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인포르메] 포도 열두 알과 '동방박사의 날'로 시작하는 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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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인포르메] 포도 열두 알과 '동방박사의 날'로 시작하는 새해
  • 최지윤 스페인 마드리드 통신원
  • 승인 2021.01.07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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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31일 자정 '카운트 다운'에 포도 한 알씩 먹는 이벤트
스페인 어린이들, 산타클로스 대신 '동방박사'에 선물 기대하기도
1월6일 '동방박사의 날' 축제, 100여년만에 가두 퍼레이드행사 취소
최지윤 마드리드 통신원
최지윤 마드리드 통신원

[오피니언뉴스=최지윤 마드리드 통신원]  나라마다 새해를 맞이하는 문화가 다르기 마련이다. 스페인에서는 12월 31일 자정인 노체비에하(Nochevieja)에 모든 가족이 TV 앞에 둘러앉거나 각 지역의 광장에 모여 열두 번의 종소리와 함께 포도 열두 알을 먹는다.

종이 울리는 박자에 맞게 포도알을 다 먹으면 행운이 넘치고 무탈한 한 해를 보낼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스페인 사람이라면 누구든 포도와 함께 한 해를 시작하는 것이 정석이다. 연말에 쇼핑 마트에 가면 연두색 포도가 멋지게 진열되어 있고, 아예 포도 열두 알을 따로 포장해 파는 패키지도 발견할 수 있다.

포도 열두 알의 해프닝

스페인에 온 후 첫 번째 신년을 맞이하던 몇년 전 12월 31일 밤, 어느 가정집 저녁 식사에 초대받았다. 손님이었지만 다들 열심히 음식을 준비하는 통에 필자도 그들을 도왔다. 즐겁게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새해가 10분 남짓 남았을 때였다. 친구 어머니가 주방에서 다급하게 소리치셨다. “포도알이 부족해. 분명히 사람 수에 맞게 샀는데.”

그 순간 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 장면이 있었다. 식사 준비를 도울 때 포도를 씻었는데 나는 당연히 여유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상태가 썩 좋지 않은 포도알을 쓰레기통에 주저없이 버린 것이었다! ㅜㅜ

새해 전야에 먹는 열두 개의 포도(Doce uvas). 마트에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다. 사진=uvasdoce.com, 최지윤 통신원
새해 전야에 먹는 열두 개의 포도(Doce uvas). 마트에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다. 사진=uvasdoce.com, 최지윤 통신원

실수했다는 사실에 정말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지만 어쩔 수 없이 그 사실을 가족들에게 조심스럽게 털어놓았다.  새해가 몇 분 안 남은 그 시점에 다시 포도를 살 수도 없어서 울며 겨자 먹기로 모두가 쓰레기통을 마구 뒤지기 시작했다. 그 작은 포도알을 찾겠다며 열 명이 넘는 가족이 쓰레기통 바닥까지 열심히 뒤졌다. 

다행히 버렸던 포도알을 모두 찾았는데, 시계를 보니 자정까지 2분밖에 남지 않았다. 물로 황급히 포도를 씻고 TV 앞에 앉아 종소리에 맞춰 포도알 열두 개를 모두 먹었다. 생각보다 종이 빠르게 울리기 때문에 박자에 맞춰 먹으려면 정말 온 힘을 다해서 씹고 삼켜야 한다.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포도를 잘 챙겨 먹은 덕분일까? 그 해를 원만하게 보낼 수 있었다.

자정이 되면 종이 열두 번 울리는데, 종이 울리는 박자에 맞게 포도알을 먹을 수 있도록 TV 프로그램에서 숫자를 함께 세어준다. 사진=rtve.es
자정이 되면 종이 열두 번 울리는데, 종이 울리는 박자에 맞게 포도알을 먹을 수 있도록 TV 프로그램에서 숫자를 함께 세어준다. 사진=rtve.es

새해에 포도를 먹는 스페인의 문화는 언제부터 생겨난 것일까? 이는 1893년 이전부터 마드리드의 일부 지역에서 이미 유행하고 있던 관습이라고 전해지고,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1909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1909년 12월에 포도를 재배하던 농부들이 이 문화를 대중화했고, 그 결과 잘 재배된 대량의 포도를 더욱 효과적으로 판매할 수 있었다. 전통에 따르면 포도 열두 개를 먹으면 1년 동안 행운과 번영을 누릴 수 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악귀와 마녀를 쫓아내는 힘을 지니게 된다고 여긴다.

