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동열의 콘텐츠연대기] ㉓ ‘미국의 연인’ 메리 픽포드 – 스타 시스템의 탄생 (하)
상태바
[문동열의 콘텐츠연대기] ㉓ ‘미국의 연인’ 메리 픽포드 – 스타 시스템의 탄생 (하)
  • 문동열 레드브로스대표
  • 승인 2021.01.10 09: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무명 단역에서 시작해 세계적인 배우로 성장하다
크레딧에 이름도 없던 배우를 찾아내 스타로 만든 관객들
대형 제작사의 횡포에 맞서 독립 제작자를 위한 새로운 길을 열다
문동열 레드브로스 대표.
문동열 레드브로스 대표.

[문동열 레드브로스 대표] 많은 무성 영화의 스타 중에 최고의 스타를 단 한명만 꼽으라고 하면 아마 이 배우밖에 없을 듯 하다. ‘미국의 연인 (America’s Sweetheart)’으로 불렸던 ‘메리 픽포드 (Mary pickford)’다.

전편에서 다루었던 사라 베른하르트나 릴리언 기시 역시 결코 떨어지지 않는 스타급 배우였지만, 사실 전체적인 무게감으로 보면 메리 픽포드를 따라올 배우가 거의 없다.

사라 베른하르트가 스타 시스템의 기반을 만들고 릴리언 기시가 그것을 쌓아올렸다면, 메리 픽포드는 현대 스타 시스템을 완성했다고 볼 수 있다.

1920년대 중후반 당대 메리 픽포드 급의 여배우를 들자면 루이즈 브룩스나 클라라 보우, 글로리아 스완슨, 테다 바라 정도가 있겠지만 역시 메리 픽포드 급으로 같이 놓기에는 조금 무게감이 떨어진다.

굳이 배우들을 줄 세울 의도는 아니지만, 어쨌든 메리 픽포드는 영화 사상 처음으로 연간 100만달러를 벌었던 첫번째 ‘백만장자 여배우’니까 말이다.

이름도 없는 무명배우, 관객들이 찾아내다

픽포드의 본명은 글래디스 루이스 스미스 (Gladys Louise Smith)로 1892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태어났다. 7살부터 순회 극단의 아역으로 연기 생활을 시작했다.

연기는 픽포드 가족의 ‘가족 사업’이었으며, 어린 픽포드는 엄마랑 오빠와 함께 기차를 타고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3류 극단들과 함께 공연을 했다. 6년 간의 무명 생활 끝에 하였으며, 단역이긴 하지만 뉴욕의 브로드웨이에 진출한다.

픽포드가 15살이 되던 1907년 브로드웨이의 연극에서 나름 비중있는 조연 역할을 맡게 되었다. 본격적인 프로 연기자의 생활을 시작하게 된 글래디스는 메리 픽포드로 예명을 바꾸고 1909년 연극계를 떠나 유명한 D.W. 그리피스 감독이 있는 바이오그래피사랑 계약을 하며 본격적인 영화배우 생활을 시작한다.

그리피스 감독의 눈에 든 픽포드는 1909년 한 해에만 51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하지만 주연이라기보다는 그녀에게 맡겨진 역할은 유부녀나 비서, 노예, 청소부, 아메리카 원주민, 매춘부 등 정말 다양한 ‘조연’ 역할이 대부분이었다. 영화 크레딧에 이름조차 올라가지 않았던 미미한 역할들이었다. 그녀의 가치를 발견한 건 오히려 관객들이었다.

관객들은 영화를 볼 때마다 나오는 이름 모를 조연에게 끌렸다. 어린 나이 탓에 순진하고 청순한 역할을 할 때마다 큰 주목을 받으며 요즘 식으로 말하면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제작사가 크레딧에서 이름을 빼버릴 정도로 중요도가 떨어졌던 픽포드였지만 그녀의 이름을 알 수 없었던 탓에, 극장주들은 이번 영화에 ‘황금 컬을 한 소녀’나 또는 ‘바이오그래피 걸’이 나온다는 문구를 극장 앞에 내걸어 관객들에게 ‘그녀’가 출연함을 알렸다.

제작사의 지원없이 입소문만으로 점점 인지도를 얻게 된 픽포드는 1910년 바이오그래프를 떠난다. 이듬해부터는 지금 유니버설 픽처스의 전신이기도 한 IMP와 계약을 맺고 영화에 출연하기 시작하지만, 창의적인 그리피스 감독의 연출에 익숙한 그녀에게 IMP의 연출력은 볼품이 없어 보였다.

IMP가 경력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그녀는 다시 그리피스 감독에게 돌아가 릴리언 기시나 도로시 기시 같은 배우들과 함께 그리피스 감독 영화의 주요한 배우로 성장하게 된다.

아메리칸 스윗하트 메리 픽포드 (출처 : 위키피디아).
아메리칸 스윗하트 메리 픽포드.  사진출처=위키피디아.

전통적 영화권력과 싸운 여배우

1912년 잠시 영화계를 떠나 브로드웨이에서의 성공을 바라며 브로드웨이로 돌아간 픽포드는 곧 자신이 얼마나 영화계를 좋아하는지 깨닫게 된다.

