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속 해운업④ - 이득 분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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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속 해운업④ - 이득 분배
  • 전우홍
  • 승인 2015.12.01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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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기제작 비용과 옹기배 운행비의 이득과 분배

 

1970년대 초반 옹기 한 가마( 약 1,000여개) 제작비용

(옹기 한 가마 가격: 20만원 명세서)

* 나무(땔감) 값: 4-5만원

* 흙 값: 2만원

* 도공, 잡부 인건비: 5만원

* 생옹기 건조비: 1만원

* 유약 값: 5천원

* 흙 반죽: 5천원

* 불 때는 비용: 5천원 (3-4일/1,300도)

* 옹기 운반(건아꾼): 5천원

 

땔감/화목:

옹기 한 굴에 약 900-1,000단이 소요됨, 3단에 100원이었다. 1970년 후반 들어서 인근에 자재들이 부족하여 흙은 나주 산포면에서 트럭으로 구입하고, 땔감은 노하도, 청산도에서 가져오다가 나중에는 보다 먼 곳에서 돛단배로 운송하였다. 이때 옹기배의 풍경 못지않게 장작배의 풍경도 좋았다.

 

옹기 한가마 제작 기간:

봉황리에는 40여개의 동막이라는 옹기제작 대행사가 있어서 옹기전문 도공(접장) 2명과 보조인 5명이 한 굴(가마)에 90종류의 옹기 1,000여점을 만드는 기간은 대략 2개월이 소요되었다. 생옹기를 가마에 쌓기는 2-3일 소요되며 불은 3-4일간 지핀다. 전성기에는 전국에서 도공(접장)들이 몰려들었고 한 동막에 여러명의 접장이 함께 물레질하여 생옹기의 제작시간을 단축해야 했다.

 

옹기배 한행비(1항차: 1-3개월)의 수익:

* 1965년대 15톤급 옹기배 신조선 건조비: 150-200만원

길이 20m, 폭 5m, 짐칸천장 높이 2m, 짐칸 길이 10m

* 동막에서 배까지 20여명의 이엉꾼이 이어 옮기기를 하며 약 3시간 소요됨.

배에서는 사공이 이물에는 작은 옹기, 고물 넓은 공간에는 큰 옹기를 적재했다.

* 1958년대 15톤 급에는 옹기 2가마 분량 - 옹기 값 약 12만원

한행비(1항차) 판매완료: 12만원 가치의 옹기를 판매하면 판매액은 40만원

* 1970년대 1항차는: 판매시일에 따라 틀리나 15일-3달소요. 옹기 1가마 원가 20만원의 옹기를 판매 후 금액은 40만원으로 2배 장사임 (당시 논 1마지기-200평/8,000원)

* 선주는 1달치 3명의 선원이 생활 할 생필품(식곰)을 제공하는데 이는 기본 식료품, 나무/땔감, 솥단지, 이불 등을 말한다.

* 수익분배는 모든 경비를 제외하고 남은 금액의 반(50%)은 투자비와 이자로 선주

가 갖는다. 나머지 반(50%)은 선원들의 몫으로 웃(조)동무 와 화장이 1로 보면, 사공은 1.5로 분배한다. 그럼 20만원을 남겼을 때, 선주 10만원, 사공 42,800원, 웃동무와 화장 각 28,600원으로 분배된다. 이는 2달정도 승선하여 당시 논 700평을 살 수 있는 금액으로 일반 노동자에 비교하여 월등한 고소득인 셈이다.

 

칠량옹기와 운반 돛단배

 

옹기가마:

가마의 길이 40-50m, 폭 3-4m, 높이 2m 정도 크기로 처음 앞불로 시작하여 첫불을 떼고 서서히 온도를 높여 중불로 4일정도 장작을 핀다. 숙련자가 창떼기 구멍마다 검사하며 화염의 색깔을 보고서 장작 몇 개비를 더 넣을지를 결정한다. 겸불용 장작은 가마끝 부분에 쌓아서 잘 건조시킨다. 창떼기 구멍은 한굴(옹기 1,000개)짜리 가마에 약 8개 정도 있다. 이렇게 장작불을 온 사흘을 떼고서 가마입구를 막고 옹기를 익힌다. (그림)

봉황리 옹기가마 - 4개가 있었고 마을의 동. 서, 중앙, 교회 옆의 가마가 제일 컸다. 옹기가마는 40여개의 옹기제작 대행사인 동막 업주가 가마 주인과 일정을 맞추고 임대한다. 옹기가마 사용료는 통상적으로 전체금액의 약 5%가 지불된다.