매년 새해 축하 행사가 펼쳐지는 마드리드 푸에르타 델 솔 광장의 모습. 사진=okdiario.com
매년 새해 축하 행사가 펼쳐지는 마드리드 푸에르타 델 솔 광장의 모습. 사진=okdiario.com

'동방 박사의 날' 행사마저 취소

평소라면 마드리드의 상징과도 같은 '푸에르타 델 솔(Puerta del sol)' 광장에 새해를 축하하는 인파가 모였겠지만, 2021년에는 이 행사가 약 10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취소되었다. 한국의 ‘제야의 종’ 타종 행사가 67년 만에 취소된 것처럼 말이다.

1918년 ‘스페인 독감’의 대유행, 1936년 ‘스페인 내전’ 등 각종 자연재해, 인재에도 막지 못했던 신년 타종 행사가 코로나로 인해 이례적으로 무산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1885년 이후로 이어져온 마드리드의 ‘동방박사의 날’ 퍼레이드 역시 관중 없이 진행되는 바람에 많은 어린이가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동방박사의 날(Día de los reyes magos)’은 1월 6일에 기념하는 스페인과 라틴아메리카 국가의 공휴일로, 특히 어린이에게 의미가 큰 날이다. 신약성서에 따르면 예수가 태어난 후, 동방에서 세 명의 현자(영어권에서는 ‘왕’으로 번역되기도 하며, 스페인어로 ‘magos’라고 하는데 마법사, 마술사를 뜻함)가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베들레헴에 찾아와 선물을 주었다고 전해진다. 세 명의 박사 이름은 ‘멜키오르’, ‘가스파르’, ‘발타자르’로, 각각 황금과 몰약, 유황을 바쳤다. 따라서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의 어린이들 대부분은 산타클로스가 아닌 동방박사가 선물을 가져다준다고 믿는다.

이런 이유로 연말에는 많은 어린이가 동방박사에게 편지를 쓴다. 마치 우리가 어릴 때 산타클로스에게 멋진 선물을 받기 위해 편지를 쓰는 것처럼 말이다. 1년간 착한 일을 많이 하고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들은 아이는 원하는 선물을 받지만, 착하게 지내지 않은 아이는 석탄을 받는다.

이날에는 ‘로스콘(Roscón de reyes)’이라는 특별한 빵을 먹는데, 빵 안에는 ‘피구라(figura)’라는 작은 인형과 ‘아바(haba)’라는 콩이 들어가 있다. 피구라를 발견하는 사람은 한 해 동안 운이 좋을 것이며, 아바를 찾은 사람은 로스코의 값을 내야 한다는 문화도 있다.

로스콘은 보통 빵 사이에 달콤한 크림이 들어가 있다. 베이커리중에 로스콘 맛집으로 유명한 곳에서는 일찌감치 예약을 해야 간신히 구매할 수 있다. [사진=www.nestlecocina.es]
로스콘은 보통 빵 사이에 달콤한 크림이 들어가 있다. 베이커리중에 로스콘 맛집으로 유명한 곳에서는 일찌감치 예약을 해야 간신히 구매할 수 있다. 사진=www.nestlecocina.es

'동방박사의 날' 하루 전에 아이들은 동방박사가 여행 중에 잠시 먹을 수 있도록 우유와 쿠키를, 동방박사들이 타고 온 낙타를 위해 물을 각각 준비해 두고 선물을 기대하며 일찍 잠자리에 든다. 다음날인 동방박사의 날이 되면 어린이뿐만 아니라 성인들도 선물을 교환한다. 그래서 연말연시에는 쇼핑백을 손에 넘치게 가득 들고 선물을 사는 사람을 쉽게 볼 수 있다.

