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오키나와 역사㊦…태평양전쟁의 상흔
상태바
비운의 오키나와 역사㊦…태평양전쟁의 상흔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6.11.17 13:3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일제의 자살 명령으로 주민 3분의1 희생…27년간 미군 점령후 일본에 반환

오키나와에 주둔하는 미군 군무원이 현지 20대 여성을 살해한 사건으로 주민들의 여론이 비등해지자 미군은 소속 부대원들에게 야간 외출금지령을 내렸다. 오키나와현 의회는 미군철수 결의안을 채택했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지금 일본 국적자이지만, 1972년까지는 국적 불명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미국에 대해서도, 일본에 대해서도 호감을 갖지 않는다. 그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자.

일본 오키나와(沖繩)현의 주일미군 기지에 지난 20일 주민들이 몰려와 주일미군 병사에 의한 일본인 여성 살해 사건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교도=연합뉴스
⑥ 참혹한 오키나와 전투

오키나와 전투는 1945년 4월 1일에 시작해 81간이나 계속됐으며, 일본 영토에서 벌어진 최초의 전투였다. 세계사에 유례 없는 자살특공대가 출현했고, 오키나와 주민의 3분의 1이 비극적으로 목숨을 잃었다.

미국측 함대 총사령관은 5함대 사령관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제독으로 휘하에 수송선 450척을 포함해 무려1,500 척의 함선이 있었다. 전투 함대에는 77척의 항공모함과 9척의 전함이 편성되어 있어서 막강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미군의 육상 부대는 신규 편성된 제10군이었고 사령관은 사이먼 버크너 중장이었다. 육군 병력은 5개 사단 10만2,000 명, 해병대 3개 사단 8만8,000명등 총 19만 명에 해군 지원 요원 1만8,000명이 추가로 편성됐다.

오키나와 전투에 영연방 해군의 항모 부대가 참가했다. 영국과 캐나다, 뉴질랜드, 호주 등의 다국적 함대를 주도적으로 이끈 것은 영국 해군 항모부대였다.

오키나와 방어에 나선 일본군은 6만7,000명이었다. 일본 영토에서 벌어진 최초의 전투였기 때문에 일본은 사활을 건다는 각오로 덤벼들었다. 일본은 민간인 부대도 참여시켰다. 39,000명의 현지민 부대와 1,500명의 학생 의용대도 투입했다. 어린 남학생들의 부대에 철혈근황대(鐵血勤皇隊)라는 무시무시한 명칭을 부여했다.

일본은 본격적으로 가미카제 특공대를 운용했다. 4월 1일부터 5월 25일까지 무려 1,500기의 자살 특공기가 동원됐다. 가미카제 특공대의 공격을 받고 20척의 미군 함선이 격침되고 157 척이 파괴됐다. 가미가제 작전에 수많은 일본 젊은이들이 희생됐지만, 일본은 미국의 오키나와 점령을 막지 못했다.

6월4일 미 해병 6사단이 오로쿠반도에 상륙했다. 일본 해군은 격렬히 응전했지만, 이길수 없었다. 6월 13일 사령관 오타 미노루 소장을 비롯한 4,000명이 집단으로 자결했다.

오키나와 주민들이 겪은 참화는 상상을 초월했다. 주민들은 전투에 투입되고 노동에 혹사당했다. 전투가 벌어지자 일본군은 민간인들을 전선으로 끌고 다니며 총알받이로 사용했다.

가장 큰 범죄는 주민들에게 내려진 집단 자살령이었다. 수많은 주민들이 군의 강압에 의해서 가족 자살을 했고, 집단 자살을 택하지 않은 주민에겐 군대가 수류탄을 던져 학살했다. 1945년 3월 26일과 6월 21일 사이에 강제집단사한 지역만 알려진 곳이 서른 곳이 넘는다. 미국 침공 당시 오키나와에는 30만 명의 주민들이 있었는데 전투 중에 이중 3분의 1이 넘는 10만명 이상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전사한 일본군은 77,166명이었고 오키나와 현민의 희생자는 149,193명이라는 통계가 있다. 미국군측 희생도 컸다. 미군은 1만4,009명이 전사하고, 영국군도 82명이 전사했다.

오키나와 전투를 계기로 일본은 전의를 상실하지만, 군부 내부에서 끝까지 싸우자는 의견이 우세했다. 미국은 본토 상륙에 얼마나 더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할지를 고민하게 됐다. 이 조그마한 섬에서 1만 이상을 잃었는데, 본토에서 옥쇄투쟁을 벌일 경우 수십만, 수백만의 미국인이 피를 흘려야 한다는 공포가 엄습했다.

더큰 희생을 막기 위해 사용한 수단이 원자폭탄이었다. 미국은 오키나와 점령을 완료한 다음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카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곧이어 8월 15일 일본천황은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고, 9월 2일 마침내 태평양전쟁과 2차대전이 종전을 고하게 된다.

1945년 4월 오키나와에 상륙하는 미군. /위키피디아
⑦ 미국의 군사 식민지(1945~1972년)

미국은 2차대전을 승리로 끝낸 뒤 류큐 군도가 원래 일본의 영토가 아니었다는 점에 착안했다. 더글러스 맥아더 연합군 사령관은 국무성에 보낸 전보에서 “류큐 군도는 역사적으로, 인류학적으로 일본의 고유영토가 아니었다”고 지적하며 미국의 국익을 위해 이들 섬을 확보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맥아더는 류큐를 미군기지화하면 일본이 재무장하지 않더라도 방위에 문제가 없다는 논리를 펴면서 류큐의 군사기지화를 주장했다.

