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위기 19) 백악관 지하벙커 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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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위기 19) 백악관 지하벙커 회의
  • 김인영
  • 승인 2015.11.22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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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선물…북한도발 억제 위해 한국 구하기로 결정

 

1997년 12월 19일, 워싱턴의 백악관 상황실. 헐리웃의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 곳은 전쟁이 벌어졌을 때 미국의 총지휘부가 집합해 최고의 명령을 내리는 지하 벙커다. 숨가쁜 전쟁의 상황을 역전시키기 위해 미국 대통령은 물론 국무 장관, 국방 장관, 중앙정보국(CIA), 국가 안보위원회(NSC) 최고책임자가 머리를 맞대고 의논한다. 이곳에서의 결정이 전쟁과 평화의 갈림길이다.

이날은 매들라인 올브라이트(Madeleine Albright) 국무장관, 윌리엄 코언 (William Cohen) 국방장관, 로버트 루빈(Robert Rubin) 재무장관, 샌디 버거(Sandy Berger) 백악관 안보담당 비서 등이 참석했다. 전쟁 발발 지역은 한국이었다. 한국은 전날 대통령 선거가 끝나서 야당인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가 승리했다. 그러면 북한군이 한국의 정치적 과도기를 이용, 남침한다는 첩보가 있었던 것인가.

그러나 이날 백악관 지하 상황실의 주제는 한국의 환란이었다. 북한군이 쳐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달러가 부족해 부도가 나기 직전에 있는 한국의 난리를 도와주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미국의 수뇌들이 머리를 맞대고 모인 것이다. IMF가 570억 달러를 지원키로 했음에도 한국 경제는 회생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원화는 며칠 사이에 달러당 2,000원까지 폭락했고, 외국 채권은행들은 한국에 빌려준 돈을 마구잡이로 빼내갔다. IMF 관계자에 따르면 당시 하루에 10억 달러의 외국인 투자자금이 한국을 탈출했다. 내년 3월까지 갚아야 할 단기 외채는 수백억 달러에 이르지만 외국 은행들이 만기연장해주는 비율은 10~15%에 지나지 않았다. 시티은행등 미국의 은행들은 한국이 며칠 내에 모라토리엄을 선언할 것으로 우려, 채권 회수대책을 세워 놓고 있었다. 한국은 북한이 전쟁을 일으켜 서울이 오늘내일 함락 당하는 상황과 다름 없는 형국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이날 백악관에서 열린 「한국 관련 긴급 안보회의」에서는 CIA 보고가 없었다. 오히려 JP 모건이나 시티은행, 체이스맨해튼 은행에서 만든 한국 경제 상황 보고서가 올라왔다. 블룸버그 뉴스만 없었을 뿐이지, 뉴욕 월가의 트레이딩 룸에서 결정할 일을 전쟁 상황실에서 의논했다.

▲ 백악관 뜰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어린이들 행사에 휘쓸을 불고 있다. 2014.4.1 /사진=백악관 홈페이지