'동방박사의 날'이 특별한 것은 단순히 선물 교환의 의미뿐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매년 이날을 맞아 각 도시에서는 '카발가타(Cabalgata)'라고 하는 퍼레이드를 준비하는데, 실제 성경에 묘사된 대로 동방박사를 재현하기 위해 백인, 흑인, 황인을 섭외해 등장시킨다. 또한 기마대와 각 TV 방송사, 소방서를 비롯한 여러 단체는 뮤지컬을 방불케 할 정도로 화려한 분장을 하고 카발가타에 참여한다.

'카발가타' 행렬이 지나가면서 사탕, 초콜릿, 캐러멜 등 다양한 간식거리를 관중을 향해 던지기 때문에 아이들은 큰 비닐봉지나 우산을 들고 나간다. '카발가타' 행렬이 던져 주는 사탕을 받는 아이는 1년 내내 좋은 일이 가득하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세 명의 동방박사가 카발가타에 등장하는 모습. 많은 인파가 모이고 사탕을 여기저기 뿌리기 때문에 행사가 끝난 후에는 거리가 쓰레기로 넘쳐난다. 사진=20minutos.es, okdiario.com
세 명의 동방박사가 '카발가타'에 등장하는 모습(왼쪽). 많은 인파가 모이고 사탕을 여기저기 뿌리기 때문에 행사가 끝난 후에는 거리가 쓰레기로 넘쳐난다. 사진=20minutos.es, okdiario.com

'카발가타'는 약 2시간 동안 진행되는 긴 행사로, 투입되는 금액 또한 어마어마하다. 현지 얘기에 따르면 2020년 스페인 발렌시아의 '카발가타'에 사용된 금액은 총 90만유로(한화 12억 662만원)라고 한다. 이 금액을 지자체에서 모두 부담할 수 없기에 '카발가타'에 참여하는 여러 단체와 함께 나누어서 내며, 카발가타 참여 단체들은 매년 더 멋진 퍼레이드를 준비하기 위해 애쓴다. 

2021년 마드리드에서는 코로나로 인해 관중이 없는 '카발가타'가 처음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발렌시아에서는 많은 코로나 확진자가 발생하는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관중이 모이는 것을 지자체에서 막지 않아 국민의 공분을 사고 있다.

연말연시 축제 뒤에 쇼핑 세일 여전? 

보통 크리스마스와 새해 첫날이 지나면 집이나 길거리에 있던 장식을 걷어내고 일상으로 돌아가지만, 스페인에서는 이런 행사 등의 이유로 1월 6일까지 연말연시 분위기를 듬뿍 느낄 수 있다. 더불어 동방박사의 날 이후에는 백화점과 모든 상점에서 큰 세일을 시작한다.

평소 가격의 50% 이상 할인하는 곳이 대부분이어서 평소에 눈여겨봤던 제품을 싼가격에 구매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팔리지 않은 물건은 더 높은 할인율로 두 번, 세 번 세일을 진행하기에 온 국민이 쇼핑에 집중하느라 여념이 없을 정도이다.

크리스마스부터 동방박사의 날까지 중요한 공휴일이 이어지는 스페인의 새해. 단체 모임과 여러 모임이 많은 시기라서 사람들도 긴장을 늦췄던 탓일까. 잠시 주춤했던 코로나 확진자 수가 1월 5일 기준 일 1만6343명을 기록했다. 

앞서 스페인에서는 지난해 12월 27일 첫 번째 백신 접종을 시작했다. 스페인 정부는 1월부터 3월 초까지 요양원 거주자 및 근로자, 의료 전문가를 대상으로 예방 접종을 시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새해 전야 방송을 주관하던 어느 프로그램의 멘트가 기억에 남는다. “¡Hasta Nunca, 2020!(절대 다시 보지 말자, 2020년!).” 누구에게나 끔찍한 기억으로 남을 2020년이 지나갔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팬데믹을 잘 이겨내고 있는 전 세계에 새해에는 희망찬 일만 가득하길 바란다.

● 최지윤 통신원은 외국어로서의 한국어 교육을 전공했고, 국외 한국어 교육 사업을 담당하는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공공기관인 ‘세종학당(멕시코)’에서 근무했다. 현재 스페인 살라망카대학 한국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스페인어권 국가의 한국어 교육 전문가가 되기 위해 열심히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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