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와 혁신기업]⑦ 표준화의 힘, 컨테이너社 '씨랜드 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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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와 혁신기업]⑦ 표준화의 힘, 컨테이너社 '씨랜드 서비스'
  • 이영원 미래에셋대우 이사
  • 승인 2021.01.26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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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원 미래에셋대우 이사] 지난 2019년 주요 항구의 물동량 처리 순위를 보면 부산항이 2199만 TEU로 6위를 기록했다. 상하이가 4330만 TEU로 1위, 싱가포르가 3720만 TEU로 2위에 올랐고 그뒤를 닝보, 선전, 광저우가 이었다. 부산에 이어 칭다오, 홍콩, 텐진, 두바이가 7~!0위를 차지했다.

중국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 국가의 강세가 두드러지고, 중국의 항구가 10위내에 6개를 차지, 절대 강자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중국이 세계의 제조공장의 지위에 걸맞는 물동량을 기록하고 있는 가운데, 부산항의 순위가 세계경제에서 한국의 위상을 보여주고 있다.

노동력에 의존하던 단순 조립가공에서 출발해 반도체 등 핵심 부품과 최고 품질의 완제품에 이르기까지 수출은 한국 경제발전의 역사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수출을 통한 경제성장이 가능했던 것은 원활한 물류와 국가간 밸류체인의 발전에 기인한다.

그 물류망의 핵심에 컨테이너가 존재한다. 앞에서 언급한 항구 별 처리 물동량 단위는 TEU(twenty-foot equivalent unit, 20피트 컨테이너)로 컨테이너 처리 개수를 의미한다. 대부분의 물량이 컨테이너에 실려 운송되기 때문이다.

현재 글로벌 화물을 경제적 가치로 환산할 때 대략 60% 이상이 컨테이너를 통해 운송되고 있다. 컨테이너 이외의 해상운송에는 유조선(원유 및 석유제품), LNG선(LNG), 벌크선(곡물, 철광석, 석탄 등 원자재) 등이 사용되지만 대다수 상품은 표준화된 컨테이너를 탑재하는 컨테이너선이 담당한다.

컨테이너가 운송에 본격 채용된 시점은 1956년이다. 이 때를 기점으로 글로벌 물류의 본격적인 성장이 시작된다.

물론 그 이전에도 철제 박스형 물류용기는 사용되었다. 하지만 동일한 규격의 컨테이너가 채용되어 선박에도, 트럭에도, 기차에도 실려 운송되기 시작한 것은 1956년 4월 26일 말콤 맥린(Malcom Mclean)의 아이디얼 엑스(Ideal X)호가 뉴저지주 뉴어크(Newark)항에서 텍사스주 휴스턴(Houston)항까지 첫 항해를 한 때부터였다.

트럭운송업자 말콤 맥린의 아이디어

트럭 운송업자였던 말콤 맥린의 아이디어가 현실화되기 이전까지 물류는 저마다 다른 규격의 포장을 통해 이루어졌다. 트럭운송과 기차운송의 규격이 달랐고, 해상운송 역시 운송업자마다 다른 형태의 화물을 취급했다. 표준화되지 못한 화물의 선적과 하역은 전적으로 인간의 노동력에 의존해야 했고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발생했다.

말콤 맥린은 트럭 운송업자들에게 자신의 컨테이너 규격을 설명했고 표준화된 운송 방식은 호평을 받으며 점차 확산되어갔다. 아이디얼 엑스호는 유조선을 개조한 것이었지만 1957년에는 최초의 컨테이너선 게이트웨이 시티(Gateway City)가 뉴욕과 플로리다, 텍사스를 정기운항했다. 맥린은 1960년 자신의 운송회사 이름을 씨랜드 서비스(Sea-Land Service)로 개명한 후, 1963년에는 뉴저지주 뉴어크항 엘리자베스 마린 터미널에 컨테이너 전용시설을 마련했다.

말콤 맥린은 컨테이너를 이용한 운송방식이 기존 방식에 비해 선적·하역 비용이 획기적으로 절감된다고 주장했다. 인력에 의존했던 기존 화물 처리비용은 톤당 5.86달러로 추산되었지만, 자신의 컨테이너를 이용하면 톤당 16센트에 불과했다.

