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동열의 콘텐츠연대기] ⑳ 전쟁때 만들어진 '꿈의 공장'...美 할리우드의 탄생 (하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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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열의 콘텐츠연대기] ⑳ 전쟁때 만들어진 '꿈의 공장'...美 할리우드의 탄생 (하편)
  • 문동열 레드브로스대표
  • 승인 2020.11.25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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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영화산업, 전쟁 특수로 급격히 성장
파산위기 워너 브라더스를 구한 독일 개 한마리
워너브라더스, 오늘날까지 이어진 영화산업 시스템 탄생시켜

 
문동열 레드브로스 대표.
문동열 레드브로스 대표.

[문동열 레드브로스 대표] 최초의 할리우드는 막 로스엔젤레스에 편입된 작은 시골 공동체였다. 당시 할리우드에는 뉴욕같이 영화사의 사무실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넓은 공터에는 촬영을 위한 야외 세트가 만들어졌고, 최초의 야외세트는 알 크리스티의 네스터 필름 컴퍼니의 뒷마당에 세워졌다. 

지금의 할리우드와는 다른, 약간은 초라하기까지했던 할리우드에 영화사들이 모이고, 일감이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당시 가장 큰 일감들은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던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당사자들에게는 처절하고 잔인한 전쟁이었지만 할리우드에게는 영감을 주는 원천이었다. (지금도 그건 그렇게 달라지지 않았다) 당시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해 유럽의 전쟁이라며, 비 개입 원칙을 고수하고 있었다. 

할리우드 역시 미국의 비 개입정책에 호응하며, 평화를 주장하는 영화를 제작했다. 그러다 1916년 독일 U보트의 어뢰 공격에 의해 영국 국적 여객선인 루시타니아호가 침몰되며 수 많은 미국인이 사망했다.

이 여객선에는 미국인 128명이 탑승해 있었고, 이 가운데 갓난아기까지 포함해 100여명의 미국인이 사망했다. 미국의 여론은 급격히 참전의 분위기로 몰려갔고, 할리우드 역시 이 분위기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유럽에서의 영화 제작이 곤란해진 유럽의 영화인들이 할리우드에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할리우드는 일약 세계 영화의 공장이 되기 시작했다. 

거기에 연합국의 정부들이 영화가 대중에 대한 선전 선동의 도구로 효과적임을 깨닫게 되고, 이의 제작을 할리우드 영화사들에게 의뢰하기 시작하면서 더욱 할리우드의 성장세는 빨라진다. 

1900년대 초반 초기의 할리우드 모습. 사진출처=위키피디아.
1900년대 초반 초기의 할리우드 모습. 사진출처=위키피디아.

아이러니하게도 20세기 최악의 전쟁이라 불리던 1차 세계대전이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 그리고 즐거움을 선사하는 ‘꿈의 공장’ 할리우드를 만들어낸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로 영화 산업의 주도권은 미국으로 완전히 넘어오게 되며, 미국은 세계의 영화 시장을 장악하며 현재의 모습이 만들어진다. 전쟁 전만 하더라도 미국의 영화 제작자들은 개척자 수준이었다. 시설은 열악했고, 자본은 부족했다.

하지만 이른바 할리우드 ‘전쟁 특수’는 미국의 영화 제작자들이 영화계의 거물로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고, 이렇게 성장한 영화 제작자들은 ‘스튜디오 시스템’이라 불리는 영화 기획, 제작, 배급이 결합된 할리우드 카르텔을 만들어 전 세계 영화 산업을 쥐었다 폈다 할 수 있게 된 것도 전쟁의 덕분이었다. (이 독과점 시스템으로 인한 세계 영화산업의 폐해와 이를 막기 위해 나선 미국 정부의 독과점 방지법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다루기로 한다)

유태인 이민자 4형제가 일궈낸 ‘워너 브라더스’

유태인 이민자 4형제 워너브라더스의 막내 잭 워너.  사진출처=위키피디아.
유태인 이민자 4형제 워너브라더스의 막내 잭 워너. 사진출처=위키피디아.

할리우드의 성장에는 수 많은 영화인들이 있지만, 그 중 초기 할리우드가 지금처럼 성장하는데 큰 역할을 한 형제들이 있었다. 바로 지금도 세계 영화계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워너 브라더스, 그리고 그 제국을 이끈 막내 잭 워너의 이야기다. 

