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현진 칼럼] 한국형 백지신탁제도, 좀 더 유연하게 개선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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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현진 칼럼] 한국형 백지신탁제도, 좀 더 유연하게 개선해야
  • 차현진 한국은행 인재개발원 교수
  • 승인 2020.06.02 11:5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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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처분만 강조하면 민간인의 공직진출이 가로막혀"
조윤제 금통위원, 보유주식 '직무연관성' 심사청구 계기
한국식 백지신탁제도 개선돼야...직무관련성 기준 엄격하게
차현진 한국은행 인재개발원 교수

[차현진 한국은행 인재개발원 교수] 지난 5월 28일 한국은행은 기준금리를 0.75%에서 0.5%로 낮추었다. 그와 동시에 금년 경제성장률 전망치도 2.1%에서 –0.2%로 낮추었다. 우리 경제가 상당히 심각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날 이후 언론에 보도되는 내용은 좀 엉뚱했다. 4월에 임명된 조윤제 금통위원이 기준금리 의결과정에서 제척(除斥)되었다는 내용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다. 보유하고 있는 주식이 직무와 관련성이 있는 지 정부의 심사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기준금리를 결정하는 회의에 참석을 자제(abstain)했다는 사실에 지나치게 관심이 쏠린다.

주식 보유에 대한 직무관련성 심사는 매년 200건 이상 실시되는, 상당히 평범한 일이다. 그 심사는 ‘주식백지신탁 심사위원회’가 담당한다. 거기서 왜 백지신탁이 나오는가? 이 글에서는 우리나라의 백지신탁제도의 내용과 개선방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나라의 백지신탁제도는 주식의 매도를 기본으로 하는 점에서 다른 나라의 제도와 크게 다르다. 그 제도를 처음 도입한 미국에서는 공직자가 주식 처분을 특별히 요구받은 때에만 주식을 처분한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제도는 개선의 여지가 많다.

공직자의 백지신탁 의무화는 1978년 미국에서 시작

공직자의 백지신탁(blind trust)이란, 공직자의 재산관리를 제3자에게 맡김으로써 공적 직무와 사적 이해 간의 충돌을 차단하는 장치다. 군인 출신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이해충돌 문제의 제거(obviate the conflict problem)'를 목적으로 솔선수범한 이후 미국 공직사회의 관행으로 자리잡았다. 즉, 주요 공직자로 임명된 사람이 법무부나 상원 인사청문위원회(confirmation hearings committee)와 협의하여 백지신탁의 범위와 조건을 정하고 그 약속을 지켰다.

그 관행이 법률로 격상된 데는 1970년대의 혼란스런 정치상황이 크게 작용한다. 1973년 뇌물수수와 탈세 때문에 스피로 애그뉴 부통령이 사임하고 그 이듬해에는 닉슨 대통령까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했다. 그 바람에 공화당 하원 원내대표였던 포드가 대통령이 되었는데, 그는 민간인인 넬슨 록펠러를 부통령으로 ‘지명’했다. 그럼으로써 국민이 뽑지 않은 사람들이 대통령과 부통령이 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생겼다.

게다가 넬슨 록펠러는 석유 재벌 존 D. 록펠러의 손자였다. 우리나라 삼성그룹의 이재용 부회장 정도에 비교될 수 있는 인물이, 국민의 뜻과 무관하게 부통령이 되자 여론이 들끓었다. 그때 시민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서 록펠러 부통령은 1억 1600만 달러에 이르는 재산을 백지신탁하겠다고 약속했다(주식의 처분은 약속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 시민들은 그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1976년 대통령 선거에서 ‘도덕정치’를 내세우며 당선된 카터 대통령은 취임 직후 백지신탁제도를 의무화한 ‘공직자 윤리지침’을 제정했다. 이어 1978년에는 이를 법률(정부윤리법, Ethics in Government Act)로 격상시켰다.

백지신탁제도는 허점이 많아

하지만 미국의 공직자 백지신탁제도는 허점이 많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백지신탁 의무를 벗어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좋은 예다.