 

동막의 역할

옹기제작 대행업으로 제작에서부터 적재까지 책임지며 한 동막에 7-8명이 일한다. 생질꾼 2명은 (흙) 질치고, 기술자(접장) 2명은 옹기 형태를 만드는 물레질, 만들어진 건애(생옹기)는 2명의 건애꾼에 의해 자연상태에서 2-3일 건조를 시키고 잿물을 입한다. 뒷일꾼 2명은 손가락으로 옹기에 문양을 넣는다. 이후 가마로 옮겨 굽고 완성되면 흙벽돌의 저장창고에 보관한다. 옹기배에 적재는 건아꾼-이엉꾼이라 불리는 20여명의 여성으로 구성되어 동막에서 선창까지 이어 옮기기를 한다. 이때 동선은 동막의 위치와 선창까지로 품삯은 한굴 당으로 계산한다.

* 경기가 좋던 시절에는 옹기 제작시간을 단축하기 위하여 기술자인 접장들을 여러 명 고용하여 제작했다.

 

도부상과 본상

도부상-일정한 판매장소 없이 옹기를 등짐하여 판매한다는 의미로 주로 지게나 리어커를 준비하여 소량으로 옹기를 받아간다.

본상-장터에 일정한 장소를 확보하고 옹기를 대량 구매하는 장사로 중요한 고객이지만 그렇다고 소매를 원칙으로 하는 옹기배로서는 가격이 맞지 않으면 몽땅 넘기지는 않는다. 배에 있던 옹기를 거의 팔고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빨리 일행비(일항차)를 더하기 위해 남은 옹기를 본전에 넘기기도 한다. 가끔 본상과 사공이 서로 이해타산이 된다면 전체옹기를 떨이하는 경우는 배를 몰고 직접 본상이 원하는 장소로 운송해준다. 신사공은 부산에서 포항 구룡포의 본상의 주문으로 구룡포까지 2차례 방문하였다.

 

옹기주문

선주가 동막에 옹기를 주문 할 때는 계절에 필요한 종류의 옹기와 사공들이 현장에서 얻은 조언을 듣고 수요에 알맞는 옹기를 주문한다. 예를 들면, 김장철, 젓갈 철, 어장 형성, 보리와 나락 수매 같은 정보가 고려된다. 같은 동막과 선주는 한 동네에 살지만은 옹기주문 만은 현찰로 이루어졌다. 본상(도매업자)이라도 유통과정은 통신과 은행 미비로 옹기배가 도착한 후에 반드시 현찰거래로 이루어졌다.

 

칠량옹기의 특징과 우수성

전체적인 모양이 달걀형으로 중간이 볼록하고 손잡이가 달렸으며 위와 아래의 크기가 같다. 칠량 옹기에는 꼭지가 없다(?) 타지방의 옹기보다 1,200도 높은 온도에서 구워지기 때문에 쇠 소리가 나고 물이나 간장을 장기간 보관해도 허리에 이슬이 맺히지 않아 인기가 높았고 남해안 항과 포구에 옹기를 풀었다. 종류는 100여 가지로 옴막기(저박기), 조재이(대형), 댕구초장(중간)-----본고에서 생략함

신사공이 말하는 부산 초량 옹기는 무르고 둔탁한 흙 소리가 난다. 또한 각처의 옹기시장에서 칠량옹기가 나오면 다른 옹기들은 꼬리를 내린다고 했다.

* 신사공은 부산의 영도다리를 지나면 모두 초량이라고 불렀다. 현재 북항 모두를 초량으로 표현한다.

