭테르 대학에서 학생 150명과 시인·음악가등 좌파 그룹이 대학에서의 계급 차별, 기부금의 관료적 운영 등에 항의하며 대학행정실을 점거해 농성을 벌였다. 대학측은 경찰을 불렀다. 학생들은 요구사항을 제시한후 경찰과 충돌 없이 물러났다.

이 사건은 5월 혁명의 불씨를 던졌다. 앞서 그해 2월 프랑스 사회당과 공산당은 다가올 선거에서 사회당 후보를 지지해 드골 정부에 대항하기로 합의했다.

낭테르 대학의 학내 문제로 시작된 시위는 ▲미국의 베트남 침략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항의하는 시위로 번졌고, 기성 세대와 국가 권력에 저항하는 혁명으로 발전했다. 드골 정부는 국가가 끊임없이 외부의 적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학생들은 자신을 감시하고 억압하는 국가 구조에서 인간의 가치와 이상을 찾았다. 학생들은 물질적인 풍요만을 추구하는 기성 세대와 사회 풍조에도 저항했다. 이들은 개인의 자유주의를 주창하며 자신들을 억누르는 모든 권위와 권력, 체제, 조직에 반대했다.

학내시위로 출발한 저항운동은 조직적인 시위로 발전했다. 낭테르에서의 충돌은 마침내 그 대학의 휴업조치로 이어졌다. 5월 2일 소르본느 대학이 낭테르 대학의 휴업조치에 항의하며 시위를 벌였고, 이어 프랑스 학생연맹, 노동자연맹이 가세하며 전국적인 시위로 확산됐다. 경찰은 소르본느 대학을 포위했고, 학생·교수·시민등이 소르본느 학생들을 지지하며 행진했다.

경찰은 물리력으로 진압했다. 시위대는 차량을 불태우고 화염병을 투척했다. 경찰의 강제진압을 본 시민들이 학생들에게 동조했다. 5월 13일 100백만명의 시민들이 시위에 동참했다. 경찰은 뒤로 빠졌다. 조르주 퐁피두 총리가 드골 대통령과 협의없이 단독으로 구속자 석방, 소르본느대학 포위해제를 약속했다. 그러나 시위는 가라앉지 않고 격화했다.

소르본느 대학에 대한 경찰의 포위가 해제되자, 시위대는 그 대학을 ‘인민의 대학’(people's university)라고 선언했다. 시위가 좌경화할 조짐을 보이자 여론은 처음엔 학생들에게 동조했지만, 곧이어 시위 주동자들에게 등을 돌렸다. TV에 비친 시위대의 모습이 사회를 파괴하려는 무책임한 유토피안으로 비쳐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위는 계속됐다.

노동단체가 가세해 공장을 점거하고 농성과 파업을 전개했다. 노동자 파업은 공산당이 주도했다. 5월 17일 프랑스 노동인구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1,000만명의 노동자가 파업에 가담해 드골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했다. 노동조합 지도부가 나서 최저임금 35% 인상, 7% 인금인상을 요구했다.

5월 28일 민주사회 좌파연맹 총재였던 프랑수아 미테랑(1981년 대통령이 됨)은 “더이상 국가는 없다. 신 정부 구성을 준비하겠다”고 밝혔다.

다음날인 5월 29일 아침, 드골 대통령은 예정된 각료회의를 연기하고, 개인 서류를 치우라고 한다음 엘리제궁을 떠났다. 그는 대통령궁을 나서기 앞서 조카에게 “시위자들이 엘리제궁을 공격하게 내버려 두고 싶지 않다. 내 면전에서 유혈 사태가 발생한다면 유감이다. 나는 자리를 바워 공격의 빌미를 남겨두고 싶지 않다”고 전했다. 그가 도착한 곳은 독일 바덴바덴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군 사령부였다. (당시엔 2차대전 직후여서 패전국 독일에 프랑스군이 주둔했다) 그곳 사령관이었던 자크 마수는 귀국하도록 드골을 설득했고, 드골은 마지못해 다음날 귀국했다.

그는 출국에 앞서 풍피두 총리에게 “나는 이제 과거 인물이다. 당신이 미래다. 나는 당신을 수용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퐁피두 총리 체제는 허약했다. 곧이어 혁명이 벌어질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드골의 망명 소식이 전해지자, 5월 30일 40만~50만명의 시위대가 파리로 행군했고, 그들은 “드골이야 안녕”을 외치며 하야를 요구했다. 시위대는 파리 도심을 가득 메웠다. 퐁피두 내각은 시위대가 관공서를 점거할 경우 탈환계획을 수립했고, 국방장관도 컨틴전시 플랜을 짰다. 파리 외곽에는 탱크를 대기시켜 놓았다. 1871년 파리코뮌의 상황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날 오후 2시 30분 퐁피두는 드골에게 의회 해산을 요구했다. 두시간후인 오후 4시 30분 드골은 방송에 나와 하야를 거부했다. 대신에 그는 6월 총선을 선언하면서 시위대가 해산하지 않을 경우 비상계엄을 발동할 것임을 밝혔다.

이번엔 드골 지지자들이 들고 일어났다. 80만명에 이르는 드골주의자들이 프랑스기를 흔들며 엘리제궁으로 행진했다.

드골주의자와 좌파 시위대의 팽팽한 대립이 전개되자, 프랑스 공산당도 총선에 합의했다. 마침내 프랑스는 혁명을 피할수 있었다. 그로부터 학생들은 학교로, 노동자는 공장으로 돌아갔고, 시위는 잦아들었다.

다음달 치러진 총선에서 예상 외의 결과가 나왔다. 드골주의자들은 패배를 예감했지만, 드골파는 전체의석 486석중 3분의2가 넘는 353석을 얻었고, 시위를 주도한 공산당은 34석, 사회당은 57석을 얻는데 그쳤다.

드골은 그러나 이듬해인 1969년 4월 지방제도와 상원의 개혁에 대한 국민투표에서 패배하여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하지만 곧이어 치러진 6월 15일 대선에서 드골 후계자인 퐁피두는 58.2%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됐다. 퐁피두는 대통령에 취임해 드골이 착수했던 정책들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성공했다. ‘드골 없는 드골주의’가 이어진 것이다.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