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한 칼럼] 그만둘 자유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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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한 칼럼] 그만둘 자유에 관하여
  • 김장한 울산의대·서울아산병원 교수
  • 승인 2020.07.10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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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또는 계약을 지킬 절대성 존중되지만
'인간 존중의 원칙' 아래선 의사들의 연구도 제한돼
제약사와 피험자간 계약에도, 피험자의 '그만둘 자유' 법원칙 있어
김장한 교수
김장한 교수

[김장한 울산의대·서울아산병원 교수] 흔히 상대를 비난하는 말로, “저 친구는 끈기가 없어” 라고 한다. 한번 하겠다고 했으면 끝까지 해야 한다는 의지가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유사한 의미로 ‘pacta sunt servanda(약속은 지켜져야 한다)'는 로마법상의 법원칙이 있다.

서구 사회에서 발견되는 '계약의 절대성'

약속의 의미가 어느 정도인지 이해하기 위해 디즈니 제작 만화 영화 “인어 공주”의 한 장면을 보자. 철없는 막내 딸 에리얼이 사람이 되겠다고 문어 마녀와 계약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계약 내용은 그녀의 꼬리를 다리로 바꾸어 주지만, 목소리를 잃게 되고 나중에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그녀는 죽게 된다는 것이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바다의 왕 아버지 포세이돈은 삼지창을 휘두르며 마녀를 벌하려 하지만, 마녀는 계약서를 방패 삼았고, 문서 위에 빛나는 에리얼의 서명은 삼지창의 공격을 무위로 끝나게 한다.

서구에서 약속 내용은 어떻게 해석하였을까? 16세기 말 이태리를 무대로 한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에서 재판관으로 분한 포샤는 샤일록에게 계약서에 따라 안토니오의 살 1파운드를 가져가도 좋지만, 만약 그의 살을 베어 낼 때 피를 한 방울이라도 흘린다면, 샤일록의 전 재산을 몰수하겠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털 끝만큼이라도 1파운드에서 차이가 나서는 안 된다고 한다. 물론 ‘1파운드의 살’이라는 계약 문구가 ‘피’도 가져 갈 수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현미경으로 세상을 보게 되면, '인육 계약'의 자구만이 적법한 것이 된다.

현대 민법 이론에는 조금 여유가 있다. 계약 성립 단계에서 하자가 있거나 계약 자체가 불공정 하다면 이를 무효로 할 수 있다. 에리얼이 미성년자라면 포세이돈이 이를 취소할 수 있고, 계약 내용이 '공서 양속' 위반이라며 무효를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도 계약 성립 이후에 발생한 사유라면, 사정 변경은 거의 인정하지 않는다. 계약의 참여자가 그만둘 자유를 인정한다면, 그것은 계약 자체를 인정하는 것과 상치되는 것이기에 이론적으로 공존의 가능성이 없을 것으로 보는 것 같다.

뉘른베르크 재판 통해 세워진 '인간존중의 원칙'

하지만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에 있어서 인간 존중의 원칙은 연구 대상자인 피험자에게 자유롭게 그만 둘 권리를 인정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이에 대한 어떠한 법적인 불이익을 부과할 수도 없고 이를 제한하기 위한 어떠한 문구를 첨부하는 것은 금지된다.

신약 개발을 하기 위해 임상시험을 시작할 때, 연구자는 연구 계획서를 임상시험심의위원회에 제출해 동료 심사를 받아야 한다. 이때 임상시험 참여 환자에게 나누어 줄 설명문을 함께 제출하여야 하는데, 원칙적으로 설명문에는 연구참여자가 언제든지 자유롭게 연구 참여를 철회할 권리를 보장한다는 내용이 명시되어야 한다. 일반적으로는 연구자에서 구두로 참여 철회 의사를 통보하면 끝이다. 임상 시험을 주관하는 제약사 입장에서는 매우 불리한 법 원칙이다. 계약에 관한 로마법 원칙의 전통에 비추어 보면 어처구니조차 없어 보이는 이 원칙은 어떻게 성립되었을까?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도쿄 국제 전범재판에서 피고석 중간 열에 도죠 히데키를 포함한 A급 전범들이 서 있는 모습.

1945 독일 뉘른베르크에서는 세계 제2차 대전의 전범을 단죄하는 재판이 열렸다. 국가 요인급들에 대한 전범 재판을 끝내고, 미군 점령지에서 미군 군사법정의 명의로 12개의 뉘른베르크 부속재판(subsequent Nuremberg trials)이 열리는데, 그 중 하나가 “의사 재판(doctor’s trial)”이라고 해 민간인, 유대인 학살과 인체 실험을 한 의사들에 대한 재판이었다.

