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선박9 - 이사부함대 규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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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선박9 - 이사부함대 규모
  • 이효웅
  • 승인 2015.11.21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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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이사부 전선(戰船)과 이사부 함대(異斯夫艦隊) 규모
 이사부 전선은 오늘날 우리가 가장 궁금해 하는 관심사이다.
 필자가 보트 탐사대를 두 번 이끈 경험 등 지금까지의 모든 상황을 종합하여 이사부 장군이라고 생각하고 아래와 같이 추론해 보고자 한다.

가. 이사부 전선의 형태
  이사부 장군이 항해를 하였을 당시의 선박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고려해야 한다.
 ① 4-5세기 주형토기에서는 중형선들이 보이지 않는다.
 ② 선박의 갑판에 목우사자를 실을 수 있어야 한다.
 ③ 톱을 사용하지 않았다.
 ④ 당시의 전선들은 돛을 사용하지 않았다.
 


 4-5세기 왜의 히가시도노스카 고분 출토 타원통형 토기에 그려진 선형회화에서 보듯이 왜의 선박에서도 돛을 사용한 흔적을 찾을 수 없었고, 왜의 7-8세기경 쓰여 진 ‘고사기’ ‘진구의 삼한 정벌’의 내용을 보면, 홍성화, 『한일고대사 유적 답사기』119-120
 

  황후는 신이 가르쳐준 대로 군사를 정비했다. 배를 가지런히 하여 바다를 건널 때 바다의 크고 작은 고기들이 모든 배를 업고 건넜다. 때마침 순풍이 불어 배들은 파도를 따라 순조롭게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그 배들을 받치고 있던 파도가 신라 땅으로 밀려들어가더니 국토의 반 정도를 덮치고 말았다. 이를 본 신라 국왕은 깜짝 놀라 두려워한 나머지 “지금부터 천황의 명령에 따라 말을 사육하는 자가 되어 해마다 배를 정렬하여 배안을 비우는 일 없이, 또 삿대나 노를 말리는 일 없이 하늘과 땅이 있는 한 끊이지 않고 공물을 바치겠나이다.”라고 했다.
  ‘삿대나 노를 말리는 일없이’를 보아도 4-5세기 당시 신라나 왜에는 돛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본다.
 
 정진술은 ‘한국해양사’ 고대편에서 <도2-28>호림박물관의 주형토기의 승조원은 놋좃의 숫자로 보건데 노잡이 12명과 조타수2명으로 최소한 14명이상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진술, 『한국해양사』 삼국시대의 주형토기, 216
 라고 하였는데, 필자는 이 선박의 구조로 보아 내부가 간단한 이체성형선이나 삼체성형선으로 보이며 좌우의 놋좃 12개로 6명의 노잡이가 쌍노를 사용하는 소형 선박이라고 본다.  
 
 가야의 4-5세기의 주형토기를 보면, 원주목의 이체성형선에서 일체성형구조선과 삼체성형    구조선으로 바뀌는 단계이고 노잡이들은 일렬방식이다. 이와 같은 방식의 선박은 연안에서    8-10명 이내의 소형선은 가능하나 20명 정도의 중형선은 맞지 않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왜인(왜병)들이 타고 온 전선들은 많은 군사를 실었고 많은 백성들을 노획하여 갔다. 그리고 육지에서 우산국을 공격하는 데는 최소한 보름 정도의 식수와 식량 및 무기를 등을 실어야 하므로 중·대형선이 되어야 한다.

 4-6세기의 전선 제작은 다체성형선으로 작은 통나무를 가공하여 밑판을 만들고, 가공한 통나무를 쌓아서 측판을 만드는 방식인데 5-6세기의 도구나 기술로 보아 용골형은 어렵다고 보고 평저선으로 제작한다.
  당시의 전선을 연구 중이지만 간략히 설명하면, 선박이 완전 수밀(방수)이 안 되기 때문에 흘수선에 맞추어 상하 2층 전후 3칸의 격실을 나누고 아래층은 주로 발라스트 칸으로 사용하면서 식수를 저장하고 윗층에 식량과 무기 등을 싣는다.
 
 윤명철씨는 ‘삼척지역의 해양 도시적 성격과 김이사부 선단의 출항지 검토’ 윤명철, ‘삼척지역의 해양 도시적 성격과 김이사부 선단의 출항지 검토’, 이사부 삼척출항과 동해비젼, 224
에서
 신라군은 음력 6월에 우산국을 공격하였다. 이는 한여름이며 무풍에 가깝거나 서풍 계열의 바람이 미미하게 부는 계절이다. 따라서 공격 선단은 돛을 이용하기 보다는 노를 주력으로 사용하였을 확률이 높다. 삼척에서 울릉도 간의 거리는 대략 78마일다. 무풍과 노젖기만으로 항해시 4마일로 1일에 8시간 항해하면 32마일(약59km)을 항해한다. 대략 3노트로 24시간 동안 항해한다면 1일 72마일을 항해 할 수 있다. 급습이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당시에 사용된 선박도 검토할 필요성이 생긴다.

