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동열의 콘텐츠연대기] ㉔ 토키, 게임체인저의 등장-무성영화의 종말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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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열의 콘텐츠연대기] ㉔ 토키, 게임체인저의 등장-무성영화의 종말 (상)
  • 문동열 레드브로스대표
  • 승인 2021.01.24 13: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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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말 유성영화 시장 확대
유성영화 안착 영화 완성도 높여
유성영화 안착하기까진 20년 흘러
문동열 레드브로스 대표.
문동열 레드브로스 대표.

[문동열 레드브로스 대표] 많은 이들이 기술 변혁으로 인한 산업 구조 변화가 아주 빠르게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개인사를 돌이켜봐도 현재는 굉장히 느리고 미래는 아주 먼 미래의 일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과거는 정말 순식간에 지나간 듯한 느낌을 가지는 것처럼 말이다. 실제로 그럴까?

정말 순식간에 변혁이 일어나고 그로 인해 산업 구조가 변화하고, 어제의 강자가 오늘의 패자가 되는 격랑의 시대일지라도 그 당시 그 시점으로 돌아가면 의외로 평온할 때가 많다. 

기술이 발명되더라도 시장이 그 것을 받아들이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고, 대중들에게 받아 들여지기까지 또 시간이 걸린다. 모든 기술 변혁은 과거의 기술과 새로운 기술이 혼용되는 과도기의 시간을 가지게 되며, 그 속에 필연적으로 충돌하게 된다.

살아남으려는 과거와 자리 잡으려는 새로운 기술이 충돌을 일으키며 산업은 본질적인 진화와 도태의 과정을 겪게 되는 것이다.

영화 산업도 마찬가지였다. 120여년이 조금 넘는 영화의 역사 속에 가장 먼저 찾아온 변혁은 ‘토키(talkies)’의 발명과 유성 영화의 등장이었다. 토키는 무성영화에 소리를 입히는 시스템으로 세월이 흘러 20세기 들어 유성영화를 스펠링 다르지만 발음은 같은 토키(torquay)라고 불리기도 했다. 

무성 영화가 유성 영화로 전환되는 그 과도기에 영화 산업적 측면에서 과연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알아보자.

프랑스에서 ‘고몽’이 1902년 제작한 발성 영화를 홍보하는 포스터. 사진=위키피디아.
프랑스에서 ‘고몽’이 1902년 제작한 발성 영화를 홍보하는 포스터. 사진=위키피디아.

영화에서 소리를 듣고 싶은 욕망

토키의 등장으로 유성 영화 (Sound film) 시대가 시작됐다고 하지만, 이 전의 무성 영화 시대에 ‘소리’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조금 규모가 있는 극장에는 오케스트라가 있었고, 우리가 흔히 변사라 부르는 나레이터들이 자막을 읽을 수 없는 문맹자들을 위해 영화를 해설해주기도 했다. 

이런 영화들을 유성 영화로 부르지 않는 것은 영화 사운드의 본질은 음악이나 현장에서 간단히 덧붙이는 효과음이 아닌 배우의 목소리 및 생생한 현장음에 있기 때문이다. 무성 영화 시대 영화와 연극이 가장 달랐던 점은 영화는 배우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이미 연극이라는 문화 양식에 익숙해져 있던 대중들은 배우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것에 큰 불편을 느꼈다. 영화라는 양식 자체가 다른 매력 요소가 없었다면 영화라는 문화 양식은 그대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 만큼 ‘소리’는 중요한 요소였다.

사실 유성 영화 기술은 영화가 등장하기도 전에 이미 어느 정도 완성되어 있었다. 첫 영화가 상영되기 40년 전인 1850년대 초에 이미 금속 실린더에 소리의 떨림을 기록하는 기술이 있었다. 하지만 이 기술은 기록만 가능하지 재생을 할 수가 없었기에 그다지 효용이 없었다. 

1877년 토머스 에디슨이 이 아이디어를 가지고 ‘포노그래프’라는 최초의 축음기를 발명하면서 비로소 소리를 녹음하고 재생하는 기술이 완성됐다.

1900년 파리 엑스포의 사운드 온 필름 선전용 포스터. 사진=위키피디아.
1900년 파리 엑스포의 사운드 온 필름 선전용 포스터. 사진=위키피디아.

영화가 처음 나왔을 때 많은 사람들은 소리가 없는 영화를 불편해했다. 이미 존재하는 사운드 레코딩 기술을 영화에 도입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래서 일부 영화들은 영화관 내에 축음기를 설치하고 영화 시작에 맞춰 영상에 맞춰 미리 녹음한 축음기를 틀기도 했다.

이를 사운드 온 필름이라 불렀다. 하지만 1900년 파리에서 처음 상영된 사운드 온 필름이 상업적으로 실용화되기에는 약 20여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과연 그 시간 동안 어떤 일이 있었기에 유성 영화의 본격적인 상업화는 그토록 늦어졌던 것일까.