1952년 4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미국과 일본이 체결한 대일강화조약이 발효됐다. 이 조약에서 류큐의 법적 지위는 모호했다. 류큐의 잠재적 주권은 일본이지만, 실효적 지배권은 미국 군정이 갖도록 했다. 미국은 류큐 주민에 대해 입법·행정·사법권을 장악했다.

당시 류큐 주민은 일본 국적도, 미국 국적도, 류큐 국적도 갖지 못했다. 류큐 주민이 일본 본토에 건너갈 때 여권에 해당하는 도항증이 발급됐다. 그 증명서에는 일본 국적 신분이 표시되지 않고 류큐 군도 거주자라는 애매한 법적 신분이 기재됐다.

미국이 1972년 일본에 양도하기 이전까지 27년간 류큐는 소련과 중국의 팽창을 저지하는 군사기지였을 뿐이다. 류큐 주민은 미국의 안중에도 없었다.

미군은 태평양 전쟁 종전 후 오키나와에 기지를 설치하기 위해 토지를 강제로 수용했다. 전후 미군은 생존 주민을 1년간 16개 지역 수용소에 감금하고 토지를 강제 접수했다.

오키나와는 한국전쟁 때 미군의 전략상 공격기지 및 후방지원 기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1960년대 초부터는 베트남 전쟁의 후방기지로 역할을 했다. 1965년 12월 미 태평양함대 사령관은 "오키나와 없이 베트남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고, 베트남 사람들은 오키나와를 '악마의 섬'으로 불렀다.

일본정부는 오키나와를 일본에 반환하는 조건으로 미군용지를 계속 사용하도록 합법화했다. 오키나와는 서태평양에서 쿠바의 관타나모 기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오키나와 후텐마 기지 /위키피디아
⑧ 1972년 일본에 반환

1969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아시아는 아시아인으로”라는 내용의 닉슨독트린을 발표한다. 이어 닉슨은 일본 사토 에이사구(佐藤英作) 총리와 회담을 갖고 류큐를 일본에 반환하는 내용을 발표햇다. 1972년 5월 15일 마침내 미국은 류큐 군도와 인근의 광대한 해역을 일본에게 통째로 넘겨줬다.

오키나와인들은 그때 왜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을까. 가장 큰 이유는 교원노조가 중심이 되어 일본에 복귀하는 것을 추진했다기 대문이라고 한다. 교사 집단은 주민을 집단자살하게 한 황민화 교육에 앞장선 친일파 그룹이었으며, 이들이 나중에 오키나와의 원로급으로 성장해 일본으로의 복귀를 주도했다는 것이다.

 

⑨ 오키나와 독립론

최근 오키나와에서 ‘독립’이라는 말이 자주 나오고 있다. 2014년 스코틀랜드에서 독립에 관한 주민투표가 진행될 당시, 오키나와 주민들 중 상당수는 “남의 일 같지 않다”면서 깊은 관심을 보였다. 본토에 비해 낙후된 경제, 주둔 미군의 각종 사건·사고에 시달려온 주민 일부는 ‘그 옛날 류큐 왕국으로 돌아가는 게 낫겠다’는 말을 하곤 한다. 상당수 오키나와 사람들은 일본 국토의 0.6%에 불과한 땅에 일본 내 미군기지의 73.8%가 밀집해 있는 현실이 부당하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이 기노완(宜野灣)시의 후텐마(普天間) 기지를 헤노코(邊野古) 해안으로 이전하는 사업을 기습 추진하면서 오키나와 독립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추세에 있다. 오키나와를 독립시킨다면 미군기지를 다 내보낼 수 있는 거 아니냐는 주장이다.

최근 오키나와 일대의 학자·시민단체 관계자 등이 ‘류큐민족독립종합연구학회’를 결성, 오키나와 독립의 의미와 가능성 등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 학회는 스코틀랜드를 방문해 사례연구에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오키나와를 독립시켜 과거의 류큐국으로 돌아가자는 목소리는 크지 않다. 대다수의 오키나와 현민들은 스스로 일본 국민이라고 생각한다. 독립론도 연구 수준에 불과하고 대중적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다. ‘잃어버린 나라’는 다시 찾기 어려울 것 같다.

 

⑩ 역사의 교훈

류큐의 역사는 어쩌면 우리나라의 역사와 닮아 있다. 우리 역사에는 중국·러시아의 대륙과 미국·일본의 해양을 연결하는 반도라는 지정학적 특수성이 영향을 미쳤다면, 류큐 역사에는 중국 대륙을 포위하는 해양 열도라는 지정학적 이해관계가 녹아 있다. 이 지정학이 오늘도 지속되고 있다. 해양으로 진출하려는 중국과 이를 저지하려는 일본의 패권싸움이 센카쿠 열도에서 벌어지고 있다. 오키나와, 즉 류큐의 역사는 힘이 없는 나라는 역사 속에서 살아진다는 진리를 깨닫게 한다.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