        


 <표-8>의 비교표에 보듯이 과거의 전선은 양질의 항구가 없는 곳이 대부분이므로 주로 강을 타고 출입하거나 정박하기 때문에 노를 사용하고 만들기 쉬운 평저선이 제일 좋다.
 또한 과거의 전선은 내구성이 약하여 오래 사용할 수 없으므로 전쟁이나, 태풍 시에는 대부분 파괴된다. 특히, 울릉도와 같은 곳은 항구나 강이 없으므로 정박이 쉽지 않아 돌풍, 폭풍, 태풍 등으로 쉽게 파괴 된다.
  삼국사기의 ‘병선에 목우사자를 싣고 그 나라 해안에 다다라 속임수로 통고하기를’ 김부식,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제4, 지증마립간 13년
에서 보듯이 우산국을 공격할 시 우산국 전선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때는 전선들이 파괴되었다고 본다.  
 돛이 없는 전선의 비교를 위하여, 육지에서부터 울릉도 및 독도까지 가장 유사한 방법인 카약으로 항해 계획을 세워 추진해보고자 한다. 필자는 못하지만, 카약동호인 중에서 지원자를 선발하여 이사부항로탐사를 실시하면서 검증해 보고 싶다.
 
 앞으로 필자가 연구할 이사부 전선은 신라 최초의 범선을 만들었다고 추론하고, 여기에 맞게 연구해 보고자 한다.

나. 이사부 함대의 규모
  최동렬은 ‘이사부를 깨워 독도를 다시 보다’에서
  우산국이 진한의 소국 보다 작은 나라라고 치고, 300-400여호 규모라고하고 가정할 때 그 인구는 가구당 5명씩 잡으면 1,500-2,000여명이 된다. 고대의 전쟁 특성상 15-16세 이하의 남자는 대개 전투 요원이 된다고 가정할 때 우산국의 군세는 700-800명 정도로 파악할 수 있다. 중략....그러나 1,000명 미만 이라고해도 우산국 군사들은 거친 바다를 무대로 육지를 공략하면서... 최동렬 『이사부를 깨워 독도를 다시 보다』 우산국, 무력으로는 어렵다. 84

라고 가정하였지만, 필자는 오늘날 우산국에 남아 있는 유적과 유물들을 보아 5세기 말의 우산국 주민 수는 그렇게 많지 않은 3개 정도의 소수 집단 부락을 형성하였다고 본다.  

 정보 수집에서 우산국의 주민이 400-500명(전투 인원 약300명)이라고 최대로 가정하면, 공격은 수비보다 많아야 하므로 배 정도인 600명 정도의 군사가 필요하며 여기에 맞추어 함대 규모를 정한다. 이사부 함대 규모를 20척(30명씩)으로 결정하고, 10척씩 2개 선단으로 편성하여 한 선단은 5척씩 2개조로 편성한다.(울릉도 항로는 안개, 파도 등으로 선박이 많아지면 관리가 힘들다,) 

 전선의 크기는 제작하기 쉬운 중형선 20척으로 전선의 형태는 노를 주로 사용하고 돛 한 개를 보조로 사용하는 준범선의 다체성형선으로 제작한다. 노잡이의 수는 좌·우 6명씩 이렬방식 2교대(24명)로 운행하고, 척당 군사의 수는 30명씩, 20척, 목우사자 20두, 계 600명 정도로 계획한다.(여기서 대장선은 생략하고, 정보수집에 의하여 전선의 수는 증감한다.)  
 
 참고로 약1,000년 후인 조선시대의 삼척포진의 병선은 4척, 38인을 3령으로 나누었다.
 삼척포의 병선(兵船)은 4척인데 성종 6년(1475)과 12년(1481)에 다시 수리를 하였으며,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는 연훈(煙燻)을 하였다. 병선을 유실한 자에게는 포 110필을 징수하였다. 병선은 모두 작은 배였고, 수군은 병선 한 척당 38인이었다. 처음에 수군을 3령으로 나누고 호는 각기 4정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수군이 많이 도망하였기 때문에 2정으로 나누어 6번을 하여 다시 3령으로 만들었다. 심의승엮음 배재홍옮김, 국역 삼척군지, 29


  전선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가는 당시의 기술력과 도구라고 본다. 당시에 톱이 발명되었다면 전선의 크기와 구조를 다양하게 할 수 있었으나 톱이 발명되지 않았다면 전선의 구조가 다양하지 못하고 시간도 많이 걸렸다.

