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호의 책이야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한 소년의 성장기...손원평 著 ‘아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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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호의 책이야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한 소년의 성장기...손원평 著 ‘아몬드’
  • 강대호 칼럼니스트
  • 승인 2020.06.20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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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한 사건, 매혹적 문체 돋보이는장편소설...영상을 보듯 시각적인 문장 돋보여
영화 연출 전공한 저자 손원평, 최근 개봉작 '침입자' 연출..그외 다수 영화 제작 참여
'아몬드'로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 '서른의 반격'으로 제주4·3평화문학상 수상
감정 표현 서투르거나 타인의 감정 표현에 거북해하는 현대인들 은유하고 있어
웃지 않는 아이 윤재. 사진=창비
웃지 않는 아이 윤재. 사진=창비

[오피니언뉴스=강대호 칼럼니스트] 한 소년의 얼굴 그림이 있는 책이다. 그의 눈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모르겠고, 다문 입은 쉽게 열릴 것 같지 않다. 한마디로 소년은 표정이 없다. 아마 대형서점에 가본 사람이라면 한 번 정도는 봤을 표지다. 2017년 봄부터 지금까지 쭉 ‘소설 부문 베스트셀러’에 오른 책이니까.

‘손원평’의 장편소설 ‘아몬드’가 그 책이다. 저자는 이 작품으로 ‘창비청소년문학상’을 받았다. 저자 소개에서 그녀의 영화 관련 이력이 눈에 띄었다. 그러고 보니 ‘손원평’이라는 이름이 낯익다. 그녀는 얼마 전에 개봉한 영화 ‘침입자’의 각본을 쓰고 직접 연출도 한 영화감독이다.

지난주 서점에 진열된 ‘아몬드’를 펼쳐보니 ‘초판 87쇄’다. 상당히 많은 사람이 읽었다. 집에 있는 ‘아몬드’을 펼치니 2017년 봄에 나온 ‘초판 1쇄’였다. 난 그때 표지의 소년이 궁금해서 집에 데려왔었다. 당시 내가 읽었던 흔적을 살피며 다시 읽었다.

‘아몬드’라는 제목은 꽤 상징적이다. 주인공은 뇌 속의 ‘편도체’가 정상인보다 작다. 편도체는 아몬드 모양으로 크기도 비슷하고, 공포와 불안감과도 관련이 있다. 주인공의 엄마는 그에게 아몬드를 먹인다. 혹시나 그의 머릿속의 아몬드도 커질 거라 생각하면서.

 

'아몬드'. 창비 펴냄.
'아몬드'. 창비 펴냄.

열여섯 살 소년 선윤재는 ‘감정 표현 불능증’을 앓고 있다. ‘아몬드’라 불리는 편도체가 작아 분노도 공포도 잘 느끼지 못한다. 타고난 침착성, 엄마와 할머니의 지극한 사랑 덕에 별 탈 없이 지냈지만, 크리스마스이브이던 열여섯 번째 생일날 비극적인 사고가 일어나 가족을 잃는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윤재 앞에 ‘곤이’가 나타난다. 13년 만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게 된 곤이는 분노로 가득 찬 아이다. 곤이는 윤재에게 화를 쏟아 내지만, 감정의 동요가 없는 윤재 앞에서 오히려 쩔쩔매고 만다. 윤재는 어쩐지 곤이가 밉지 않고, 오히려 궁금해진다. 두 소년은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특별한 우정을 쌓아 간다. 그리고 윤재는 조금씩 내면의 변화를 겪는다.

주인공 ‘윤재’는 감정을 느끼는 데 어려움을 겪는 독특한 캐릭터다.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의 이면을 읽어 내지 못하고 공포도 분노도 잘 느끼지 못한다. 그런 윤재는 가족들을 잃었지만 ‘평범하게’ 살아가려고 가까스로 버틴다.

하지만 윤재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행동이 학교에서는 튀는 행동으로 주목을 받게 된다. 튄다는 것은 평범하지 않다는 거다. 소년은 평범하게 사는 게 무엇인지 이해해 보려 부단히 노력한다.

평범……. 내가 중얼거렸다.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남들과 같은 것. 굴곡 없이 흔한 것. 평범하게 학교 다니고 평범하게 졸업해서 운이 좋으면 대학에도 가고, 그럭저럭 괜찮은 직장을 얻고 맘에 드는 여자와 결혼도 하고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그런 것. 튀지 말라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것. (손원평 ‘아몬드’ 90쪽)

‘아몬드’는 이렇듯 ‘평범함’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소설이다. 우리는 주위 사람들과 감정을 교류하면서 학교에 다니고, 직장을 다니고, 사회생활을 하는 ‘평범’한 일상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지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인 생활이라고.

