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호의 책이야기]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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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호의 책이야기]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강대호 칼럼니스트
  • 승인 2020.09.12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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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히만 재판 참관한 아렌트, '악의 평범성'이라는 이론 정립
유대인 철학자, 평론가 1933년 파리 망명...1941년 도미
악이라는 실체, 사람의 개별적인 속성보다 집단 분위기에 더 영향 받아
영화 '아이히만 쇼' 스틸컷.사진=네이버영화
영화 '아이히만 쇼' 스틸컷.사진=네이버영화

[오피니언뉴스=강대호 칼럼니스트]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예루살렘에서 진행된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에 대한 공개 재판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아이히만은 유럽 여러 지역에서 유대인의 수용소 이송과 학살에 상당히 관여한 인물이다.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많은 전범이 재판받고 처벌받을 때 그는 아르헨티나로 건너가 신분을 숨기고 산다. 하지만 1960년에 이스라엘 첩보기관 모사드가 아이히만을 아르헨티나에서 몰래 체포한다.

예루살렘으로 압송된 아이히만은 1961년 4월 11일부터 공개 재판을 받는다. 한나 아렌트는 이를 지켜보면서 아이히만에 대한 평론을 통해 자신의 철학사상을 주장한다. 그 책이 바로 미국 잡지 ‘뉴요커’에 연재하기도 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Eichmann in Jerusalem (1963년)’이다. 책의 형식은 아이히만의 재판 참관기이지만, 부제인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가 이 책의 주제를 함축하고 있다.

저자 ‘한나 아렌트’는 20세기에 가장 탁월하고 독창적인 정치사상을 펼쳤다는 평을 듣는 철학자이자 수많은 에세이를 쓴 평론가이기도 하다. 아렌트는 대학 시절 하이데거의 강의에 참여하면서 철학에 관심 두게 되고, 야스퍼스의 지도 아래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랑 개념'이란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한길사 펴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한길사 펴냄.

유대인이기도 한 그녀는 나치 체제가 등장한 1933년 파리로 망명한 후 다른 망명 지식인들과 교류하면서 유대인 운동에 참여했다. 1941년 미국으로 이주한 후에는 강의와 집필 활동에 전념했다. 아렌트는 여러 해 동안 뉴스쿨 대학원의 정치철학 교수로 재직했으며 시카고대학교 사회사상위원회 방문연구원으로 활동했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 ‘공화국의 위기’ 등 여러 저서를 남기고 1975년에 사망했다.

재판의 주인공 ‘아돌프 아이히만’은 나치 독일 친위대 장교이자 홀로코스트 실무 책임자라는 혐의를 받는다. 그의 최종계급은 친위대 중령이었다.

아이히만은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1933년 바이마르 공화국 말기 치하의 독일로 이주해 나치 독일에서 유대인 축출 및 학살 전문가로 통했다. 그는 나치 독일의 보안성 장관이었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직접 지시를 받고 6백만 명의 유대인 학살의 실무 총책임자 위치에 있었던 인물이다. 물론 최고책임자는 당연히 히틀러이지만, 그 실무를 책임지고, 담당하고, 집행한 건 바로 아이히만이었다는 게 이스라엘 측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아이히만은 재판과정에서 자신은 상관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시킨 대로만 했을 뿐이라며 전혀 잘못한 것이 없다는 태도로 일관한다. 한나 아렌트는 재판과정을 지켜보며 수많은 학살을 자행한 아이히만이 매우 평범하다는 점을 발견한다. 아주 사악하고 악마적인 인물일 거라는 세간의 생각과는 매우 달랐다. 이 점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당시 독자들에게 충격적으로 다가갔다고 한다.

 

재판 당시 아이히만. 사진=tvN 캡쳐
재판 당시 아이히만. 사진=tvN 캡쳐

악의 평범성

한나 아렌트가 본 아이히만은 개인적으로는 매우 친절하고 선량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엄청난 학살을 자행할 수 있는가에 관한 의문에서 출발해 그녀가 내린 결론은 바로 ‘악의 평범성’이다.

쉽게 말해 ‘악의 평범성’은 "모든 사람이 당연하게 여기고 평범하게 행하는 일이 악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악이 특별히 악마적인 어떤 것에 기원하는 게 아니라는 아렌트의 주장은 큰 충격을 불러일으켰고, 이 책이 출간된 후 수많은 논쟁이 벌어졌다고 한다. 결국, 아렌트가 주장하는 것은 자신이 기계적으로 행하는 일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고하지 않는 무사유(thoughtless) 그 자체가 바로 악이라는 것이다.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해변의 카프카’에서 아이히만의 사례를 들며 기계적으로 행하던 일이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상상해보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이라고 언급한다.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이 ‘사고의 무능성’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석했다. 그리고 아이히만이 법정에서 한 거짓말은 단순히 책임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현실감각을 없앤 사고와 언어의 무능’에서 온 상투어로 본다.

그녀의 주장에 대한 해석은 악이라는 실체가 한 사람의 개별적인 속성보다 집단의 분위기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는 해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또한, 같은 사람이 하는 똑같은 행동이 그가 속한 집단과 시대가 달라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만약 2차 세계대전의 결과가 달랐다면 전범 재판의 피고와 원고는 자리를 바꿔 앉았을 거라는 것처럼.

사실 이 사건에서 피해자였던 유대인들의 후손인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행한 학살 등 비인륜적인 행위들을 보면 그런 주장에 수긍이 간다.

아무튼, 아이히만은 (누구나 예상하고 계획된 대로) 사형선고를 받고 1962년 5월 31일 교수대에서 생을 마감한다. 아렌트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마지막 순간에도 죄를 전혀 후회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나 아렌트.사진=britannica.com
한나 아렌트.사진=britannica.com

공정한 재판이었을까

이 책의 결론 부분에서 한나 아렌트는 이 재판이 유대인 차원에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며, 앞으로 등장할 미증유의 인류 범죄를 다루기 위한 선례를 위해서라도 이스라엘 법정이 아닌 국제법정으로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법정에서 직면한 최고의 범죄, 즉 유대 민족의 신체적 전멸은 유대 민족의 몸에 범해진 인류에 대한 범죄였다는 것, (중략) 그 범죄가 인류에 대한 범죄인 한, 그 범죄를 심판하는 데는 국제 재판소가 필요했다. (중략) “유대인에 대한 범죄는 인류에 대한 범죄”라는 점과 “따라서 판결은 모든 인류를 대표하는 법정에서만 내려질 수 있다”는 점을 명백하고 분명하게 (중략)...예루살렘 법정은 스스로 판결을 내릴 자격이 없음을 공표하면서 판결의 권리를 ‘철회할’ 것을 제안했다. (370~371쪽)

사실 모사드가 아이히만을 아르헨티나에서 납치한 것도 불법이고 이 사건이 외교 분쟁으로 불거질 법한 문제였음을 아렌트는 책 여러 곳에서 지적한다. 그리고 여론에 의해 이미 사형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진행된 재판이었다고도 비판한다.

아무튼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독자들에게는 충격을, 여러 분야 학자들에게는 비판을 불러일으킨 역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을 나는 꽤 오랜 시간에 걸쳐 읽었다. 다 읽고 난 후의 소감은 그리 어려운 내용이 아니었는데 읽어나가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호기심에 영어 원문을 조금 읽어보니 오히려 이해하기 쉬운 듯했다. 왜 그럴까. 미국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번역자의 영어 실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다. 다만 엄청난 양의 비문(非文)은 손봐야 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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