‘잃어버린 왕국 대가야’ 120-121쪽에 보면,

  경남 합천 옥전 고분M3호의 무덤 속에서 주인공의 널안에는 주조 쇠도끼가 직사각형으로 깔려 있었고, 금동제 말 장신구 등 상당량의 철기, 한 쌍의 금귀고리, 요과 봉황 무늬를 새긴 고리모양 손잡이 큰칼 두 자루가 놓여 있었다. 중략...
 주인공이 안치된 주곽에서는 대가야 지배층 무덤 중 질과 량에서 압도적인 철제품들이 쏟아졌다. 갑옷 6점, 투구 2점, 대검 1점, 대도 13점, 소도 70여점, 화살촉 400여점, 찬13점, 말투구 2점, 안장 2점, 재갈 3점, 덩이쇠 28점, 주조  쇠도끼 121점, 단조 쇠도끼 15점 등, 이중 더욱 눈길을  끈 것은 망치, 집게, 숫돌, 덩이쇠, 주조 쇠도끼였다. 이른바 단야구(鍛冶具)인 셈인다.  매일신문 특별취재팀, 『잃어버린 왕국 대가야』 120-121
 
 1992년 관동대박물관 등 4개 기관은 동해시 추암동 및 구호마을의 북평산업공단 부지에서 400년대 후반부터 600년대 중반의 신라 고분 64기를 발굴하였다. 여기에서 동관 1점, 금동장신구 2점, 청동장신구 1점, 쇠칼, 쇠화살촉, 쇠도끼, 쇠낫 등 철기류 36점, 귀고리18점, 토기 등 370점의 유물이 나왔다. 매일신문 특별취재팀, 『잃어버린 왕국 대가야』 268-269
 

 옥전 고분 M3호의 고분과 북평 추암동 고분은 400년대 후반부터 600년대 중반의 가야와 신라 고분에서 발견된 부장품들이다. 철제품에는 무기류와 생활도구인 쇠도끼와 쇠낫이 대량으로 출토되었다. 쇠도끼는 무기 보다는 나무를 자르는 도구로 사용되었다고 보아지는데, 이것으로 보아 당시에는 톱이 발명되지 않았고 쇠도끼, 낫, 칼 등으로 건축이나 선박을 제작하였다 본다. 그러므로 이 부분도 다시 한 번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 <도2-28> 목선 제작(1990년대 동해시)

        

▲ <도2-29> 발해 2차 탐사선 뗏목의 키와 노(2005년 거진항)

              
                 

▲ <도2-30> 삼척의 무동력선(1990년대 삼척 대진항)

 동해안의 항포구가 없는 어촌마을은 주로 모래사장에 선박을 끌어 올리므로 큰 선박들이 발달할 수 없다. 동해안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어로 선박은 뗏목이었다.

 7) 우산국 복속 과정
 전선을 만들기 위한 3요소는 기술자와 선박재료와 조선소일 것이다. 기술자는 주즙제도를 통하여 신라와 가야에서 최고 기술자들을 모집하였고, 조선소는 정라진의 외딴섬 건너불에 터를 마련하였다. 선박재료는 삼척의 인근 산에서는 소달구지를 이용하여 운반하고, 오십천 주변에서는 가을걷이가 끝난 후 지역 주민들을 동원하여 산에 들어가서 선박재료를 절단하여 뗏목을 만든 다음, 봄철의 눈 녹은 물이나 폭우를 이용하여 오십천 하류의 조선소로 보내진다.
 여기에서 1-2년 정도 나무를 말린 다음 전선을 만든다. 아울러 전선을 만들기 위하여 선박전문가와 많은 기술자들이 모여 새로운 전선을 만들기 위하여 많은 논의를 하였을 것으로 본다.
 
 전선이 거의 만들어지면 우산국을 공격하기 위한 전략을 준비한다.
 첫째, 실직에서 바로 공격하느냐?
 둘째, 하슬라를 공격한 다음 우산국을 공격하느냐?
 
 김이사부 장군이 실직군주로 있을 당시 고구려와의 경계는 확실하지 않으나 두 가지로 예상할 수 있다. 동해시 사문재와 강릉시 옥계재로 사문재 까지는 직선거리로 16km, 옥계 터널까지는 28km로 우산국을 공격하려고 실직에서 많은 전선이 떠나면 금방 이웃지역에 소문이 날것이다. 실직을 비운 사이 적이 공격하면 실직을 빼앗길 위험성이 크다.
 이렇게 되면 우산국을 점령한 아군은 피항지가 없어 울진이나 영덕까지도 밀릴 수 있다. 그러므로 하슬라를 공격하고 우산국을 점령하는 것이 순서라고 본다. 하슬라를 점령하면 양양의 남대천(직선거리 87km)까지도 신라의 영토로 만들 수 있다.
 하슬라를 점령해야하는 다른 이유는 전쟁에 나가려면 함선 이외에도 군사, 각종병기, 화살, 식량, 군복, 훈련 등 많은 군사와 물자가 필요하다.
 당시 보급로가 먼 신라나 실직의 백성들로 함대를 건조하는데도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511년경 하슬라를 공격하여 512년 하슬라군주가 되어 군사와 군비를 조달한 다음, 날씨가 좋은 6월에 실직항에서 20여척의 전선에 목우사자를 싣고 출항하였다.
 우산국의 해안에 이르러 큰 소리로 “너희들이 항복하지 않으면 이 맹수들을 풀어 너희를 밟아 죽이겠다.” 하니 항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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