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의 경제사적 관점①] 도요토미, 조선 고급물산 원했다
상태바
[임진왜란의 경제사적 관점①] 도요토미, 조선 고급물산 원했다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6.11.08 16: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비단·면포·도자기등 고가물품의 무역 독점 챙기기 위해 조선 침공

[김인영 기자] 임진왜란(壬辰倭亂:1592~1598)은 조선과 일본, 중국의 명(明)나라가 한반도에서 치른 전쟁이다.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중국(明)을 치러 갈테니 길을 빌려달라”(征明假道)고 조선에 요구했고, 중국을 상국으로 받들던 조선은 이를 거절했다. 전쟁은 참혹했다. 선조 임금은 의주까지 피난했고, 7년 전쟁 기간에 전국이 유린됐다.

우리는 일본의 침공으로 촉발된 16세기 국제전쟁의 원인을 전국시대(戰國時代)를 끝낸 일본의 정치상황, 도요토미의 무모함, 조선의 나약한 유교관념 등에서 찾았다. 경제 관계, 즉 동아시아의 무역관계에 대한 연구는 부족했다. 300년후 청일전쟁, 한일합방을 거치면서 우리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역사를 바라봤고, 그 결과 일본의 침략근성을 부각하고 우리의 자주정신을 강조하는데 초점을 맞춰왔다. 하지만 임진왜란 한세기 전부터 동아시아에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큰 경제적 변동이 나타났고, 그 흐름이 격화하면서 전쟁의 외적 상황을 형성했다.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기도 하지만, 경제와 무역 전쟁의 연장이기도 하다. 1차, 2차 세계대전은 선발 자본주의국가인 영국·프랑스와 후발 자본주의국가인 독일을 축으로 한 전쟁이었다. 미국 독립전쟁은 과세를 둘러싼 분쟁에서 촉발됐고, 남북전쟁은 북부 공업지대와 남부 농업지대의 대결구도였다.

임진왜란의 경제적 측면에 관한 연구는 일본에서 오래전부터 진행됐고, 우리나라에서도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러면 임진왜란이 발발한 동북아의 경제적 변동을 살펴보기로 하자.

영화 '명랑'의 한 장면 /네이버 영화

15세기말~16세기초는 유럽의 신대륙 탐험기였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황금과 향료가 가득한 인도와 지팡구(일본)를 찾아나서다 아메리카를 발견했다. 페르디난드 마젤란은 세계일주를 하던중 1521년 필리핀 섬에 도착했다. 해양탐험을 끝낸 서양세력은 급속히 동아시아로 진출했다. 세계를 둘러 나눠 지배하던 스페인과 포루투갈이 16세기에 아시아에서 무역거래를 통해 엄청난 부를 독식했다. 이들의 거래방식은 삼각무역이었다. 일본에서 은을 가져다 중국에서 금과 교환하고, 비단과 원사를 샀다. 중국에선 금과 은의 교환비율이 1대6이었고, 일본에선 1대12였다. 당시 명나라는 일본에 대해 해금(海禁)정책을 취했기 때문에 스페인 무역상은 일본에서 은을 사서 중국에서 금과 바꾸고, 중국 비단과 원사를 가져와 일본에 팔면서 막대한 이득을 남겼다. 이른바 재정거래(arbitrage trade)였다. 일본의 은이 대량으로 중국으로 흘러나가 일본에선 은이 고갈상태에 놓였다.

 

조선과의 무역 거래에서도 일본은 적자였다. 조선의 상인들은 중국에서 비단과 원사를 사서 일본 상인에게 팔아 많은 이득을 남겼다. 일본은 조선에서 생산되는 면포와 곡물, 도자기도 사갔다. 일본의 당시 경제상황은 넉넉지 않았고, 전국이 분열돼 전쟁을 치르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다할 생산물이 없었다. 일본은 구리 외에는 특별한 것이 없었고, 중국산 고가품을 사는 과정에서 은을 지불해야 했다.

조선의 기술자들이 개발한 은제련법이 일본에 흘러들어 일본에서 은광 개발이 촉진됐다. 은 생산으로 일본은 조선과의 무역, 스페인등 유럽국가와의 중계무역에서 빚어진 무역적자를 다소 해소할수 있었지만, 여전히 불리한 상태였다.

