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현진 칼럼] 한국은행 일제 잔재, 알고나 철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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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현진 칼럼] 한국은행 일제 잔재, 알고나 철거하자
  • 차현진 한국은행 연구조정역
  • 승인 2020.10.26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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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총에 쓰러진 이토 히로부미의 정초석
방치하다가 뒤늦게 '철거' 논란...'역사적 사실' 안내문 있어야
이토의 '정초석', '대한제국 병탄' 장기 야욕 포석 같은 것
우리도 강직한 공직자 나올때까지 '극일(克日) 향한 와신상담' 삼아야
차현진 한국은행 연구조정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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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현진 한국은행 연구조정역] 111년전인 오늘(10월26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쓰러졌다. 때마침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사적 제280호)의 정초석(定礎石)을 두고 시끄럽다. 정초석의 글자가 이토 히로부미의 친필임이 확인되자 일제 잔재를 철거하자는 의견과 교훈삼아 남겨두자는 의견이 팽팽하다. 한국은행이 “가급적 빨리 해결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것 같다.

그런데 그 처리방향을 둘러싼 지금의 논의는 잘못되었다. 누가(who) 썼는지에만 초점을 맞추면서 왜(why)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당시 일본 추밀원(천황 자문기구)의 의장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는 왜 정초석에 필적을 남겼을까? 이에 대한 해답을 모르면, 그것의 처분을 둘러싼 모든 논의는 무의미해진다.

이 글은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이다. 미리 밝히건대, 필자는 역사학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정초석의 처분방향에 관하여 어떤 해법도 제시할 입장이 아니다. 그러나 일찍이 2015년 말 언론(중앙SUNDAY, 『중앙은행 별곡』)을 통해서 그 정초석의 글자가 이토 히로부미의 휘호임을 독자들에게 알렸고, 그 글 때문에 지금의 논란이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결자해지의 자세로 국민들께 한 말씀 드리고자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초석을 철거하거나 이동할 이유는 없다. 안내판만 설치하면 충분하다. 문화재청과 한국은행이 지금까지 그 간단한 일조차 하지 않았던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너무 게으르고 역사의식이 궁핍하다.

전용기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12일 국정감사에서 한국은행 본점 화폐박물관(옛 조선은행 본점) 있는 정초석이 일본 초대 총리인 이토 히로부미의 친필임을 입증하는 사료를 제시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전용기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12일 국정감사에서 한국은행 본점 화폐박물관(옛 조선은행 본점) 있는 정초석이 일본 초대 총리인 이토 히로부미의 친필임을 입증하는 사료를 제시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한국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이권 관리자'

잘 알려진 대로 20세기 초 일본의 국권 침탈과정에서 중심을 차지하는 것이 을사늑약이다. 그 조약이 체결된 1905년 11월은 유난히 스산해서 ‘을씨년(을사년)스럽다’는 말이 나왔는데, 조약의 내용도 스산했다. 대한제국의 재정·외교·치안에 관한 주권이 사실상 일본으로 넘어가고, 한국에 일본의 행정조직인 ‘통감부’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1906년 3월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統監)으로 부임했다.

한국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는 대한제국을 향한 일본의 이권개입을 적절히 통제하는 것이었다. 첫 번째 통제대상은 이토의 후배인 가쓰라 다로(桂太郎) 총리였다. 가쓰라는 조선을 하루빨리 힘으로 병합하려고 했다. 조선에서 중요한 이권사업을 직접 챙기려던 속셈이었다.

가쓰라의 욕심은 실로 대단했다. 을사늑약을 성사시킨 뒤 장차 조선에서 추진될 거대한 이권사업을 거머쥐고자 총리직을 사임할 정도였다. 가쓰라는 조선에서의 이권사업(식산사업)을 민간 기업이 독점토록 하고, 그 사업을 추진할 ‘동양협회’를 자신이 창설한 뒤 회장으로 취임했다(1907년). 그 동양협회가 세운 첫 번째 자회사가 동양척식주식회사(1909년)였다. 아직 한일 강제병합이 완성되기 전이었다.

이토의 두 번째 통제대상은 그의 죽마고우였던 시부사와 에이이치(渋沢栄一)였다.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시부사와는 여러 가지 사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는데, 그의 사업체 중에는 한국에서 영업하는 제일은행도 있었다.
일본 제일은행은 가쓰라 총리의 지시에 따라 1904년부터 이미 한국에서 사실상의 발권은행 역할을 하고 있었다. 시부사와는 홍콩의 홍콩상하이은행을 모델로 삼아 장차 한일 강제병합 후에도 그 지위를 유지하고 싶어 했다(홍콩상하이은행은 지금도 홍콩의 발권은행이다). 그래서 친구인 이토가 한국통감으로 부임하기 직전 자신의 별장으로 초대했다.