루빈 장관이 이끄는 재무부는 한국 정부가 요구한 조기 지원을 반대하고 있었다. 당시 워싱턴을 드나들던 한국 고위관리들에 따르면 미국 재무부는 한국이 모라토리엄을 선언한 다음 부채 청산을 위한 협상을 계획하고 있었다. 잘난 척 하는 아시아 국가를 시범 케이스로 본때를 보여주자는 심사였던 것 같다. 루빈은 한국의 임창렬 부총리와 수차례 전화 통화를 갖고 한국 상황을 주시했지만, 그는 한국이 약속한 개혁을 이행하지 않는 한 경제 회생의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뉴욕 금융시장에서 IMF 협상 이후에도 미국 재무부가 한국에 대해 강경 입장을 고수한 것은 루빈 장관이 한국에 등을 돌리고 있기 때문이고, 이를 푸는 것이 한국을 금융위기에서 구해내는 지름길이라는 견해가 유력했다. 루빈은 골드만 삭스 회장 시절에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때 재경원 관리들이 만나 주지 않은데 대한 앙금이 남아 있다는 설이 뉴욕 월가에 정설처럼 나돌았다. 김만제 포철회장, 정인용 전 부총리를 주축으로 한 한국의 경제 특사가 워싱턴을 방문, 루빈 장관과의 면담을 요청했으나, 그는 휴가를 이유로 면담을 거절했었다. 그는 미국 동북부에 있는 자신의 별장에서 낚시를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워싱턴 행정부는 재무부만 있는 게 아니다. 국무부, 국방부, 국가안보위원회에서는 한국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아갔다. 경제불안을 장기간 방치할 경우 정치, 사회 불안으로 이어져 자칫 북한의 도발을 부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백악관 안보회의에서 올브라이트 국무, 코언 국방 장관은 한국 문제를 해결할 것을 루빈 재무장관에게 요구했다. 재무부는 국무부, 국방부에 약하다. 루빈도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 없는 여건이 됐고, 마침내 한국을 지원하자는 의견에 동조했다.

백악관 회의 결과는 즉시 빌 클린턴 대통령에 보고돼, 그날 하오 클린턴은 서명했다.

뉴욕타임스는 백악관 회동에서 한국 지원을 결정한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한국에서는 미국 행정부가 철저히 경계망을 펴고 있었다. 그 곳은 3만7,000명의 미군이 지구상에서 가장 국수주의적인 정권과 대치하고 있는 곳이다. 일부 펜타곤 전략가들은 북한의 강경파 장군들이 한국의 경제 위기를 이용하려고 한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더 위급한 우려는 경제 불안이 한국의 취약한 민주주의를 위협하지 않을 것인가, 미국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한국이 미국과의 안보동맹을 의심하지 않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뉴욕 월가 사람들은 미국 재무부의 눈치를 많이 본다. 그들은 재무부가 잘 움직이지 않을 때 로비스트를 써서 국무부나 국방부를 설득함으로써 우회적으로 재무부를 움직이는 기법을 쓴다. 당시 월가의 금융업자들이 국무부나 국방부를 설득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결과적으로 그들은 자신들이 한국에 투자한 돈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려고 온갖 노력을 했을 것이다.

▲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 /사진=백악관 홈페이지

미국 행정부가 한국 지원을 결정하는데 큰 힘이 됐던 또다른 요인은 서울에 진출해 있는 외국 금융 기관의 움직임이었다. 외국은행 서울 지점장들은 이미 두어달 전부터 한국 금융위기 가능성을 감지하고, 자국 본사에 경고를 했다. 외국 은행 서울 지점장들은 여러 차례 만나 한국 지원을 논의했으나, 소속 국적에 따라 견해가 달랐다. 일본계 은행들은 누적된 부실 채권을 줄여야 하기 때문에 만기 연장에 소극적이었고, 비교적 여유가 있는 미국과 유럽계 은행들은 한국이 파산해서 돈을 못 받는 것보다 도와주는 것이 낫다는 의견이었다.

미국계 은행 가운데는 샌프란시스코에 본점을 두고 있는 뱅크어메리카(BankAmerica), 시티은행의 모은행인 시티코프(Citicorp), 퍼스트 시카고 NBD등이 만기 연장에 적극적이었다. 다른 미국계 은행들은 워싱턴의 정치적 결단을 기다렸다. 23일 한국의 종합주가지수는 7.5%나 폭락하고, 원화 환율은 1달러당 1,962원으로 2,000 대를 바짝 육박했다. 한국 경제상황이 더 이상 걷잡을 수 없게 되자, 외국은행 서울지점장들은 모임을 갖고 한국을 지원하기로 의견을 모아 대내외에 발표했다. 이들의 견해가 미국 행정부의 큰 도움이 됐다. 워싱턴 행정부는 까다로운 의회를 설득할 명분을 갖게 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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