 

이런 와중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연합해 1587년 전국을 통일했다. 도요토미는 통일 과정에서 도시 부상(富商)들의 협력을 기반으로 조선·중국과의 해상관문인 하카타(博多: 후쿠오카) 등을 장악해 상권과 무역권의 통일적 확보를 꾀했다. 그리고 토지와 농민을 장악하기 위해 전적인 토지 조사와 호구 조사를 실시하고, 새로운 신분 규정을 정립했다.

그러나 도요토미 정권은 다이묘(大名)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지 못했다. 토지 소유에서 제외된 하급 무사들의 불만을 샀다. 더욱이 조선에서 삼포왜란(三浦倭亂), 중국에서 닝보(寧波)의 난(亂)이 일어나 명·조선과의 공무역이 거의 폐쇄된데다 지방에선 쇼군의 명을 따르지 않는 왜구들이 독자적인 밀무역을 하고 있었다.

 

중국 비단은 일본의 크고 작은 영주들에겐 신분을 과시하는 물품으로 인기가 높았다. 요즘으로 치면 명품이었다. 조선면포는 옷감보다 배의 돛감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일본에선 면포 이전에 배의 돛이 돛자리 종류인 口草로 만들어졌는데 조선산 면포 돛은 그것에 비해 가볍고 탄력이 있었다. 따라서 항속과 항해거리를 크게 높였다. 경쟁력 있는 신제품이었다. 면포는 섬나라 일본의 해상운송에 획기적인 발전의 계기를 마련했다.

일본열도를 통일한 도요토미는 이렇게 중요한 상품의 수입을 독점할 계획을 세웠다. 군사력은 경제력을 밑바탕으로 한다. 도요토미는 쇼군의 경제력을 높이고, 지방 다이묘들의 무력 근거를 없애기 위해 사무역 또는 밀무역을 근절할 필요가 있었다.

도요토미는 일차적으로 전국 각지의 다이묘들에게 개별적인 해적행위를 금지토록 명했다. 동시에 이 조치를 담보로 중국에 정규교역을 재개해줄 것을 요청하는 교섭을 진행시켰다.

하지만 왜구의 침공과 노략질에 시달려온 명나라는 일본의 요구를 거절했다.

경제사학자들은 이점에 주목한다. 도요토미는 이를 무력으로 해결하고자 임진왜란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임진왜란중 왜군은 한때 조선 최대 은광이었던 함경도 단천(端川)을 점령했다. 아울러 수많은 우리의 도공을 잡아갔다. 그렇게 해서 비싼 값을 주고 중국산 도자기를 사기보다는 조선 도공을 통해 고급 도자기를 공짜로 갖겠다는 목적이었다.

조선을 지원하기 위해 참전한 명군은 조선에 자국 통화인 은을 요구했다. 조선엔 은이 유통되지 않았다. 선조는 한때 단천 은광을 개발해 명군 지원금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동래부순절도 /육군박물관 소장

임진왜란은 종국적으로 일본의 패배였다. 조선과 명의 승리였다. 하지만 그후 역사는 달리 전개됐다.

임진왜란후 스페인에 이어 포르투갈·네덜란드·영국이 동아시아 무역에 참여함으로써 서세동점(西勢東漸)을 강화했다. 서양 무역상들은 동양 무역을 장악하고 19세기 이후엔 제국주의 본성을 드러냈다. 중국엔 명이 망하고 청이 들어섰지만, 해금정책을 이어갔다. 하지만 영국·프랑스·독일·미국등 구미세력에 의해 해양을 열었고, 다시 등장한 일본과 지리한 전쟁을 치러야 했다. 일본에선 도요토미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권력이 넘어갔지만, 서구 해양 세력의 학문과 기술을 익혀 300년후 다시 동아시아에서 전쟁을 재현한다.

조선은 전란을 겪으면서 무엇을 배웠을까. 국제사회의 변화를 조금도 깨닫지 못하고 사대교린의 외교로 돌아갔다. 북방의 세력변화에도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해 두차례 호란을 겪었고, 몇백년후 다시 일본에 식민화되는 비극을 맞았다.

국제적 변화의 흐름을 얼마나 잘 읽느냐, 그 변화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의 여부가 그후 동아시아의 역사를 갈라놓은 것이다.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