잘 알려진 것처럼 트럼프 대통령은 4년 전 취임 당시 30억 달러에 이르는 재산을 백지신탁하지 않았다. 두 아들이 이미 호텔업을 경영하고 있어서 제3자에게 재산관리를 맡길 필요가 없다는 이유였다. 그 결정을 두고 뉴욕 타임즈 지가 “백지도 아니고, 신탁도 아니다”고 신랄하게 비판했지만(2016년 11월 15일), 법률적으로는 뾰족한 제재수단이 없다.

야당인 민주당은 절치부심하다가 최근 코로나19 위기를 맞아 겨우 반격할 방법을 찾았다. 트럼프 대통령이 3월 13일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자 의회가 초당적으로 합심하여 3월 27일 2조 2천억달러 규모의 초대형 추경예산을 승인했는데(CARES법), 그 법에서 대통령의 소유 기업을 명시적으로 배제한 것이다.

호텔업과 레저산업은 코로나19 위기로 막심한 타격을 입은 산업의 하나다. 그래서 긴급재정지원 대상에 호텔과 리조트도 포함되지만, ‘주요 공직자 및 가족 소유 기업’은 제외했다. 트럼프는 경쟁 호텔과 리조트들에게만 혜택이 돌아가는 법안에 서명하면서 굉장히 씁쓸했을 것이다.

한편, 공직자의 이해상충 방지장치에는 백지신탁만 있는 것이 아니다. 겸직제한, 재산등록과 공개, 향응이나 금품 수취 금지, 직무 배제 등 다양하다. 로비스트가 많은 미국에서는 로비스트와의 통화나 면담도 기록하고 통제한다. 그 중에서 백지신탁은 보편성이 상당히 낮다. OECD의 조사에 따르면, 공직자의 백지신탁제도는 미국, 한국 등 8개국에서만 시행 중이다.

영국에서는 백지신탁이 오히려 공직자의 이해상충을 부추기는 장치로 간주된다. 정치인들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방법으로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즉 일부 기업인들이 익명의 백지신탁기금을 조성하여 정치인을 은밀히 후원한 뒤 그 대가로 작위를 수여받고 종신직 상원의원이 되었다. 1997년 그 사실이 밝혀진 뒤 정치인에 대한 백지신탁기금 조성을 금지하는 법률이 제정되었다. 이처럼 영국에서는 백지신탁이 부패와 타락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우리나라의 공직자 백지신탁은 '기형적'

우리나라에서 공직자의 이해상충을 방지하기 위한 법규는 다양하다. 국가공무원법, 공직자윤리법, 청탁금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등이 그 예다. 그 중에서 백지신탁은 공직자윤리법에서 다룬다.

1983년 공직자윤리법이 제정될 때에는 백지신탁 의무가 포함되지 않았다. 고위 공직자의 재산등록과 공개 수준에서 만족했다. 그런데 2002년 시민단체인 참여연대가 백지신탁제도에 대하여 주의를 환기시킨 뒤 2005년 공직자윤리법에 추가되었다. 그 과정에서 미국처럼 정치가 작용했다.

2003년 참여정부 출범 당시 정보통신부 장관으로 지명된 진대제 장관은 성공한 기업인이었다. 당시 공개된 등록재산이 100억원 대에 이르렀는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70억원 정도의 장부가치가 있는 스톡옵션(7만 주)을 행사하면, 곧 40배의 이익을 거둘 수 있는 상황이었다. 장관이 재임기간 중 직무연관성이 높은 스톡옵션 때문에 1천억 원 대의 부자가 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여론이 비등했다. 결국 진 장관은 스톡옵션 행사를 포기했다(삼성전자 주식은 처분하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2004년 총선에서는 여야 모두 백지신탁제도 도입을 경쟁적으로 약속했다.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의 박근혜 대표는 “제17대 국회의원 당선 전 재산을 백지신탁하고, 국가와 국민을 위한 의정 활동에만 전념하겠다”라고 약속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백지신탁제도가 2005년 공직자윤리법에 추가되었다.

