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혁신의 아이콘' 이건희, 세계인에 '디지털 세상' 선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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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혁신의 아이콘' 이건희, 세계인에 '디지털 세상' 선물했다
  • 정세진 기자
  • 승인 2020.10.25 13: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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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신경영선언'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꿔라"
1974년엔 '한국반도체'인수..반도체가 이끄는 '디지털 세상' 꿈꿨다
5WHY, 라인 스톱제, 인재 경영, 7·4 출퇴근제 도입...천재경영론 주장
무노조경영 비판에다 대선비자금 제공·불법적 재산상속 등으로 처벌도
1987년 회장 취임식에서 고 이건희 회장. 사진제공=삼성
1987년 삼성그룹회장으로 취임한 고 이건희 회장(왼쪽). 사진제공=삼성

[오피니언뉴스=정세진 기자] 25일 별세한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삼성전자를 '글로벌 초일류 기업'으로 올려 놓았다는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삼성전자를 포함 삼성그룹을 키우기까지 요즘 말로 '혁신의 아이콘'이었지만, 모순적이고 전근대적이었던 '개발 시대'라는 배경에서 '실정법'을 위반하는 등 '시대를 뛰어넘는데는 실패했다'는 평가다.   

1942년 경남 의령에서 태어난 고인은 1987년 부친 이병철 삼성창업주 별세후 13일만에 삼성그룹 2대 회장에 올랐다. 당시 나이는 46세. 소학교시절 일본 유학을 거쳐 서울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 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연세대 상학과를 중퇴하고 일본 와세다 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1966년 조지 워싱턴 대학교 경영대학원 경영학석사(MBA)과정을 수료했다.

1987년 회장 취임사를 하고 있는 고 이건희 회장. 사진제공=삼성
1987년 회장 취임사를 하고 있는 고 이건희 회장. 사진제공=삼성

본격적으로 삼성그룹에서 일하기 시작한 건 1966년 TBC(동양방송)에 입사하면서부터다. 선대 이병철 창업주는 자서전 '호암자전'에서 "(이건희 회장이) 와세다대 1학년 때 미디어 계열사를 맡아보라고 했더니 본인도 좋다고 했는데 조지워싱턴대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후부터는 그룹 차원의 경영에 참여하기 시작했다"며 "내가 겪은 기업경영이 하도 고생스러워 미디어 계열사만 맡았으면 하는 심정이었지만 본인이 하고 싶다면 그대로 놔두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그곳에는 홍진기라는 '대구 3대 천재' 중 한사람이 있었다. 그의 장녀인 홍라희를 만나 평생배필로 삼는다. 

이후 이건희 회장은 1978년 삼성물산주식회사 부회장, 1980년 중앙일보 이사를 거쳐 1987년 이병철 선대 회장 별세 후 삼성그룹 회장에 취임했다. 

생전에 이병철 창업주는 장남(고 이맹희 제일비료 회장)과 차남(고 이창희 새한그룹 창업주)가 아닌 삼남 고 이건희 회장을 후계자로 정했다. 이병철 창업주가 사카린 밀수 사건 등을 계기로 장남과 차남과 사이가 멀어졌다. 이병철 창업주는 나중에 차남은 용서를 했지만, 장남은 끝내 화해하지 않았다. 그가 사카린 밀수 정보를 당국에 흘린 고발자라는 의심을 끝내 풀지 않았다. 창업주는 대신 경영 수업에서 성과를 나타낸 삼남 이건희를 선택, 후계수업을 본격화했다.  

취임 후 신경영 선언... "마누라, 자식 빼고 모두 바꿔라"

회장 자리에 오르는 과정에서 신현확 삼성물산 회장의 도움도 컸다. 총수 자리에 오른 이건희 회장은 당시 삼성 그룹이 위기에 빠져있다고 판단했다.

이건희 회장은 1997년 쓴 자신의 에세이집 '생각좀 하며 세상을 보자'에서 "1987년 회장에 취임하고 나니 막막하기만 했다"며 "삼성 내부는 긴장감이 없고 내가 제일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이어 "1992년 여름부터 겨울까지 불면증에 시달렸다"며 "이대로 가다가는 사업 한 두 개를 잃는 것이 아니라 삼성 전체가 사그라들 것 같은 절박한 심정이었다"고 회고했다. 