그런데 주인공 윤재는 그렇지 못하다.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 게 어렵다. 서툰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하질 못한다. 덕분에 가장 힘든 순간에도 그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옆에 없다.

하지만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하던 순간에 윤재 곁에 새로운 인연이 다가온다. 어두운 상처를 간직한 소년 ‘곤이’와는 반대로 맑은 감성을 지닌 소녀 ‘도라’, 윤재를 돕고 싶어 하는 ‘심 박사’ 등이 그러한 인물들이다. 윤재와 이들 사이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타인의 감정을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한다.

이 작품에서 윤재의 말투는 마치 표지의 그림을 닮은 것 같다. 그의 말은 무척이나 덤덤하고 군더더기가 없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꼭 그렇게 말할 것 같긴 했다. 이러한 윤재의 어조는 그의 외로움을 더욱 강조하는 듯했다. 하지만 윤재의 무덤덤한 혹은 무감정한 일상에 변화를 불러온 한 장면이 있다.

제자리에. 도라는 안경을 휙 벗어 놓고 땅을 짚었다. 준비. 그때 도라의 눈을 봤다. 살짝 올라간 눈꼬리. 숱 많은 속눈썹. 동공이 연갈색 빛을 뿜어낸다. 출발. 도라가 달린다. 가늘고 튼튼한 다리가 땅을 박차고 흙먼지를 피우며 멀어져 갔다. 그 누구보다도 빨리. 바람 같은 움직임이었다. 힘차고 가벼운 바람. 순식간에 도라가 한 바퀴를 돌아 제자리에 왔다. 결승을 통과하고 나서 멈추기 직전 내 앞에 놓인 안경을 줍고 얼굴에 얹었다. 신비한 눈이 안경 뒤로 사라졌다. (손원평 ‘아몬드’ 182쪽)

운동회에서 달리기 시합에 나간 도라를 윤재가 지켜본 장면이다. ‘아몬드’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문단 중 하나다. 이 문단의 모든 문장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배치되었는데 그 묘사가 매우 시각적이다. 실제 ‘도라’가 뛰는 게 보이는 듯하고, 그 모습을 윤재의 시선이 쫓아가는 게 느껴지는 듯하다.

 

손원평 작가. 사진=은행나무 출판사
손원평 작가. 사진=은행나무 출판사

‘아몬드’의 모든 문단과 문장은 이렇듯 시각적이다. 명사와 동사는 적절한 장소에 놓였고 형용사나 부사는 많이 쓰이지 않았다. 군더더기 없는 문장들이지만 마치 영상을 보듯 눈에 다가온다. 이는 저자 손원평의 영화 관련 이력을 보면 납득간다. 그는 영화 공부를 했고, 시나리오를 썼고, 연출도 했다. 그래서 그의 문장은 마치 영상을 보듯 시각적이었을 것이다.

윤재는 눈앞에 자꾸 나타나는 도라가 궁금해진다. 그의 무감정한 일상에, 그의 딱딱한 아몬드에 변화가 오는 걸까. ‘아몬드’를 한 문장으로 정의하자면 ‘한 소년의 성장 소설’이다.

‘아몬드’는 공감을 상실했다는 시대에, 그만큼 공감이 어려운 시대에, 그래서 공감이 필요한 시대에 독자들의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평범한 일상을 누릴 수 있고 서로 감정을 주고받을 수 있는 걸 감사하게 만들었을까.
 
이런 저자의 메시지가 우리나라에서만 통하는 건 아니었나 보다. ‘아몬드’가 ‘2020 일본 서점대상’에 선정되었다. 이 상은 일본의 서점 관계자들이 뽑은 그해 최고의 책에 주는 상이다. 그래서 저자들이 소중하고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그런데 ‘아몬드’가 한국은 물론 아시아에서 나온 책으로는 처음으로 뽑힌 작품이라고 한다. 그 의미가 매우 크다.

‘아몬드’는 출판사와 서점에서 ‘청소년문학’으로 분류했다. 하지만 성인들이 읽어도 좋을듯하다. 감정 표현하는 걸 서툴러 하거나 감정 표현 받는 걸 낯설어하는 현대인들을 은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몬드’는 ‘감정의 성장통’을 겪고 있는 세상의 모든 윤재들에게 혼자서만 앓고 있지 말라고 다독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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