넬슨 록펠러 부통령의 사례에서 시작된 미국의 백지신탁제도는 자산을 관리하는 수탁자의 독립성이 핵심이다(백지신탁= 독립 관리신탁). 그런데, 진대제 장관의 스톡옵션 포기 사례에서 시작된 우리나라의 백지신탁제도는 주식의 처분이 핵심이다(백지신탁 = 처분신탁). 주식을 처분하지 않으려면 '직무관련성이 없다'는 특별한 결정을 얻어야 한다.

물론 미국에서도 공직자가 보유 주식을 반드시 처분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1989년 제정된 윤리개혁법(Ethics Reform Act of 1989)에서는 정부윤리국(OGE)이 직무연관성이 있다고 판단하면 해당 공무원은 해당 주식을 60일 내에 처분해야 한다. OGE로부터 통보가 없으면, 주식을 처분하지 않아도 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 통보를 받지 않았다.

공직자의 주식의 처분을 기본으로 삼는 우리나라에서는 기업의 지배력을 유지해야 하는 대주주는 공직자가 될 수 없다. 실제로 2013년 박근혜 정부 출범 당시 중소기업청장에 내정되었던 기업인(황철주 주성엔지니어링 대표)이 내정 사흘 만에 공직을 포기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그 사건을 계기로 당시 행정안전부와 새누리당은 공직자윤리법 개정을 검토했다. 그러나 공직자의 주식 보유는 무조건 금지해야 한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주식백지신탁 시행 7년 모니터 보고서』, 참여연대, 2012년 11월). 그래서 백지신탁제도 개선논의는 흐지부지 되었다. 그 결과 2017년 5월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의 인선에 유난히 애를 먹었다. 11월에 이르러서야 정치인 출신의 후보자(홍종학 전 의원)가 겨우 내정되었다.

2013년3월 황철주 중소기업청장 내정자가 주성엔지니어링 회사 주식을 백지신탁 해야하는 점이 부담스럽다고 밝힌 뒤 중기청장 사의를 표명하며 고개를 숙였다. 사진= 연합뉴스
2013년3월 황철주 중소기업청장 내정자가 주성엔지니어링 회사 주식을 백지신탁 해야하는 점이 부담스럽다고 밝힌 뒤 중기청장 사의를 표명하며 고개를 숙였다. 사진= 연합뉴스

공직자의 재산권도 보호해야

공직자의 재산권이 필요 이상으로 침해된다면, 민간인의 공직 진출에 높은 장벽이 생긴다. 중소벤처기업부 장관뿐만 아니라 다른 공직에도 유능한 사람을 기용하기가 어려워진다. 따라서 공직자 백지신탁제도를 현실성 있게 고쳐야 한다.

공직자윤리법을 개정할 때는 급작스런 주식 처분에 따른 불이익을 최소화하는 데 관심을 가져야 한다. 헌법상의 재산권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미국은 두 가지 보완장치를 갖추고 있다.

첫째, 매각시점의 시세차익(capital gain)에 대한 소득세 면제다. OGE가 주식처분을 명령할 때는 처분확인서(certificate of divesture)를 발행하는데, 이 확인서는 소득세 면제의 근거가 된다. 그 덕분에 골드만삭스 CEO 출신인 헨리 폴슨은 2006년 재무장관에 취임할 때 6억 달러 상당의 골드만삭스 지분을 전액 처분하면서 5천만 달러 상당의 소득세를 면제받았다.