시부사와 에이이치 은행장의 얼굴이 그려져 한국에서 유통되었던 일본제일은행권.
시부사와 에이이치 은행장의 얼굴이 그려져 한국에서 유통되었던 일본제일은행권.

도쿄 북쪽에 있는 그 별장(曖依村荘)은 도연명의 시 「귀거래사」의 한 구절(曖曖遠人村, 依依墟里煙)에서 이름을 따왔을 정도로 운치가 있고 은밀하여 유력인사에게 로비하는 장소였다. 그 자리에서 시부사와는 이토를 극진하게 대접한 후 자신의 사업구상을 밝혔다.

(구)한국은행 설립은 이토의 승부수

이토는 매우 신중한 인물이었다. 한국 유생(儒生)들의 저항이 대단히 클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강제병합을 서두르지 않아야 한다고 믿었다. 한국에 도착해서도 현지 일본인들에게 “합병을 하면 심히 귀찮아진다. 한국(대한제국)은 자치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속내를 밝혔다(1907년 7월 일본인 구락부 초청 연설). 그래서 침탈을 서두르는 가쓰라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이토는 동양척식주식회사가 한국에서 토지개발사업을 순조롭게 진행하려면, 조선인을 경영진으로 내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본의 권업은행(勸業銀行)처럼 동양척식회사도 공공기관(한국인 주주 허용)의 성격을 갖추어야 일본인들의 속내를 감출 수 있기 때문이다.

이토가 보기에 가쓰라의 실수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민간은행이 중앙은행 역할을 하는 것이 일본에서 용납되지 않는다면 한국에게도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이 이토의 판단이었다. 일본 제일은행대신 대한제국 정부가 중앙은행을 따로 설립토록 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친구인 시부사와의 청탁을 냉정하게 잘랐다. 시부사와의 별장에서 이토는 “자네가 조선에서 금융업을 확장하려면, 당장 본점을 조선으로 옮기게”라며 별장주인의 부탁을 거절했다. 조선인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면, 조선에 더 많이 투자하고 조선의 은행이 되라는 말이었다.

도쿄 북부의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별장터(曖依村荘)를 방문한 필자. 중앙은행 역할을 둘러싼 이토와 시부사와 간의 팽팽한 대화를 상상했다.
도쿄 북부의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별장터(曖依村荘)를 방문한 필자. 중앙은행 역할을 둘러싼 이토와 시부사와 간의 팽팽한 대화를 상상했다.

서울의 이토와 도쿄의 가쓰라가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는 도중에 결국 일이 터졌다. 1909년 2월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총재로 임명된 우사가와 가즈마사(宇佐川一正) 육군 중장이 60명의 사원들에게 육군 제복을 입히고 위풍당당하게 칼을 짤그랑거리며 서울 거리를 행진한 것이다. 그 모습을 본 서울 시민들은 크게 격분했고, 전국적으로 배일운동이 시작되었다.

이토와 가쓰라는 그 사태의 책임이 상대방에게 있다며 서로를 탓했다. 그러다가 절충점을 찾았다.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한국권업은행’으로 전환하는 것을 포기하는 대신 대한제국에도 중앙은행(한국은행)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이토와 가쓰라가 하나씩 양보한 셈이었다.

그리고 이토는 한국통감직을 사임하고, 추밀원(천황 자문기구) 의장직을 맡기로 했다. 한국에서 3년이면 충분했다. 그 인사발령은 1909년 6월 14일 내려졌지만, 이토는 7월말까지 귀국을 늦췄다. 귀국하기 전에 끝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한제국의 중앙은행 즉, 한국은행(구 한국은행)의 설립을 마무리 짓는 것이었다.

그전까지 일본의 수뇌부는 조선에 중앙은행 따위는 필요 없다고 생각했었다. 일본의 이익추구에 장애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1903년 고종이 러시아의 도움으로 대한중앙은행을 설립하려고 할 때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방해했으며, 1904년에는 일개 상업은행인 제일은행에게 조선에서 은행권을 발행토록 했다. 그 흐름을 뒤집은 것이 이토 히로부미였다.