1993년 독일 프랑크프루트에서 신경영선언을 하고 있는 고 이건희 회장. 사진제공=삼성
1993년 독일 프랑크프루트에서 신경영선언을 하고 있는 고 이건희 회장. 사진제공=삼성

이런 절박함의 결과로 나온 게 '신경영선언'이었다. 취임 5년째던 1993년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켐핀스키 호텔에서 삼성 고위임원들을 대상으로 "극단적으로 말해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봐라"고 주문하며 양 경영에서 '질(質) 경영'으로 근본적인 혁신을 주문했다. 

신경영선언은 이후 삼성그룹에서 ▲문제가 생기면 5번에 걸쳐 이유를 따져보는 '5WHY 사고론' ▲ 품질을 위해 제품에 불량이 있다면 생산라인을 멈출 수 있는 '라인 스톱제' ▲오전 7시에 출근해 오후 4시에 퇴근하는 '7.4근무제' ▲학력·성별 제한없이 인재를 채용하는 '열린채용' 등의 혁신으로 이어졌다. 

이 회장 취임 후 1992년 세계 최초 64M D램을 개발한 삼성전자는 반도체, TV, 스마트폰 등의 분야에서 세계 1위 기업에 올랐다.

고 이건희 회장은 신경영 10주년인 2003년에는 한 사람의 천재가 10만명을 먹여 살린다는 '천재경영론', 2012년에는 "20세기에는 물건만 잘 만들면 1등이 됐지만 21세기에는 물건은 물론 마케팅, 디자인, 연구, 개발, 아이디어 등을 복합적으로 잘 해야 살아남는다"는 이른바 '창조 경영' 발언에 이르기까지 변화와 혁신을 강조했다. 

'삼성반도체' 투자도 직접 결정...애니콜 불태우며 '디지털 시대' 준비시켜

2004년 반도체 사업장을 방문한 고 이건희 회장. 사진제공=삼성
2004년 반도체 사업장을 방문한 고 이건희 회장. 사진제공=삼성

"언제까지 그들(미국, 일본)의 (반도체) 기술 속국이어야 하겠습니까? 기술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일, 삼성이 나서야지요. 제 사재를 보태겠습니다."

"반도체 사업 초기는 기술 확보 싸움이었다. 일본 경험이 많은 내가 거의 매주 일본으로 가서 반도체 기술자를 만나 그들로부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만한 것을 배우려 했다." 

오늘날 삼성전자 경쟁력 자체를 상징하는 반도체 사업부의 전신은 1974년 고 이건희 회장이 인수를 밀어부친 '한국반도체'다. 당시 TBC이사였던 고 이건희 회장은 이병철 회장과 그룹 비서실의 반대에도 사재를 들여 한국반도체 지분 50%를 인수했다. 3년뒤에는 나머지 50%도 인수해 1978년 3월 사명을 '삼성반도체'로 바꿨다.

1983년 삼성전자는 64M 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며 미국, 일본 기업이 이끄는 세계 반도체 시장에 본격적인 도전을 시작한다. 30대 청년 이건희의 통찰력은 삼성전자를 세계 1위 반도체 기업으로 키운 것 이상이다. 지금 전세계인이 이용하는 거의 모든 IT제품에 들어가는 D램이나 랜드플래시 등 반도체, 디스플레이, 스마트폰 부품을 삼성전자가 공급 하고 있다. 전세계의 '디지털 시대'는 삼성전자 없이 불가능하다. 이건희 회장은 '아날로그 시대'가 가고 '디지털 시대'가 도래할 것임을 예견했던 것이다.  

"휴대폰 품질에 신경을 쓰십시오. 고객이 두렵지 않습니까? 비싼 휴대폰, 고장나면 누가 사겠습니까? 반드시 1명당 1대의 무선 단말기를 가지는 시대가 옵니다. 전화기를 중시해야 합니다."(고 이건희 회장)

어렴풋했지만, 예견을 넘어 삼성전자에게 철저한 준비를 시켰던 것이다.

