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동열의 콘텐츠연대기] ⑰ '전쟁선전' 도구된 영화...채플린의 '더 본드'
상태바
[문동열의 콘텐츠연대기] ⑰ '전쟁선전' 도구된 영화...채플린의 '더 본드'
  • 문동열 레드브로스대표
  • 승인 2020.10.08 09: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찰리 채플린이 찍은 전쟁 프로파간다 첫 영화
영화, 연극 연장선에서 정치광고 선전 도구로
전쟁이라는 특수상황서 콘텐츠 산업 '폭발적 진보'이뤄내
문동열 레드브로스 대표.
문동열 레드브로스 대표.

[문동열 레드브로스 대표]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위 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젊은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에게 암살당한다.

이 사건으로 인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고, 지난 수십년간 서로 얽히고 설킨 동맹관계로 인해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하나씩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말려들게 된다.

바로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쟁 중의 하나인 세계 제1차대전의 시작이다. 1차 세계대전은 ‘세계대전’이라는 말처럼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참전국의 숫자와 동원 인력, 새로운 기술을 등에 업고 나타난 새로운 전쟁 무기와 그에 따른 대량 살상 등 이전과는 전혀 다른 전쟁의 양상을 보여 주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30년 전에 벌어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만 하더라도 일부 요새나 요충지를 중심으로 한 대규모 전투들이 전쟁을 구성했다. 동원 인력도 진영 별로 40~50만 정도로 합해야 100만명 정도였다(그래도 그 이전의 전쟁보다는 많다. 이렇게 대규모의 병력이 동원될 수 있었던 것은 철도같은 운송 수단이 발전했기 때문이었다). 군인들이나 이 전역에 살고 있는 주민들이 아닌 이상, 민간인들이 전쟁에 휘말리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전과는 달라진 전쟁, '전시채권'의 등장

1차 세계대전에서는 국지적이었던 전역(戰域)들이 전선(戰線)의 개념으로 확대되었다. 영국을 주축으로 하는 연합군과 독일을 주축으로 하는 동맹국이 유럽 전토를 나누는 전선을 사이에 두고 서로 일진일퇴를 주고 받는 이 전쟁은 이전의 군사 전술이나 개념이 전혀 적용되지 않는 새로운 형태의 전쟁이었다. 

철조망과 기관총 그리고 참호전으로 상징되는 지리한 방어 전략들이 주요 전략이 되면서 전쟁 기간도 늘어났고 동원되는 병력도 천문학적으로 늘어났다. 1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동원된 병력은 약 7천만명 정도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다.

1차 세계대전 당시의 전시채권 모집 포스터. 사진=위키피디아.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전시채권 모집 포스터. 사진=위키피디아.

제1차 세계대전은 인류가 처음 경험하는 현대전이었다. 이전의 전쟁과는 양상이 달랐다. 특히 전비(戰費)는 어마무시하게 들어갔다. 옛날부터 그랬지만 돈이 없이는 전쟁을 할 수 없다. 특히 국가 상비군 체계가 도입되기 시작한 근대에 들어오면서 전쟁 자금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1차 세계대전에 들어서는 넓고 길게 퍼져있는 전선과 몇천만명에 이르는 대규모의 병력 동원으로 인해 군비는 천문학적으로 늘어났고, 이렇게 늘어난 군비를 이전처럼 국고에서 감당하기가 힘들어졌다. 영국과 독일을 비롯한 1차 세계대전의 각 참전국들은 모자라는 군비를 마련하기위해 민간의 힘을 빌릴 수 밖에 없었다. 여기에서 나온 것이 바로 전시 채권이다. 

멕시코 전쟁 당시 발행된 미국 정부 패권

이전부터 전쟁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리고 이를 채권 형태로 남기는 일이 없지는 않았지만 은행같은 기관이 아닌 민간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한 본격적인 전시 채권 (戰時債券, War Bond)은 1812년 미국 독립전쟁 시기에 미 의회가 전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첫 발행한 것이 시작이다. 1차 세계대전 참전국들은 전쟁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전시 채권을 발행했고, 국가마다 조금씩 달랐지만 전시 채권은 1년 만기 상환의 형태로 3~6%의 약정 이자를 지급하는 형태가 대부분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국가의 금융 화폐 시스템이 금본위제였기 때문에, 화폐를 무한정 찍어 낼 수 없는 상황에서의 이 전시 채권은 늘어나는 군비를 충당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했다. 

멕시코 전쟁 당시 발행된 1000달러 미국 정부 패권. 사진=위키피디아.
멕시코 전쟁 당시 발행된 1000달러 미국 정부 패권. 사진=위키피디아.

여담이기는 하지만 전시 채권의 대부분은 종전 후에도 상환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패전국은 패전으로 인해 상환 재원이 없었고, 승전국도 예상보다 많은 군비 지출로 인해 재정이 파탄나서 상환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영국은 2014년에야 국가가 모든 미상환 전시 채권에 대한 상환을 약속했다.

그 중 가장 오래된 미상환 채권은 브리티쉬 콘솔이라 불리던 1751년 나폴레옹 전쟁 때 발행된 채권이었다.