연극과는 다른 영화의 연기 스타일에 젖은 탓도 있겠지만, 픽포드는 당시 주류였던 브로드웨이보다는 영화산업이 더욱 커질 것이라는 신념이 있었다. 1913년 픽포드는 영화계로 다시 돌아갈 결심을 하고 당시 브로드웨이와 영화계를 넘나들며 제작에 열중하던 아돌프 주커와 함께 일을 하게 된다.

아돌프 주커는 당시 현 파라마운트 사의 전신인 Famous Players Film Company라는 영화사를 설립한지 얼마되지 않았다. 브로드웨이를 오랫동안 경험한 주커는 그 동안 영화 현장에서 비중이 낮았던 배우가 중심이 되는 ‘스타 시스템’이 영화 산업의 핵심이 될 것임을 예감했다.

‘스타 시스템’이 영같은 시나리오에 같은 감독과 스탭이 제작하더라도 배우가 누구냐에 따라 영화의 품질이 극과 극을 달린다는 것을 깨달은 주커는 그 시기 영화계를 지배하고 있던 감독주의를 벗어나 우선 브로드웨이의 스타 배우들을 대거 계약하여 스타 중심으로 영화를 찍어내는 방식을 채택한다.

이른바 ‘블록 부킹’이라는 배급 방식을 만들었다. 블록 부킹이란 극장들이 영화를 개별적으로 구매할 수 없고, 여러 영화를 한꺼번에 구매하게 만드는 방식이었다. 1950년대 이후 유명한 불공정거래의 사례로 꼽히며 대법원에 의해 퇴출되기 전까지 헐리우드를 성장시킨 주요한 동력원이 된다.

극장주들은 관객이 많이 드는 스타가 출연하는 영화를 사기 위해 필요도 없는 신인들의 영화까지 ‘끼워서’ 사야만 했다. 영화사는 블록 부킹을 통해 안정적인 공급망을 확보할 수 있었고, 신인들을 빠르게 육성할 수 있었다. 블록 부킹을 통해 스타 시스템이 비로소 완성된 것이다.

배우로서뿐만 아니라 제작자로서도 메리 픽포드는 많은 활동을 했다. 픽포드가 영화제작자로 활동했었던 1916년 모습. 사진출처=위키피디아.
배우로서뿐만 아니라 제작자로서도 메리 픽포드는 많은 활동을 했다. 픽포드가 영화제작자로 활동했었던 1916년 모습. 사진출처=위키피디아.

주커가 제작자 입장에서 스타 시스템을 활용했다면 메리 픽포드는 배우 입장에서 스타 시스템을 활용한 최초의 배우였다. 그녀는 영화를 찍을 때마다 점점 높아지는 자신의 명성이 흥행에서 큰 영향을 끼치는 요인임을 깨닫게 되자, 영화를 찍을 때 마다 계약서에 예상 수익의 많은 부분에 해당하는 높은 출연료로 자신의 ‘지분’을 보장받았다.

그 동안 정해진 출연료만 지급했던 제작사들은 당황했지만, 그녀없이 영화가 성공하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건 제작사들이 더 잘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녀의 출연료는 매년 상승하여 1916년에는 자신이 출연한 영화 수익의 반에 해당하는 백만달러가 넘는 출연료 (2021년기준 1800만 달러 상당)를 보장받았다.

백만 달러 계약을 체결한 최초의 여배우가 된 것이다. 픽포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주커와의 계약이 만료되자, 그녀 스스로 영화사를 차린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영화사를 통해 계속 영화를 제작했다. 1920년 제작한 영화 ‘Pollyanna’는 110만 달러의 수익을 올리는 것을 시작으로 매년 백만 달러 이상의 수익을 내면서 승승장구 하게 된다.

메리 픽포드는 영화사에 길이 남을 아름다운 여배우 중 하나이지만, 제작자로서 영화 산업이 성장하는데도 큰 역할을 했다. 전까지 주커 같은 몇몇 제작사들이 독점하던 배급권력에 맞서 그녀는 자신의 명성을 독립 영화 제작자들이 이용할 수 있게 했다.

메리 픽포드의 영화사 United Pictures는 대형 영화 제작사의 ‘독점 체인’에 맞서 극장에 영화를 걸 수 있는 몇 안되는 영화사 중 하나였고, 그녀의 영화사와 계약한 많은 독립 제작자들에게 대형 제작사들의 독점망에 이익을 빼앗기지 않고도 자신의 영화를 개봉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많은 전문가들은 그녀가 영화 권력이 한 곳으로 쏠리는 것을 막아 영화 산업이 더욱 크게 성장할 수 있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한다. 미국의 연인이었던 배우 메리 픽포드, 그녀는 영화산업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공평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한 ‘운동가’이기도 했던 것이다.

●문동열 레드브로스 대표는 일본 게이오대학 대학원에서 미디어 디자인을 전공하고, LG인터넷, SBS콘텐츠 허브, IBK 기업은행 문화콘텐츠 금융부 등에서 방송, 게임, 영화 등 다양한 콘텐츠 기획 및 제작을 해왔다. 콘텐츠 제작과 금융 시스템에 정통한 콘텐츠 산업 전문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