그러므로 이토 히로부미가 보기에 한국은행의 설립은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그가 한국에서 이룬 최대 치적이었다. 그래서 그는 건물 정초식에 참석하는 것을 한국에서의 마지막 공식일정으로 잡았다. 7월 10일 창덕궁 인정전에서 순종에게 귀국인사를 올리고 다음날인 11일 정초식에 참석했다. 7월 31일에는 마침내 ‘한국은행조례(한국통감부 고시 제78호)’가 제정되었다. 한국은행 즉, 대한제국의 중앙은행을 설립하고 일본 제일은행이 한국에서 보유하고 있던 모든 자산과 부채를 인수토록 한다는 내용이었다.

법적 성격이 애매했던 정초식 행사

1909년 7월 11일 지금의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자리에서 열린 ‘정초식’은 외견상 일본 제일은행 한국총지점(한국본부)의 새 건물에 머릿돌을 놓는 행사였다. 은행장 시부사와는 1907년부터 새 건물을 짓고 있었다. 이토의 훈수를 따라 조선인들이 깜짝 놀랄 만큼 큰 건물을 짓고 영업을 확장하려던 것이다.

그런데 사정이 바뀌어 그 건물은 조만간 (구)한국은행에게 인계될 예정이었다. 당일 행사주체인 일본 제일은행 관계자들은 아마 그 사정을 몰랐겠지만, 이토 히로부미는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토는 자기가 ‘한국은행 본점 정초식’에 참석한다고 생각했다.

그때 이토의 옆자리에는 새로운 한국통감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가 앉아있었다(소네는 부(副)통감에서 통감으로 승진했다). 그는 가쓰라 총리의 지시에 따라 이미 한일 강제병합의 마지막 작업에 착수했다. 그가 보기에 대한제국은 곧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조선총독부가 지휘하는 발권은행(조선은행)이 들어설 예정이었다. 그러므로 소네는 자기가 ‘조선은행 본점 정초식’에 참석한다고 믿었다.

결국 7월 11일 한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한창 공사 중인 건물의 주인이 누구인지 서로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일본 제일은행이냐, (구)한국은행이냐, (곧 등장할) 조선은행이냐?

1909년 7월 11일 일본 제일은행이 준비했던 ‘정초’ 동판.
1909년 7월 11일 일본 제일은행이 준비했던 ‘정초’ 동판.

그 행사에 손님으로 참석했던 이토 히로부미는 은삽(銀鏝)에 시멘트를 발라서 주최 측이 준비한 동판을 벽에 붙였다. 그 동판에는 ‘주식회사 제일은행 한국총지점’이라는 글자가 있었다. 그것은 이토가 인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 자리에서 새로운 휘호를 선물로 주겠다고 약속했다. 동판을 떼어내고 새로 붙이라는 암시였다.

이토 히로부미 휘호의 전말

그날 집으로 돌아온 이토는 정초석에 새길 휘호를 썼다. 한국에서의 마지막 묵서(墨書)이었다. 그 끝에 ‘메이지(明治) 42년 7월 11일 공작 이토 히로부미’라고 적었다.

원래의 동판과 대체되어 오늘날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에 남아있는 그 휘호는, 이토의 이중성을 보여주는 증거다. 그동안 그는 한국인들에게 대한제국의 법적지위를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가 감수한 ‘한국은행조례’에도 한국은행의 영업권을 50년으로 규정했는데, 이는 대한제국이 최소 50년은 유지된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융희(隆熙)’가 아닌 ‘메이지’를 연호로 적은 것은 ‘융희’라는 연호가 결국 사라진다는 암시였다.

‘공작(公爵)’이라는 직위도 마찬가지다. 그의 공식 직함은 ‘한국통감’이었으므로 대한제국에 남기는 휘호에는 ‘전(前)통감’이라고 하는 것이 옳았다. 그런데 ‘공작’이라고 쓴 것은, ‘장차 나라가 병합되어 통감이라는 명칭은 사라지고 너희는 나를 귀족으로 기억하리라’는 암시였다.

이토 히로부미의 휘호와 현재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의 정초석.
이토 히로부미의 휘호와 현재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의 정초석.

그 후 이토는 일본으로 건너갔다. 떠나는 이토에게 순종은 도쿄로 유학 간 황태자(영친왕)의 보육총재(保育總裁) 직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석 달 뒤인 1909년 10월 26일 이토는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했다.
이토가 죽은 뒤 한일 관계는 급물살을 탔다. 열 달 뒤인 1910년 8월 마침내 한일 강제병합이 이뤄지고, 1911년 2월에는 기존의 (구)한국은행이 조선은행으로 슬쩍 이름이 바뀌었다. 대한제국의 흔적을 일본이 말끔히 지워버린 것이다.

