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동열의 콘텐츠연대기] ⑱ 전쟁, 프로파간다 그리고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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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열의 콘텐츠연대기] ⑱ 전쟁, 프로파간다 그리고 영화
  • 문동열 레드브로스대표
  • 승인 2020.10.30 11: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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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산업의 혁신, 휴대용 카메라 등장
단편 전쟁다큐 '뉴스릴'로 전쟁 소식 전해
참전국, 영화의 선전선동 효과 매료돼
전쟁이 부흥시킨 현대 영화산업
문동열 레드브로스 대표.
문동열 레드브로스 대표.

[문동열 레드브로스 대표] 영화 콘텐츠의 시작은 알다시피 지금의 영화 산업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스토리 영화가 아니었다.

직장에서 퇴근하는 사람이나 열차가 역에 들어오는 모습 등 사람들의 일상이나 우리 주변의 풍경을 다룬 일종의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기존의 무대 예술이나 특히 연극의 요소가 결합이 되며, 스토리텔링을 중시하는 극영화의 방향으로 영화 콘텐츠가 발전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초창기 다큐멘터리풍의 필름은 기존의 종이로 된 뉴스, 즉 뉴스 페이퍼를 대신하는 뉴스 릴 (news reel)이라는 또 다른 방향으로 발전해 나갔다.

뉴스 릴은 말 그대로 뉴스를 담은 짧은 영화 필름으로, 1960년대 이후 TV 뉴스가 뉴스 릴을 빠르게 대체하기 전에는 유일한 영상으로 된 뉴스 매체였다. 

뉴스 릴은 영화를 이용해 뉴스를 전한다는 아이디어에서 시작했다. 하지만 초창기 영화 촬영 장비들은 휴대성을 비롯해 뉴스를 만들기에는 그렇게 적합하지 않았다. 뉴스라는 것이 현장을 찾아다니며 소스를 촬영해야하는 것이라 휴대하기에 간편하고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그런 카메라가 필요했다. 

1919년 제1차세계대전 당시, 전장에서 촬영중인 영국 군인 모습. 출처=영국 문서보관소 홈페이지 캡쳐.
1919년 제1차세계대전 당시, 전장에서 촬영중인 영국 군인 모습. 출처=영국 문서보관소 홈페이지 캡쳐.

전장에 들어간 카메라

1909년 폴란드의 발명가 카지미에쉬 프로쉰스키(Kazimierz Prószyński)가 만든 아에로스코프(Aeroscope)가 바로 그런 카메라였다.

1894년에 이미 프로젝터와 카메라를 결합한 새로운 개념의 카메라인 플레오그라프(Pleograph)를 발명했던 그는 1909년 아에로스코프라는 휴대용 카메라를 발명했다. 우선 아에로스코프는 촬영자가 두 손으로 들고 촬영할 수 있을 정도로 작았다.

거기에 당시의 카메라들이 대부분 크랭크를 돌려 촬영해야만 했던 것에 반해 크랭크 조작을 하지 않아도 촬영이 가능했다. 덕분에 촬영자들은 빠르게 피사체를 촬영할 수 있었고, 이는 정해진 동선에 따라 움직이는 영화 현장에서보다 피사체의 움직임을 예측할 수 없는 뉴스 릴이나 특히 군사목적의 항공 촬영에 많이 쓰였다.

Aeroscope를 들고 달리는 마차에서 촬영 중인 발명가 Prószyński. 출처=위키피디아.
Aeroscope를 들고 달리는 마차에서 촬영 중인 발명가 Prószyński. 출처=위키피디아.

각 국의 군대는 빠르게 정찰 영상을 얻을 수 있는 아에로스코프를 군용으로 채용했고, 군용으로 활용되기 시작한 아에로스코프는 정찰 영상 외에도 군대의 모습이나 활동상을 담는 용도로도 많이 사용되기 시작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군에 퍼져있던 아에로스코프가 찍은 다양한 전투 장면들이 뉴스 제작자들에게 공급되기 시작했고, 이 영상들은 뉴스 릴이라는 형태로 일반 관객들에게 상영되기 시작했다.

주로 전시 선전의 목적으로 만든 애국심이 넘쳐나는 선전 뉴스 릴들 이기는 했지만, 군인이 아니면 볼 수 없었던 전장의 생생한 화면들은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었고 뉴스 릴은 그간 신문이 차지해왔던 뉴스 미디어의 한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사진왼쪽)최초의 휴대용 카메라인 아에로스코프(Aeroscope). 이 휴대용 카메라를 들고 종군 중인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카메라맨들. 출처=위키피디아.
(사진왼쪽)최초의 휴대용 카메라인 아에로스코프(Aeroscope). 이 휴대용 카메라를 들고 종군 중인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카메라맨들. 출처=위키피디아.

뉴스 릴, 전쟁을 보여주다

뉴스 릴은 단지 영상을 대중들에게 공급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뉴스 릴이 가져다 준 가장 큰 혜택은 대중들 특히 이전까지 미디어와 거리를 둘 수 밖에 없었던 하층민들에게 까지 깊숙하게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지식 계층들이야 신문같은 매체를 통해 정보를 얻을 수 있었지만, 아직 국가적인 의무 교육이 자리잡지 못했기에 문맹자가 의외로 많았던 노동자 계층들에게 있어 신문은 그리 친숙한 매체가 아니었다. 영화 자체가 노동자 계급에게 인기있던 엔터테인먼트였기에, 뉴스 릴은 금방 노동자 계급을 포함한 하층민들에게 퍼져 나갔다. 

