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선박1-주형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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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선박1-주형토기
  • 이효웅
  • 승인 2015.11.20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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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삼척(三陟)은 과거 ‘파사이사금 23년(102) 실직곡국(悉直谷國)과 음즘벌국(音汁伐國)이 영토를 다투다가 왕에게 와서 판결해 줄 것을 청하였다. 중략... 실직과 압독(押督) 두 나라 왕도 와서 항복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1 신라본기 제1, 파사금 23년)
 이때부터 사로국(신라)에 속하다가 고구려 장수왕 56년(468)에  빼앗긴 후, 이사부 장군이 실직성(悉直成)을 탈환하여 지증왕 6년(505) 실직군주(悉直軍主)가 되었다. 
 많은 학자들이 이야기 하듯이 이사부가 군주로 왔을 때는 20세 전후의 젊은 장군이 신라의 선봉장이 되어 지증왕의 북진정책과 제해권을 확보하는 등 영토 확장의 1등공신이 되었다.
 특히, 신라는 수군에 취약한데도 우산국을 정벌한 것은 이사부 장군의 지혜와 전술이라고 본다. 이사부는 진골 출신의 사내대장부요, 어린 시절 사부(師夫)로부터 고구려, 백제, 가야, 왜 등 주변국의 상황과 침입에 따른 피해 상황을 잘 알았을 것이고, 그에 따른 무술과 병법을 함께 공부하였을 것이다. 
 
 서기 500년 지증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나라 이름을 신라(新羅)로 정하고 국가로서의 체제를 정비하고 과거의 영토를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마침 진골 출신의 이사부는 젊은 나이에 변방의 관리로 있었지만, 거도(居道)의 술책(術策) (삼국사기 권제44 열전4 거도, 이사부)을 이용하여 가야를 점령하고 지증왕의 북진정책을 수행할 신라군의 선봉장으로 발탁되었다. 이사부 장군은 특유의 전략과 전술로 북진을 하면서 고구려에게 빼앗긴 실직성까지 탈환하여 신라의 영토를 회복하였다.
 그 공로로 실직주의 군주가 되어 실직을 총괄하면서 ‘북진을 할 것인가? 동쪽 바다의 가시와 같은 우산국을 먼저 공격할 것인가?’를 많이 고민하였을 것이다.
 당시의 시대 상황은 주변국들이 영토전쟁을 벌여 오늘의 적이 아군이 되기도 하고, 아군이 적군이 되기도 하는 상황이라 전략면에서 어느 것이 유리한 것인지는 당시의 최고 지도자만이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이사부장군은 ‘우산국을 먼저 복속시켜 동해의 제해권을 확보하여  왜(倭)로부터의 침략을 단절시키고 신라의 숙원을 해결하여 안정적으로 영토 확장 정책을 수행할 수 있었다.’고 본다.
 
 이사부 장군이 실직군주로 오게 된 것은 변방관리로 있으면서 가야국을 점령한 공로로 선봉장이 되었고, 육로로 북진하면서 신라의 옛 영토인 실직성 까지 탈환하여 지증왕 5년 9월에 실직 이남의 파리, 미실, 진덕, 골화 등 12성(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제4, 지증마립간 5년, 6년)을 쌓게 되고, 지증왕 6년 2월에 실직군주로 임명되었다.     
  이사부 장군의 전선(戰船)에 대하여 많은 학자들이 연구를 하고 있으나 우산국을 정복하였을 시기인 1500년 전의 고고학적 유물과 유적들이 발굴되지 않아 당시의 전선을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필자는 지난 십 수 년간  어릴 때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나름대로 연구하여 제작한 해양탐사선 코스모스호로 8,000km를 항해하였고, 또한 동호인들과 함께 요트, 어선, 범선 등을 이용하여 8,000,km 이상의 항해를 하였다.
 

 선박의 문외한인 필자가 꿈을 이루기 위한 욕심만으로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코스모스호 설계, 제작, 탐사를 모두 단독으로 실시하였고 자비(自費)로 해결하면서 어려운 점도 많았다.  뱃사람도 아닌 사람이 경험도 없이 혼자서 바다를 항해한다는 것은 어쩌면 무모한 도전일 것이다. 그동안 많은 항해를 하면서 어려운 점도 많았으나 다행히 큰 사고는 없었고, 항해를 마치면 문제점들을 보완하고 업그레이드하면서 여름방학이면 항해는 계속되었다.
 