이러한 전시 채권의 판매를 위해서는 민간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수적이었다. 전시 채권이 어느 정도 이자를 약속하는 금융상품이기도 했지만, 앞서 말했듯이 전쟁이라는 여러 불확실한 점들 때문에 대중에게 파고들기가 그렇게 쉽지가 않았다. 

특히 전쟁이 벌어지는 지역 자체가 저 먼 유럽이었던 미국같은 나라들이 더욱 그랬다. 각 국의 재무부에서는 전시 채권을 많이 판매하기 위해 여러가지 방안을 고민했다.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애국심에 호소하는 방안이었고, 당시 가장 많이 사용한 방법은 포스터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애국심을 자극하는 내용과 전장에 떠나 보낸 우리의 아버지이자 자식인 참전 군인들을 지원하자는 내용을 담은 포스터들이 거리 곳곳에 나붙었다. 내용은 전형적이었고, 고루했다. 

“조국에 돈을 빌려주세요. 군인들은 조국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것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생명이 승리를 위한 대가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승리는 사람의 생명만큼 돈 없이는 얻을 수 없으며 당신의 돈이 필요합니다. 

군인과 달리 투자자는 위험이 없습니다. 국고채권(Exchequer Bonds)에 투자하면 원금 및 이자가 모두 세계 최고로 안전한 대영제국의 통합 기금으로 확보됩니다.” (1916. 영국 재무부의 전시 채권 판매 광고)

이전 전쟁에도 있어왔던 전형적인 광고들이었다. 각 국의 전쟁 채권 판촉 담당자는 이런 고루한 방식 외의 다른 효과적인 방식도 고민하기 시작했다. 바로 당시 대중들 사이에 큰 인기를 끌기 시작했던 새로운 콘텐츠, 바로 영화였다. 

찰리 채플린의 전쟁선전영화, 더 본드(The Bond)

영화가 새로운 선전 도구로 사용된 것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대중들에게 가장 빠르고 직관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문맹률이 높아 신문같은 출판물이 영향력을 주기 힘들었던 저소득 노동자 계층까지 파고드는 영화의 힘은 그야말로 이전의 선전 선동에 대한 모든 개념을 뒤바꿔 놓았다. 

영화 ‘The Bond’는 1918년 찰리 채플린이 만든 전쟁 선전 영화이다. 영화의 제목 인 Bond는 전시 채권을 의미하지만 사람 간의 우정이나 사랑에서 생기는 유대감을 의미하기도 한다. 

영화의 줄거리는 선전선동 영화인만큼 직설적이고 간단하다. 우정과 사랑 그리고 결혼이라는 평범한 사람의 일대기에서 사람들 사이의 유대감에 대해 묘사한다. 

화면이 바뀌면 카이저(독일 황제)가 등장해 사람들 간의 자유와 유대를 상징화한 자유의 여신을 음흉하게 노리고 있고, 칼을 빼들어 자유의 여신을 해치려는 찰나 총검을 든 미군이 그를 막는 장면에서 미군의 참전 목적을 전달한다. 

다음 장면에서 찰리는 미국 정부를 상징하는 엉클 샘으로부터 전시 채권을 구입하고 이 돈은 제조업을 상징하는 노동자에게 건네진다. 노동자는 이 돈으로 총을 만들어 미군에게 전달하고, 미군은 총을 받아들고 용감히 싸우러 간다. 이 모습을 본 찰리는 구두 속에 숨겨둔 비상금까지 탈탈 털어 채권을 사고 이 돈은 다시 해군 장병에게 총으로 전달된다.

영화 더 본드의 한 장면. 사진=위키피디아.
영화 더 본드의 한 장면. 사진=위키피디아.

엉클 샘과 노동자들과 악수하는 찰리. 마지막 장면은 리버티 채권 (미국의 전시 채권)이라는 글이 새겨진 거대한 해머를 든 찰리가 비열하게 웃고 있는 카이저의 머리를 후려치며 통쾌하게 웃는 것으로 끝이 난다.

영국 출신이었던 찰리 채플린은 당시 미국에서 활동 중이었다. 고국이 전쟁에 휘말려 있던 그에게 이 영화는 그의 애국심을 표출하는 방법이었고, 그는 이 영화의 모든 제작비를 자비로 충당했다.

미국을 상징하는 엉클 샘이 아니라 영국을 상징하는 존 불 (John Bull)이 나오는 영국 버전도 만들었다. 10분 남짓한 짧은 영화지만 이 영화는 영화가 단순한 호사가들의 오락 활동이 아닌 사회적인 선전 선동의 효과적인 수단이 되었다는 것을 상징하는 작품이다. (후편에 계속)

●문동열 레드브로스 대표는 일본 게이오대학 대학원에서 미디어 디자인을 전공하고, LG인터넷, SBS콘텐츠 허브, IBK 기업은행 문화콘텐츠 금융부 등에서 방송, 게임, 영화 등 다양한 콘텐츠 기획 및 제작을 해왔다. 콘텐츠 제작과 금융 시스템에 정통한 콘텐츠 산업 전문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