그 형제들은 네 명의 무일푼 유태인 이민자 형제들이었다. 그들의 부모는 러시아 제국에서 캐나다로 이민을 온 이민자였고, 워너 브라더스의 막내 잭 워너는 항상 유명해지고 싶었다. 

잭의 형들은 당시 젋은 소자본 창업가들에게 인기있었던 창업 아이템인 영화관 사업으로 영화계에 뛰어들었다. 영화관 사업은 적당한 공간과 영사기만 있으면 되는 사업이었기에 이 사업의 잠재적 가치를 알아챈 많은 젊은 사업가들이 영화관 창업을 통해 영화 산업에 입문했다. 

처음에 잭은 영화 산업보다는 극장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에 더 관심이 있었다. 형들이 영화 필름을 갈아 끼우는 막간에 그는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며 돈을 벌었다.

1900년대에 들어 형들과 함께 본격적으로 영화관 산업에 참여한 그는 ‘대열차 강도’같은 오래된 영화를 보여주는 순회 극장을 시작으로 최신 영화를 구매 후 현지 극장을 임대하여 동시에 개봉하는 이른바 ‘극장 네트워크’ 시스템을 구축했다 (현재 멀티플렉스의 선조 격이다). 

이들의 극장 네트워크는 점점 커져갔고, 자체 유통회사를 만드는 등 형제들에게는 사업운이 따랐다. 승승장구가 이어지자 그들은 지역을 제패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전 세계를 시야에 두기 시작한다.

1917년 처음 로스엔젤레스에 도착한 잭 워너는 ‘독일에서의 4년’이라는 주독 미국대사의 회고록의 영화 판권을 구입했고, 이들이 제작한 영화는 당시의 반독 정서에 힘입어 큰 흥행을 기록한다. 

1923년 할리우드에 자리잡은 워너 브라더스 버뱅크 스튜디오. 사진출처=위키피디아).
1923년 할리우드에 자리잡은 워너 브라더스 버뱅크 스튜디오. 사진출처=위키피디아.

이후 시대를 잘 읽어 연속된 흥행을 기록한 잭 워너의 ‘선구안’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워너 브라더스는 이 영화를 통해 미국 영화계의 주류로 뛰어올랐고, 다음해인 1918년 워너 브라더스 웨스트 코스트 스튜디오를 결성하며 본격적인 워너 브라더스 시대를 열어간다.

전쟁이 끝난 1923년 사명을 지금까지 잘 알려진 워너 브라더스로 바꾸고 본격적으로 할리우드에 둥지를 틀며 ‘엔터테인먼트 제국의 황제’로 군림한다.

당시 워너 브라더스는 작은 중소 제작사들과는 격을 달리하는 대형 제작사였다. 워너 브라더스는 할리우드의 지배자였고, 잭은 폭군이었다. 독선적이고 거칠었던 그는 선구안은 높았지만, 잭의 독선과 아집은 종종 많은 사람들과 충돌을 일으켰다.

공격적이고 본능에만 의존하는 그의 경영방식으로 인해 워너 브라더스는 늘 파산의 위협에 시달렸고, 할리우드에 본격적으로 자리잡은 1923년에는 거의 망한 상태에 가까웠다. 

만일 워너가 이 상태로 1,2년만 더 지났으면 지금의 워너는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워너는 뜻밖의 구원자를 만난다. 그 구원자는 사람이 아니었다.

독일서 온 세퍼드가 구한 '워너 브라더스'?

파산 상태의 워너를 구한 건 바로 한마리의 개였다.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수컷 저먼 세퍼드였다. ‘린틴틴’의 이름이라는 이 개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참전한 미군 병사 하나가 독일에서 구조해온 강아지였다. 

멋진 외모에 똑똑했고, 사람들의 말을 잘 들었던 린틴틴은 최고의 동물 배우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고, 곧 할리우드의 각종 무성영화에 동물 배우로 캐스팅되었다. 잭 워너는 린틴틴을 주연으로 한 동물 영화를 기획했고, 이렇게 만들어진 영화가 바로 ‘Where the North Begins’였다.  

이 영화 한편으로 워너 브라더스는 파산의 위기를 벗어난다. 이후 린틴틴은 27개가 넘는 할리우드 영화에 출연하며 전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고, 린틴틴의 인기가 높아지면 높아질 수록 워너 브라더스의 금고는 풍족해져 갔다. 그래서 워너의 직원들은 린틴틴을 종종 ‘모기지 리프터 (파산 구제자)’로 불렀다고 한다. 