2012년 CES에 참가한 고 이건희 회장. 사진제공=삼성
2012년 미국 소비자 가전전시회(CES)에 참가한 고 이건희 회장. 사진제공=삼성

이건희 회장이 '신경영선언' 10년이 넘어서던 2000년대 중반 시점에 삼성전자는 하나씩하나씩 세계 1위를 달성해가기 시작한다. 삼성의 휴대폰과 TV 시장에서도 세계 1위 제품이 등장했다. 1990년대 초반 진출한 휴대폰 사업은 당시 세계시장 선두업체인 모토로라나 노키아 제품과 비교해 통화 품질이 떨어진다는 평을 받았다.

반도체 사업부는 본격적인 성공궤도에 오른 반면, 기존 가전, 통신사업 부문은 '신경영선언'에도 위기감이 없다고 판단한 이건희 회장은 1995년 3월 삼성전자 구미사업장에서 ‘애니콜 화형식’을 진행한다. 임직원 2000여명이 보는 가운데 불량 휴대폰과 팩시밀리, TV브라운관 등 약 150여억원 어치 약 15만대를 불태운 것이다. 이후 11.8%였던 삼성 휴대폰 불량률은 2%대로 떨어졌다. 

TV시장 1위였던 소니를 제친 것도 '화형식'이후 오래걸리지 않았다. 일본 유학시절부터 이건희 회장의 취미는 영화 감상이었다. 방송국에 근무하기도 한 이 회장은 TV화질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이 회장은 대형 액정패널(LCD)투자를 지휘하며 브라운관 이후 세계 TV 시장을 장악해 나갔다. 2006년 ‘보르도 TV’를 시작으로 세계 TV 1위를 차지한 삼성은 지난해까지 13년 연속 1위 자리를 이어가고 있다. 

‘이건희 경영’의 그림자

끊임없는 혁신과 공격적인 투자를 단행했던 이 회장은 성공을 통한 각광 뒤에 어둡고 짙은 그림자도 각오해야 했다. 대표적으로 1995년 진출한 자동차산업이다.

이 회장은 자신의 에세이에서 "나는 자동차 산업에 대해 누구보다 많이 공부했고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전 세계 웬만한 자동차 잡지는 다 구독해 읽었고 세계 유수의 자동차 메이커 경영진과 기술진을 거의 다 만나봤다. 즉흥적으로 시작한 게 아니고 10년 전부터 철저히 준비하고 연구해왔다"며 그룹 회장 취임이후 자동차 사업 진출을 준비한 과정에 대해 설명했다.

그러나 IMF외환위기가 닥치면서 기아자동차가 도산했다. 기아차 인수를 노리던 삼성이었지만, 정재계 안팎의 견제와 비난을 받으며 '기아차 인수'의 꿈을 접어야 했다. 갓 출범했던 삼성자동차도 IMF 위기 해소를 위한 과잉설비 구조조정이라는 정책 목표에 따라 4조3000억원의 부채를 안은 채 1999년 법정관리를 신청, 자동차산업에서 손을 떼게 된다. 이후 2000년 삼성자동차는 프랑스 르노사에 인수됐다. 

선대 창업주부터 고수한 무노조 경영 원칙도 시민·노동계의 끊임없는 비판을 받았다. 외신으로부터 '은둔의 경영자(Hermit king)'라는 불리며 제왕적 경영과 비서실·구조조정본부·미래전략실 등을 앞세운 경영도 비판의 대상이었다. 

이 회장은 삼성그룹 총수로서 여러차례 사법당국의 수사를 받고 법정에 서기도 했다. 1995년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조성사건으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았다. 2007년에는 삼성 법무팀장이었던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그룹 차명계좌에 들어있던 비자금 의혹을 제기해 검찰 수사를 받았다. 2009년에는 에버랜드 전환사채(CB) 저가 매각 등으로 불법 승계 의혹을 받았으나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2008년엔 1000억대 세금포탈 혐의와 차명계좌가 적발되면서 삼성관련 모든 직책을 내려놓고 경영에서 물러났다. 당시 1조원대의 사재출연도 약속했으나 지켜지지 않았다. 이 회장은 배임과 조세포탈 등의 혐의로 2009년 파기환송심에서 징역 3년, 집유 4년, 벌금 1100억원을 선고받았다. 이후 2009년 12월 이명박 대통령의 특별 단독사면을 받아 2010년 삼성전자 회장으로 다시 경영에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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