해방이 되자 이번에는 우리가 이토의 흔적을 말끔히 지웠다. ‘메이지(明治) 42년 7월 11일 공작 이토 히로부미’는 느닷없이 ‘융희 3년 7월 11일’로 둔갑했다. 아주 조악한 필체였다. 아마 조선은행 직원의 조작이라고 추정된다. 그 무렵 조선은행 직원들은 벚꽃과 일장기가 그려진 휘장을 무궁화와 태극 모양으로 슬쩍 바꾸기도 했다. 일제의 ‘적산(敵産)’이라고 비판을 받았던 터라 민족의 편에 서고 싶었던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의 휘호, 치욕인가 교훈인가

여기까지가 필자의 연구다. 이토는 분명 우리 민족의 원흉이다. 그를 생각하면 필자도 주먹을 움켜쥐게 된다.

그러나 그가 ‘정초’라는 휘호를 쓸 때 그의 마음속에는 두 가지 생각이 공존했다. 대한제국을 당분간 존속시키고 그것을 위해 번듯한 중앙은행을 세운다는 것과 결국 대한제국은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가 없었으면, 대한제국의 중앙은행도 없었다.

그러므로 이토의 휘호에 대한 평가도 두 가지가 될 수밖에 없다. 가쓰라와 대비되는 온건주의자 이토와 안중근 의사와 대비되는 침략주의자 이토다.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건물 밖에 남아 있는 그의 흔적을 살필 때는 그 두 가지를 함께 읽어야 한다. 그것이 올바른 역사해석이다. 무조건의 파괴는, 탈레반 식의 반달리즘(vandalism)에 불과하다.

제국주의 일본 안에서 서열 1위는 천황이고, 2위는 총리였다. 조선총독은 6위였다. 비록 현직 총리의 대선배였지만, 이토는 가쓰라 총리보다 서열이 낮았다. 그런 이토가 총리의 이권개입에 저항하고 죽마고우의 정중한 청탁을 거부했다. 그만큼 공직자 이토는 강직했다. 우리나라 공직자 중에서 이토보다 강직하다고 자부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한국은행의 정초석을 돌덩이로 보면, 문자 그대로 즉물적이다. 그것을 평가할 때는 그 정신까지 읽어야 한다. 건물만 남기고 정초석을 지우는 것은, 이토 히로부미만큼이나 이중적이며 즉물적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은행 정초석은 없앨 수 없다. 역사는 범죄가 아니다. 물증을 없애더라도 역사는 지워지지 않는다. 어차피 기억될 역사라면 정확히 기억하고, 교훈을 얻어야 한다. 이토에 견줄 수 있는 강직한 공직자가 충분히 나올 때까지라도 그 정초석은 필요하다. 정초석에 관한 안내판을 읽는 것은 극일(克日)을 향한 와신상담이 될 것이다.

필자의 사무실은 화폐박물관의 정초석을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그래서 필자는 매일 아침 그것을 바라보면서 이토 히로부미와 그를 넘어서는 공직자 상을 그린다. 그것이 필자의 역사의식이다.

● 차현진 한국은행 연구조정역은 한국은행에서 36년째 근무하고 있는 금융전문가다. 한국은행 조사부, 자금부, 금융시장국 등 정책관련 부서를 거쳤고 워싱턴사무소장, 인재개발원장, 금융결제국장, 부산본부장 등을 역임했다. 대통령비서실과 미주개발은행(IDB) 등에서도 근무했다. '애고니스트의 중앙은행론', '숫자 없는 경제학', '금융오디세이', '중앙은행 별곡', '법으로 본 한국은행' 등 다수의 저서를 집필한 금융 에세이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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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환 2020-10-31 15:16:22
차현진 선생님 글 감명속에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 자주 접하길 기대합니다.
그리고 글 가운데 시부사와 별장 이름 유래가 귀거래사에서 가져왔다하셨는데 도잠의 비슷한 시 귀원전거에서 따온 것이지요. 확인 바랍니다.
글을 써다 보면 미쳐 확인 못하는 경우가 있지요.
건승을 기원하며.. 후생 올림.

박정현 2020-10-27 09:50:10
글을 보면서 참 위화감 든다. 내가 감정적인건진 모르겠지만 침략자의 필적을 뭐 그리 자랑스럽다고 내걸고 있는거냐. 온건주의자라서? 조선 반도의 자주권을 위한 온건이 아니라 계획을 세워서 천천히 조선을 삼키는게 일본의 이득임을 주장한게 이토의 온건이다. 안중근 의사 현판을 걸어도 모자란 판에, 공직자로서 이토의 정신을 읽으니까 정초석을 그대로 두자고? 이토 히로부미 척살에 목숨을 바친 안중근 의사가 울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