[1920년대 미국 메이저 뉴스릴 배급사였던 Fox Movietone에서 만든 1차세계대전 뉴스릴. 1차세계대전 당시의 뉴스릴은 무성영화였으나, 이후에 만들어서 나레이션과 음악이 들어가 있다. 출처=유튜브]

뉴스 릴이 대중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각 국의 정부는 전쟁 지원이나 각종 국가 정책을 알리는 데 뉴스 릴을 활용하기 시작한다. 이전까지는 민간의 영역이었던 뉴스 릴이 점점 국영 또는 공영화 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시기이다.

현재에 와서도 뉴스 릴은 민영 언론사가 아닌 보통 정부 기관이나 공공 통신사에서 만들어 각 영화관에서 배포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의 예를 들면 예전에 공보처 산하 국립영상제작소에서 만든 ‘대한 뉴스’가 대표적이다.

한국의 국영 뉴스릴이었던 대한뉴스는 해방 직후인 1945년 8월부터 1994년 12월까지 무려 반 세기에 가깝게 상영되었다. 모든 영화를 보기 전에 의무적으로 상영해야 했던 만큼 당시에는 지금 영화관에서 보기도 싫은 극장 광고를 보는 것처럼 정부에서 만든 뉴스 릴을 무조건 봐야만 했다. 

1909년 아에로스코프의 발명 이후 뉴스 릴은 영화의 훌륭한 한 분야로 거듭난다. 특히 각 국의 정부는 뉴스 릴과 선전 영화들이 자신들이 무의미하게 벌이고 있는 전쟁을 가장 이상적으로 포장할 수 있는 좋은 도구라는 것을 곧 깨닫게 되었다.

1915년에 들어 많은 국가의 전쟁 관련 부처에서는 국민들의 전쟁에 대한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 영화를 본격적으로 활용하기 시작 한다. 영화 제작자는 적을 비방하고 병사들에 대한 동정심을 자극했다. 다른 영화는 승리의 소식을 전하며 국민들을 안심시키고, 전쟁 채권을 사 애국심을 증명하도록 권했다. 몇몇 군인들은 과대한 스토리로 전쟁 영웅으로 포장되어 사람들에게 큰 관심과 인기를 끌었다. 

전시 채권 판매회에 동원된 메리 픽포드, 그녀는 미국인의 연인으로 불리우며 당시 최고 인기의 여배우였다. 출처=위키피디아.
전시 채권 판매회에 동원된 메리 픽포드, 그녀는 미국인의 연인으로 불리우며 당시 최고 인기의 여배우였다. 출처=위키피디아.

전쟁의 포연과 함께 성장한 영화 콘텐츠 산업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은 콘텐츠 역사에 있어 영화 산업을 중심으로 한 콘텐츠 산업이 막 성장하려고 하는 시기였다. 콘텐츠 시장으로의 자본과 인력의 유입이 활발해졌고, 전세계적으로 영화와 음반 제작이 조금식 활성화되려 하던 시기였다.

전 세계 콘텐츠 산업에서 중요한 생산 기지이자 소비 시장이었던 유럽의 각 국들이 전화(戰火)에 휩싸이자, 콘텐츠 산업은 급격히 위축되었다. 이러한 콘텐츠 시장의 침체 속에서 각국의 유명한 영국의 유명한 코메디 배우이자 영화 제작자인 찰리 채플린을 비롯한 당대의 유명한 영화 배우와 제작자들도 이 시기 어차피 팔리지도 않는 일반 대중 영화보다는 ‘애국적인’ 선전 영화의 제작에 앞다투어 참여를 했다. 

영화를 전쟁 선전 영화로 활용하기 위한 아이디어에 가장 적극적인 나라는 미국이었다. 전장의 한 복판이었던 유럽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가 덜했던 미국이기도 했지만, 당시 세계 영화의 주도권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넘어가고 있던 참이기도 했다.

당시 미국 재무부 장관이었던 맥아두는 전시 채권 판매를 위해 공격적인 방식을 사용했다. 미국 정부는 유명한 예술가를 동원한 대형 쇼 등의 볼거리를 통해 일반 국민들이 전쟁을 마치 엔터테인먼트를 즐기듯 소비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이는 아주 효과적이었고, 정부는 영화가 주는 놀라운 선전선동의 효과에 만족했다. 역설적으로 이는 영화 산업이 전례없이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찰리 채플린의 작품만큼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1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참전국의 대부분은 이러한 선전영화들을 제작했다. 선전 영화들은 대중들에게 빠르게 메시지를 전파했고, 그 효과는 아주 훌륭했다.

비용도 그렇게 많이 들지 않았다. 영화가 대중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에 눈을 뜬 각 국은 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이후 오락적인 측면 외에도 선전 선동의 수단으로도 활용하기 시작한다.

선전 선동을 위한 더 정교하고 치밀한 편집 기법과 기술들을 개발하면서 영화 산업 역시 동시에 성장했다. 특히 1920년대와 1940년대까지 20년간 영화 산업의 발전은 이러한 국가 차원에서의 영화 산업 지원이 견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유례없는 참혹한 전쟁이었던 1차 세계대전, 그 참혹함을 숨기고 애국심으로 전쟁 자금을 마련했던 정부, 여기에 현혹되어 애국심 하나로 참혹한 전장으로 자원한 젊은이들. 프로파간다로 활용되기 시작한 영화는 또 하나의 영화 산업의 흑역사를 만들어 냈다.

●문동열 레드브로스 대표는 일본 게이오대학 대학원에서 미디어 디자인을 전공하고, LG인터넷, SBS콘텐츠 허브, IBK 기업은행 문화콘텐츠 금융부 등에서 방송, 게임, 영화 등 다양한 콘텐츠 기획 및 제작을 해왔다. 콘텐츠 제작과 금융 시스템에 정통한 콘텐츠 산업 전문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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