대부분의 피고는 포로수용소 소장이자 독일인 의사들이었는데, 이들은 우생학 이론에 따라 장애인, 중증 환자, 전쟁 포로, 점령국 민간인, 유대인들을 상대로 의학실험을 하고, 그 과정에서 고문, 살해, 대량 살인을 했다. 전범 재판의 유죄 판결문에 그들이 위반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 10가지 인간 대상 연구에 관한 기본 원칙이 기재되는데, 이것을 '뉘른베르크 강령'이라 한다. 이것을 세계의사협회가 받아들여 1964년 임상 연구를 하는 전세계 의사들에게 준수해야 하는 원칙으로 '헬싱키 선언'을 하게 된다.

언제부터인가 계약은 법과 같은 효력을 가지며, 이를 어긴다면 세상이 어떻게 유지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계몽주의 시대에 계약 자유의 원칙은 못 가진 자들로 하여금 노동을 팔고, 그 계약에 종속되도록 하는 사회를 만들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노예 계약을 맺고 이를 위반할 경우, 엄청난 액수의 손해 배상을 하기로 계약을 했다면 이는 지켜져야 하는가? 인간에 대한 존엄은 이런 경우에 자유롭게 그만 둘 권리를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신약을 개발하는 과정에 참여하는 임상 시험 과정에서 시험군에 참여한 환자가 몸이 안 좋거나 또는 마음이 바뀌어 앞으로 진행될 시험 참여를 거부할 경우, 제약사로서는 그 동안 그 환자의 데이터를 얻기 위해서 사용한 비용과 데이터의 효용이 떨어지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 싫은 임상 시험에 계속 참여하여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계약 위반으로 손해배상을 해야 하는 것일까? 인간 대상 연구에 대한 일반적인 법원칙으로 ‘자유롭게 그만두는 것(free to stop)’은 인간 존엄성에 대한 매우 품격 높은 법원칙을 정립한 것이라고 본다.

도쿄 전범재판
1943년 상공대신이던 기시 노부스케(현 아베 총리의 외조부, 왼쪽)와 면담하는 도죠 히데기.

전범 처벌하지 못한 '도쿄 재판'의 과실 

법규만을 유일한 연구대상으로 하고 법의 이념적 측면 및 사회적 기반을 고려하지 않았던 개념 법학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일본 전범에 대한 '도쿄 재판'은 미국의 주도하에 서구 11개국이 재판부로 참여했고, 조선과 같은 아시아 국가들은 피해자이지만 재판부 구성에 참여하지 못했다. 그 결과, 뉘른베르크 재판과 다르게 '인륜에 반하는 범죄(Crimes against Humanity)'를 처벌하지 못하게 된다.

예컨대, 731부대의 인체 실험과 살인, 점령지 국민들에 대한 대량 학살은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독일 전범에 대한 인류의 반성과 성찰이 바로 이 부분에 있다는 것 때문에 지금도 도쿄재판의 문제점에 대해 아쉬워하는 부분인데, 이 청산되지 못한 과거 문제가 근래 사건까지도 연결되는 것 같다.

일제 강점기 전쟁 위안부 문제나 강제 징용 문제에 대해 계약법을 들이대면서, 취업 사기의 피해자라거나 단지 돈 벌러 간 자들이라고 주장하는 대학 교수가 있고, 이에 동조하는 의견도 있어서 인터넷이 다소 소란스럽다.

일제 말기 시대 논리에 따라 전쟁에 어떻게 그 정도의 자유를 보장할 수 있을까라는 주장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 존엄성에 대한 도덕적 수준을 높여야 한다고 판단했고 옳고 그름에 대한 잣대를 정해야 한다면, 당연히 우리는 이 원칙을 지지해야 한다.

그리고나서 돌이켜 생각해야 한다. 이 사건은 이 원칙이 전면적으로 적용해도 되는 사례인지? 과연 피고인들에게는 적법 행위 기대 불가능성이라는 개인적 면책 사유는 없었던 것인지? 개인적으로 이런 면책사유 주장들은 ‘인륜에 반하는 전쟁 범죄’를 옹호하는 꼴인데, 안타깝게도 전범을 도쿄 재판에서 처벌하지 못한 과실이 원인이라고 본다.

● 김장한 울산의대 인문사회의학교실·서울아산병원 교수(박사)는 서울 의대와 법대 및 동 의대, 법대 대학원(석사)을 졸업하고 법학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법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세부 전공은 법의학과 사회의학이다. 대한법의학회 부회장, 대한의료법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칼럼을 통해 의학과 관련한 역사, 예술, 윤리, 법, 제도, 정책 주변 이야기를 두루 다룰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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