여담으로 당시 린틴틴의 인기를 가늠할 수 있는 장면. 1929년 아카데미 시상식 심사위원들이 진지하게 남우주연상 후보 선정시 린틴틴을 놓고 격론을 벌였다. 심사위원회의 많은 사람들은 린틴틴이 남우주연상을 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으나, 아카데미 상이 웃음거리로 전락할 수 있다고 생각한 몇몇 보수적인 심사위원들에 의해 린틴틴은 노미네이트 조차 되지 못했다. 

린틴틴의 첫 주연 작품 “Where the north begins”의 포스터. 사진출처=위키피디아.
린틴틴의 첫 주연 작품 “Where the north begins”의 포스터. 사진출처=위키피디아.

린틴틴의 영화들은 워너 브라더스를 살리고, 영화계 퇴출위기에 몰렸던 잭 워너가 영화계 거물자리를 유지하는데 결정적 도움을 줬다. 하지만 린틴틴 영화들을 기획한 직원들은 그렇게 큰 대우를 받지 못했다. 초기 프로젝트를 기획한 대릴 재넉은 잭 워너와 늘 충돌했고, 그는 잭 워너에 대한 혐오로 퇴사하여 다른 회사로 옮기게 되는데, 이 영화사가 나중에 20세기 폭스사가 된다.

그러나 워너 브라더스의 부활과 함께 할리우드 영화산업도 안정화된다, 린틴틴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워너 브라더스는 다시 파산의 위협에 시달리지 않고 새로운 영화를 개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워너 브라더스는 R&D에도 관심을 가졌다. 영화 제작에 쓰이는 다양한 하드웨어를 개발하는데에도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워너 브라더스는 영화계의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었고, 워너 브라더스의 힘은 기획, 제작, 배급, 유통 등 영화계의 모든 곳에 미치게 되었다. 특히 워너 브라더스가 힘을 기울였던 것은 스튜디오의 확대였다.

작은 영화사들을 흡수하여 내부 스튜디오화를 시키는 워너 브라더스의 노력은 지속적인 영화 공급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워너 브라더스는 괜찮은 스튜디오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갖고 싶은 것이면 비겁한 수를 써서라도 확보했다. 

이러한 워너 브라더스의 승자독식 전략은 당시 영화계의 엄청난 비난에도 불구하고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워너 브라더스의 확대와 함께 워너 브라더스에 반기를 들고 나온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른바 빅 5로 불리는 5대 대형 영화사 (워너 브라더스, 파라마운트, 20세기 폭스, MGM, RKO)들이 할리우드에 자리를 잡게 된다. 할리우드는 이제 명실상부한 영화의 메카로 자리잡게 되었다.

1984년부터 사용 중인 워너브라더스의 로고. 워너 브라더스의 로고. 사진출처=워너브라더스 홈페이지 캡쳐.
1984년부터 사용 중인 워너브라더스의 로고. 워너 브라더스의 로고. 사진출처=워너브라더스 홈페이지 캡쳐.

할리우드의 탄생에 워너 브라더스가 끼친 영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무성 영화 시대를 지나 유성 영화 시대를 이끈 영화 ‘재즈 싱어’를 만든 것도 워너 형제들이었고, 이는 곧 영화계의 혁명이 되었다. 그들이 영화 R&D에 쏟은 정성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워너 브라더스는 계약에 따라 스타를 고용하고, 소유한 스튜디오에 제작하여 저작권을 완전히 보유한 작품을 스튜디오가 소유한 극장에서 배포하는 산업화된 영화 제작·유통 시스템을 만들어 냈고, 이러한 영화 산업 시스템은 헐리우드 뿐만 아니라 현재의 모든 영화 산업의 기본이 됐다.

●문동열 레드브로스 대표는 일본 게이오대학 대학원에서 미디어 디자인을 전공하고, LG인터넷, SBS콘텐츠 허브, IBK 기업은행 문화콘텐츠 금융부 등에서 방송, 게임, 영화 등 다양한 콘텐츠 기획 및 제작을 해왔다. 콘텐츠 제작과 금융 시스템에 정통한 콘텐츠 산업 전문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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