▲ 이물에 적재된 옹기

 

봉황리 옹기생산과 해운업의 풍요

옹기배가 판매를 끝내고 귀항하기 까지를 일행비(1항차) 대략적으로 경비를 제외하고 투자비의 2-3배를 벌어온다. 이때 2배는 3색기, 3배는 오색기를 달고 귀항한다. 그리고 선주는 돼지를 잡아 수고한 선원과 가족을 위하여 동네잔치를 벌인다. 전성기가 끝날 무렵인 1970년경에 28척의 옹기배가 있었으니 돼지 잡는 날은 28척 x 5항차(1년)=140회가 된다. 평균 2-3일에 돼지 한 마리를 잡는 셈이다. 이는 한국의 일반 농경사회에서 결혼이나 회갑 잔치가 아니면 결코 돼지를 잡아가며 동네잔치를 하는 경우는 없다. 그 만큼 칠량 봉황리 옹기마을은 돈이 돌았고, 이곳 주민이 장에 나가지 않으면 장이 형성되지 않았다. 조선시대 독점이란 직업 혹은 사회적으로 차별을 받던 곳이다. 일제 강점기에 와서 이런 차별을 철폐하려고 칠량독점이란 마을 이름을 버리고 좋은 의미의 ‘봉황리’로 개칭되었다. 전성기에 약 150가구가 있었고, 주민의 2/3는 4곳의 옹기가마와 40곳의 동막을 중심으로 일을 했고, 나머지 주민들은 1/3인 120여명은 40여척의 옹기배의 선원으로 종사하는 그야말로 옹기를 생산하고, 생산된 옹기를 배로 판매하는 시스템을 갖은 종합상사의 분업화 마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조선시대의 토속 해운연구에 좋은 자료가 될 수 있다.

 

옹기배의 특징

근대 옹기배의 형태는 일본의 우닷시 배를 옹기 화물적재에 알맞게 개조 변형한 것으로 갑판을 뜯고 곡머리를 올려 선창의 판자를 탈착식으로 했고, 갑판의 양현보다 중심선을 높인 곡머리에 경사진 판자인 요두막 혹은 요두메를 곡머리와 타락에 걸침으로 적재 공간을 크게하고 자연배수가 해결되었다. 배 가격 200만원, 적재된 한굴의 옹기가격은 쌀 100가마와 같은 100만원 정도이며, 백미 300석 적재 가능(나락2석/백미1석: 80kg) 1970년경 봉황리에 28척이 종사하였고 칠량독점 전성기 1960년 부근에는 한굴짜리 배 약50자 크기의 37척의 옹기돛단배를 보유하고 있었다.

 

옹구배와 돛 제작

봉황리 고태량 배목수가 최고였으나, 현재 고령으로 그의 제자 서달윤

배목수가 옹기배 조선기능을 보유하고 있으나 역시 근력이 부쳐서 직접 배 제작에는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 돛 제작은 선주가 책임지며 다시 해안 도회지 포구에는 돛 전문제작 업체가 있어 주문하기도 하지만 주로 뱃사람이나 동네 부녀자들이 자체 제작한다.

 

칠량 옹기배의 선원구성

사공: 배의 안전운항과 옹기 판매책임 사공/Skipper 3대 조건: 바람, 항로, 일기

웃동무: 사공을 보좌하는 갑판원/Deck Handler 으로 배의 운항보조와 옹기판매

화장: 10대 시절부터 시작하며 취사책임/Cook과 허드레 일, 운항과 옹기 판매

 

▲ 봉황리 고태량 배목수의 밑그림으로 만든 입체 도면: 20m x 5.3m x 1.5m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돛대 착탈

옹기배 선원 3명이서 돛대를 지고(내리고) 세운다.

이는 먼총이란 돛대 버팀줄을 이용하기 때문에 가능

 

옹기배의 적재와 흘수

옹기를 중장치고 가득 실으면 흘수가 내려가 통문에서 손을 씻는다.

 

배의 기울기

배가 바람 받아 기울어지면 통문(덤불)에서 손 씻는다.

더 심하게 기울면 중장 친 단지에도 물이 든다.

 

선실의 방수

옹기배의 구조상 경사진 갑판 역할을 하는 요두막(메)는 낱장 덮개로 되어 박을 치지 않아 비나 파도로 부터 방수가 되지 않는다.

 

빈 배의 경우

옹기를 판매하고 귀항(歸港) 때는 빈 배가 되어 선창에 안전상 돌 혹은

모래주머니 적재, 돌은 쉽게 굴러다녀 주로 모래주머니를 사용했다.

반굴(가마) 짜리: 옹기배는 2명이 승선 한다.

 

속도

돛단배에 속도가 붙으면 그 압력으로 인하여 치가 떨리게 되며 그 진동이 창다리(손잡이)까지 전달된다. 이때 창다리에 울림이 오면 8낫트 까지 속도가 증가 된다. 그보다 속도가 빨라지면 치판이 솟거나 기울어져 물에서 떨어지게 되면 배가 넘어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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