유성 영화 초기의 개척자들

1877년 현재 영화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말이 달리는 연속 사진으로 유명한 사진작가 에드워드 마이 브릿지는 당시 개인형 영사 시스템인 키네토스코프를 준비 중이던 에디슨에게 자신이 고안한 ‘주프락시스코프(zoopraxiscope)’를 결합한 사운드 영화 시스템을 제안했다.

에디슨이 이를 거부하며 무산되고 말았지만, 뤼미에르 형제가 첫 영화를 상영하기도 전에 이미 유성 영화에 대한 사람들의 아이디어가 넘쳐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1903년에는 초창기 영화계 선구자 중 한 명인 프랑스의 발명가 고몽(Gaumont)은 영상과 사운드가 함께 작동하도록 설계한 크로노포노그라프와 스피커에 대한 특허를 받는다. 

고몽은 이미 3년 전 사운드 온 필름을 실연하여 유성 영화의 흥행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다. 토키의 원형이라 볼 수 있는 이 장치는 그 동안의 고민을 조금은 해소해 주긴 했지만, 완벽한 해결까지는 이르지 못했고 거기에 비쌌다. 

지금도 엔지니어 출신의 경영자들이 많이 실패하는 원인이기도 하지만 엔지니어는 비용에 관계없이 문제 해결만 모색하고, 좋은 걸 만들면 당연히 쓰겠지라며 비용 같은 다른 시장적 요인들은 배제하는 경향이 있다.

고몽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비용의 문제는 아무리 좋은 제품도 시장에서 실패하게 만드는 흔한 요인 중 하나다. 1913년에는 에디슨도 영화용 사운드 시스템에 도전했다. 결과는 실패였다.

‘The Photo drama of Creation’ 의 포스터. 사진=위키피디아.
‘The Photo drama of Creation’ 의 포스터. 사진=위키피디아.

에디슨도 그 간 발전한 사운드 기술을 접목하여 새로운 시스템까지는 만들었지만, 영화관에서 실제로 사용하기에는 복잡했다. 운용이 복잡한 탓에 전문 인원이 필요했고 개별 영화관에서 이를 위해 전문 인원을 쓰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그래도 이 시스템은 고몽의 발명품보다는 나은 것이 통제된 환경에서 전문 인력이 있다면 사용 가능했기에 종교 단체 ‘여호와의 증인’에서는 이 시스템을 활용한 8시간짜리 대규모 부흥회 ‘The Photo drama of Creation’를 열기도 했다.

이러한 많은 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유성 영화 상용화에 20년이 넘는 세월이 필요했던 가장 큰 이유는 유성 영화에 필요한 몇 가지 기반 기술이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 중 가장 큰 문제는 동기화였다.

동기화란 영상과 소리를 일치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영상과 사운드가 서로 다른 장치에서 재생되는 방식으로는 이를 완벽하게 일치시키는 것이 어려웠다. 거기에 더해 문제가 된 것이 당시의 사운드 재생 장치로는 극장 안 전체를 커버할 만큼의 음량 확보가 되지 않았다.

영화관이 커야만 수지를 맞출 수 있는 극장주 입장에서 이는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재생되는 사운드의 품질이 그렇게 좋지 않다는 것도 문제였다. 

진동을 기록하는 방식 때문에 진동수가 낮은 소리 같은 경우에는 거의 들을 수 없을 정도였다. 거기에 당시 소음이 장난이 아니었던 카메라도 문제였다. 카메라 돌아가는 소리는 동시 녹음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었는데, 아주 최근까지도 많은 영화가 후시 녹음 (영상을 먼저 만들고 음성을 뒤에 입히는 기법)을 하게 만든 원인이기도 했다. 

첫 유성 영화가 등장한 1927년까지 고몽이나 에디슨 같이 영화용 사운드 시스템에 도전하는 개척자들은 많았다. 그들은 영화에 소리를 입히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고, 몇몇은 거의 실용화 단계에까지 도달하곤 했다.

기술이 발전하고 영화 산업 자체도 어느 정도의 비용을 감당할 만큼 커지게 되는 1920년대에 들어서자 그들을 가로막은 건 더 이상 기술적 요인도, 비용도, 운용에 대한 불편함도, 아니었다. 이미 커져버릴 대로 커져버린 무성 영화의 시장 구조에 젖어버린 영화 제작자들이었다.

이미 기존 시장에서 충분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고 있던 그들에게 유성 영화는 분명 필요한 기술의 진보이지만, 그 진보에 내가 먼저라며 나서는 제작자들은 없었다. 서로 눈치만 보면서 망설이던 시기, 물에 가장 먼저 뛰어드는 용감한 퍼스트 펭귄이 필요했던 그 시기에 한 제작사가 용감하게 나선다. 바로 영화사가 워너 브라더스였다.

●문동열 레드브로스 대표는 일본 게이오대학 대학원에서 미디어 디자인을 전공하고, LG인터넷, SBS콘텐츠 허브, IBK 기업은행 문화콘텐츠 금융부 등에서 방송, 게임, 영화 등 다양한 콘텐츠 기획 및 제작을 해왔다. 콘텐츠 제작과 금융 시스템에 정통한 콘텐츠 산업 전문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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