하지만 비용상의 이점에도 불구하고 컨테이너의 보급은 매우 느리게 진척되었다. 많은 항구들은 컨테이너를 들어올릴 크레인이 설치되지 않았고 항만 노조의 저항도 거셌다.

그러던 중 1967년, 컨테이너 보급의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된다. 베트남 전에 미국이 참전하면서 보급품의 선적과 하역에 부심하던 미군이 컨테이너 방식을 채택했던 것이다. 씨랜드 서비스사는 미군 물자를 베트남으로 운송하고 돌아오는 길에 홍콩, 일본을 경유하는 노선을 개설하며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전쟁물자를 컨테이너에 담아 이송하면서 기존 방식에 비해 훨씬 빠른 하역이 가능해졌던 미군은 모든 해운사에 동일한 표준을 요구했다. 1956년 첫 아이디얼 엑스의 운송에 사용했던 35피트 규격의 컨테이너 특허를 갖고 있던 말콤 맥린은 1968년 특허를 국제표준화기구(ISO)에 개방해 모든 해운사가 사용할 표준을 제정하게 된다. 이 때 채택된 규격이 20피트, 40피트 컨테이너이다.

길이 20피트(6미터), 40피트(12미터) 두 가지로 규격화된 컨테이너가 운송의 표준이 되어가면서 전용부두가 잇달아 설치되고 전용선이 운항되었으며 트럭과 기차 운송까지 동일한 규격으로 마련되었다.

 글로벌 물류혁신을 이끌었던 씨랜드 서비스는 몇차례의 인수합병과정을 거친 후 세계 최대 해운사인 머스크그룹(Maersk Group)에 편입됐다. 사진=연합뉴스.

표준화로 물류비용 절감과 운송기간 단축

표준화의 힘은 대단했다. 물류 비용의 절감은 물론 선적-하역 시간의 단축으로 전체 운송기간을 줄일 수 있었고 전세계의 물동량의 폭증으로 이어졌다. 각 단계별 생산과 소비가 전세계적으로 연결되는 글로벌 밸류체인이 완성될 수 있었다. 해운업도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컨테이너 전용선도 대형화가 거듭되어 최근에는 2만4000TEU급이 운항되고 있다.

피터 드러커는 자신의 저서 ‘위대한 혁신’에서 맥린의 컨테이너를 중요한 혁신의 사례로 소개한다. 기존 해운업계가 화물선의 속도와 크기에 주목해 경쟁해 온 관행을 물류의 관점으로 바꿔 선적·하역은 물론 육상운송과의 연계까지 감안한 전체 과정의 시간 단축을 가능케 하는 방안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상품의 종류와 무관하게 일관된 물류가 가능해진 점이 컨테이너 혁신의 핵심이라고 한다면, 현재적인 의미의 플랫폼 혁신이 반세기 전에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60년대 말까지 씨랜드 서비스사는 2만7000개의 컨테이너를 보유하고 36척의 전용선과 30개 이상의 항구에 운항하며 승승장구 했다. 이후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한 현금 투입을 위해 맥린은 자신의 지분을 담배 제조사인 R.J. 레이놀즈사에 매각하게 되었고, 몇차례의 인수합병과정을 거친 후, 씨랜드 서비스는 현재 세계 최대 해운사인 머스크그룹(Maersk Group)의 디비전으로 남아있다.

맥린의 씨랜드 서비스가 독점적 지위를 유지하며 번창하지는 못했지만 개방된 특허, 표준화된 방식으로 거듭난 해운업은 반세기 이상 승승장구하고 있다.

 

●이영원 이사는 연세대 경제학과 학부와 대학원을 마쳤다. 대우증권에서 리서치 업무를 시작해 푸르덴셜투자증권, 현대차투자증권에서 투자전략을 담당했다. 미래에셋대우에 합류한 이후 해외주식 분석업무를 시작, 현재 글로벌 주식 컨설팅을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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