둘째, 백지신탁 이외에 분산신탁(diversified trust)을 인정한다. 공직자가 보유한 주식을 처분하지 않고, 거대한 포트폴리오 속에 편입시켜 관리하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다. 앨런 그린스펀 미 연준 의장이 분산신탁을 잘 활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주식 브로커의 아들로 태어나 민간 투자회사에 근무했던 경력 때문에 상당량의 금융회사 주식을 보유했지만, 주식을 처분하지 않고 분산신탁에 맡겼다. 우리나라의 공직자윤리법에도 이런 장치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법률개정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도 있다. 행정안전부가 직무관련성의 기준을 엄격하게 마련하는 것이다. 개인의 재산권 보호 개념이 강한 미국에서는 직무관련성 기준이 매우 엄격하고 분명하다. 그래서 뉴욕 시장 블룸버그는 블룸버그 통신사 경영권을 포기하지 않고서도 12년 간 공직을 지켰다. 그에 비해서 우리나라는 직무관련성 기준이 모호할 뿐만 아니라 직무관련성 심사 청구 자체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2012년 참여연대의 보고서에서는 공직자의 심사청구 자체를 ‘큰 문제’라고 표현했다.

그런 환경이 만든 것이 2018년 5월 임명된 임지원 금통위원의 사례다. 임 위원은 민간 회사 근무 당시 취득한 외국 주식(미국계 JP모건 은행)은 직무와 관련이 없다고 판단했다. 한국의 통화정책으로 미국 주가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생각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준금리를 결정하는 회의에도 참석하여 의결권을 행사했다. 하지만, 주위의 권고와 압력이 커서 결국 미국 주식을 모두 처분했다. 직무연관성 기준이 분명하지 않은 데서 나온 어정쩡한 결말이었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조윤제 금통위원이 보유 주식(비 금융회사)의 직무관련성 심사를 청구한 것은 매우 용기 있는 행동이다. 개인의 재산권을 지키면서 공직 수행의 요건을 확인하겠다는 뜻인데, 주영·주미 대사를 지낸 학자다운 결정이라고 판단된다. 아울러 직무연관성 심사를 청구한 뒤 금통위 회의 참석을 자제한 것은 상당히 깔끔한, 정공법이다(그의 공직 근무경험에서 나온 결정이라고 보인다).

끝으로 한마디. 미국의 폴슨 재무장관은 직무관련성이 큰 골드만삭스 주식을 처분하면서 소득세는 내지 않았다. 게다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시작되어 그 주식의 가격이 폭락했다. 폴슨에게는 공직을 맡았던 것이 큰 횡재였던 셈이다.

우리나라는 정반대다. 진대제 장관은 스톡옵션 행사를 포기하여 수백억 원을 날렸다. 조윤제 위원도 비슷하다. 코로나19 위기로 주식시황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주식을 급하게 처분해야 한다. 거래량도 많지 않은 종목이라서 긴급하게 대량을 처분할 경우 상당한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진대제 장관과 조윤제 위원은 경기고 66회(1970년 졸업) 동기다. 공직을 맡았다는 이유로 대제-윤제 두 고교 동창생이 큰 손실을 감수해야 하는 것을 우연으로만 간주할 것인가? 이번 기회에 한국식 백지신탁제도는 개선되어야 한다. 최소한 직무관련성 기준만이라도 엄격하게 세워져야 한다.

● 차현진 교수는 한국은행에서 36년째 근무하고 있는 금융전문가다. 한국은행 조사부, 자금부, 금융시장국 등 정책관련 부서를 거쳤고 워싱턴사무소장, 인재개발원장, 금융결제국장, 부산본부장 등을 역임했다. 대통령비서실과 미주개발은행(IDB) 등에서도 근무했다. '애고니스트의 중앙은행론', '숫자 없는 경제학', '금융오디세이', '중앙은행 별곡', '법으로 본 한국은행' 등 다수의 저서를 집필한 금융 에세이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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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상용 2020-06-03 12:48:05
좋은 글 감사합니다. 지금의 현실에 맞게 백지신탁제도를 개정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성공한 기업인도 공직자로서 국가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이 더 넓어지기를 기대합니다

1123 2020-06-02 21:52:18
요즈음, 차현진 교수님 글을 읽는 재미로 살고 있습니다. 또 워낙 성실 꾸준하신 분이라 많은 곳에서 글을 기고하시는데, 그거 찾는 재미 또한 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