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 없는 浪漫…‘想忘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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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 없는 浪漫…‘想忘을 위하여’
  • 황헌
  • 승인 2015.12.14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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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헌 mbc 앵커

 

“궂은 비 내리는 밤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로 시작하는 최백호의 가요 ‘낭만에 대하여’는 반백 넘은 이 치고 모르는 사람 드물 정도로 장년 공통의 애창곡이다. 좀 더 가다보면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실연의 달콤함이야 있겠냐마는...”이란 표현이 나온다. ‘도라지 위스키’도 그렇고 ‘옛날식 다방’도 추억 내음 짙다. 그래도 이 노래의 제목 이미지를 완성시켜주는 건 “실연의 달콤함” 또는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라는 대목 아닐까싶다.

 

‘낭만’은 무엇일까? 국어사전은 이렇게 정의한다. ‘낭만: 실현성이 적고 매우 정서적이며 이상적으로 사물을 파악하는 심리 상태. 또는 그런 심리 상태로 인한 감미로운 분위기’

 

복잡한 표현으로 설명하였지만 한 마디로 ‘낭만’은 ‘비현실적 감성’ 또는 ‘이성보다는 감성적인 것에 무게가 실린 정서’라고 할 수 있다.

 

‘낭만’, ‘낭만적’, ‘낭만주의’ 등의 어휘가 우리 언어문화 체제에서 뿌리 내린지 오래다. 우리는 별다른 생각도 없이 이 ‘낭만(浪漫)’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낭만’의 이미지는 이미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말의 뿌리를 좀 더 생각해보면 우리가 쓰는 이 말은 분명 어딘가 어색한 게 있다는 걸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다. 개그콘서트 유민상과 김대성의 <리얼 사운드> 코너가 우리가 흔히 쓰는 의성어의 비현실성을 풍자하는 것을 보면서도 마냥 웃기만 할 수는 없듯이 말이다.

 

‘낭만(浪漫)’은 메이지 시절, 그러니까 1800년대 후반 일본 사람들에 의해 세상에 처음 쓰이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은 ‘roman’을 음차(音借)해서 ‘물결 랑(浪)’과 ‘흐를 만(漫)’자를 합해 그럴싸하게 조어했다. 소설 <도련님>으로 알려진 나츠메 소세키라는 작가가 처음 그 말을 썼다는 설도 있지만 확실치는 않다. 어쨌든 메이지 시절 <문학계> 또는 <明星> 등의 문예지에서 당시 고정적 틀을 벗어난 시나 소설이 유럽 영향으로 유행하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일본에서 이 말을 쓰기 시작한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roman’발음의 일본식 근사치 발음 조어가 ‘浪漫’였다면 ‘roman’은 무엇인가. 네이버 지식백과는 ‘중세 프랑스어 ’romanz’에서 유래했다고 기술한다. 12~13세기 연애담이나 무용담을 담은 통속소설을 뜻하며 17세기에 와서 여기에서 파생된 형용사가 생겼다고 한다. 영어로는 ‘로맨틱(romantic)’, 프랑스어로는 ‘로만티끄(romantique)’, 독일어로는 ‘로만티쉬(romantisch)’가 그에 해당되는데 뜻은 ‘공상적’ 또는 ‘모험적’ 등과 연결된다.

 

여기까지는 “그 사람 로망은 뭘까?”와 같은 문장에서 쓰이는 ‘로망’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낭만’이다. 어떤 꿈이나 소망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는 말이다. 한편으로는 비현실적인, 또는 이뤄지기 힘든 사랑의 스토리를 담은 정서이기도 하다. 최백호가 노래하는 ‘낭만’이 이에 해당되겠다.

 

따라서 필자는 이쯤 해서 ‘로망’을 ‘浪漫’으로 부르는 우리들의 지금 이 언어 습관을 한번쯤 재고해보면 어떨까하고 생각해본다. ‘낭만’이란 말에 ‘로망’이 없기 때문이다. 즉 “물결이 질펀하게 넘치거나 흐른다”는 한자의 의미와 ‘roman’을 연결할 다리를 좀처럼 찾기 어려워서이다. 백번 양보해서 ‘흐른다’는 건 고정이 아니고 뭔가 변화가 가능한, 늘 어떤 형태로든 바뀔 수 있음을 연상시킬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반론을 부분적으로 타당한 것으로 수용한다 해도 본래 ‘로망’이 가진 이미지와 ‘물결의 흐름’은 조화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낭만’ 대신 ‘로망’으로 부르자고 제안하고 싶다. 그렇다면 ‘낭만주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로맨티시즘’이란 영어가 있지만 ‘~주의’ 식의 어휘로 가야한다면? 여기서 또 하나의 단어를 제시하고자 한다. ‘로망’을 안 맞는 한자 조어 ‘浪漫’으로 가는 대신 실제 그 뜻과 가까운 새로운 단어 ‘상망(想忘)’ 또는 ‘상망(想望)’으로 바꾸자는 게 그것이다. ‘로망’이 갖는 상당수의 함축 의미는 바로 이게 우리네 가슴과 머리의 생각 부분(想)과 연결된다는 데서 착안한 조어이다. 또한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에서도 나오듯 ‘망각(忘却)’, ‘잊음’, 그리고 ‘있을 수 있으나 지금은 없는 그 어떤 감성이나 정서’를 두루 껴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이뤄질 수 없었던 어떤 소망을 담는다는 뜻에서 바람(望)의 뜻을 담은 한자로도 환치가 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진도가 나가면 ‘낭만’은 ‘상망’이 되고, ‘낭만적’은 ‘상망적’이 되고 그리고 ‘낭만주의’는 ‘상망주의(想忘主義 또는 想望主義)’가 되겠다. 어색하게 느껴질 것이다. 한 번도 들어보거나 써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방송에 쓰는 숱한 언어 가운데 ‘낭만’과 같은 과정을 타고 오늘날 우리의 언어체계에서 당당하게 자리 잡고 사용되는 말이 참으로 많다. 본격적인 겨울 문턱을 넘어선 이 계절, 서울의 수색역 인근에서 또 다른 송년 저녁을 기다리며 이런 잡문을 써보았다. 눈이 내리면 대뜸 떠오르는 어휘 ‘낭만’이 사실은 전혀 ‘낭만적’이지 않은 것에 시비를 거는 까닭은 단순하다. 늦었지만 고쳐 쓸 필요가 있는 표현이기에.

 

오늘도 ‘낭만적’ 술자리를 기대하는 이 땅의 애주가들이여. 연일 계속되는 송년 모임의 피곤함을 털고 이 한 마디 “자! 우리의 想忘을 위하여 잔을 들어라”를 외쳐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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