 2000년부터 시작한 코스모스 해양탐사는 1차 한반도일주를 마치고 동호인 탐사를 하던 중 해양레저법이 바뀌어 작은 보트로는 장거리항해를 할 수 없어 2차 한반도일주는 포기하고 동호인들과 함께 보트탐사대를 조직하여 해양탐사를 하였고, 코스모스호는 2011년 폐선(廢船)하여 이사부 전시관에 기증하고자 한다.
 
 이후 이사부기념사업회에서 요트와 범선으로 탐사활동을 하면서 최근에는 카약을 개조하여 연안탐사를 하고 있으며, 이사부항로탐사 시 범선에 싣고 가서 해식동굴탐사를 하고 있다.
 울릉도·독도탐사는 보트 3회, 요트 2회, 범선4회, 여객선 1회 총 10회의 탐사활동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얻은 선박 제작 및 항해술 등의 해양관련 지식을 이용하여 이사부 장군이 우산국을 정복할 당시의 상황을 추론해 보고, 아울러 소형보트 4대와 카약 3대를 제작 및 개조해 본 경험을 통하여 고대선박의 발달과정도 함께 추론해 보고자 한다.
 
 이사부함대의 출항지 삼척 정라진은 고고학적 발굴이 이루지지 않아 다른 지역을 출항지설로 추론하는 학자들이 있다. 필자는 이 지역에서 자라면서 70년대 말 부터 향토사진을 기록하고 있으며 향토지와 삼국사기를 중심으로 그동안의 항해경험을 바탕으로 이사부함대 출항지를 설명하고, 이사부 장군이 하슬라 군주가 되어 우산국을 정복한 과정을 가설로 추론하고자 한다.

 필자는 초등학교 교직생활을 하면서 향토사진가, 아마추어 발명가, 해양모험가로 활동하면서 어릴 때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꿈을 위하여’란 테마로 탐사선 코스모스호를 제작하여 울릉도·독도 및 한반도일주의 꿈을 실현하였고, 이 경험을 통하여 김이사부 장군을 재조명하고 이사부 전선 선형연구에 도움이 되고자 한다.     
    
 
2. 선박의 발달과 코스모스의 해양탐사선
1) 선박의 발달과정과 복원 선박
 가. 선박의 발달과정과 삼국시대의 선박
  선박의 발달은 기원전부터 문명의 발상지인 나일강과 지중해를 중심으로 발달하여 아라비   아 문명과 인도 문명권에 전파되었고, 이것은 자연스럽게 동남아시아와 중국으로 전해지게  된다. 신라는 동아시아의 제일 끝에 위치하여 가장 늦게 발달하였다고 본다.

  고대선박의 발달은 뗏목을 이용한 선박들이 강이나 호수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철기문명의 발달과 함께 여러 가지 연모가 발달되면서 일체성형선(독주목)의 구조선으로 바뀌게 되고, 이것은 이체성형선(二體成形船) (김정배, 『한국고대사입문2』 한국 고대국가와 왜와의 관계, 232-239)과 삼체성형선(三體成形船)의 구조선으로 진화하면서 연안항해가 가능해졌다. 물론 그 이전에도 뗏목을 이용한 연안항해 또는 장거리항해도 가능하나 일반적인 여객, 화물을 수송하는 방법으로는 적당하지 않다.
 선박의 용도 첫째는 강을 건너거나 섬을 건너는 교통수단으로 사용되었고, 둘째는 물건이나 식량의 운송수단이고, 셋째는 전선(戰船)으로 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주형토기에서 보여 지는 용도는 상용선(常用船)도 보이나 의식용의 제기(祭器)가 많이 보인다. 

 선박 제작의 중요 요소는 재료, 도구, 부력, 복원력, 수밀(방수), 속력, 저항 등이 있다. 선박이 발달하기 위해서는 안전하고 편리한 항구 필요하다. 그래서 고대선박의 발달도 대부분 큰 강에서 시작하여 바다로 나가게 되는데 이것은 태풍과 같은 큰 바람과 해일, 쓰나미 등으로부터 안전한 정박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삼국시대의 한강은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지대로 하류는 조수간만의 차가 커서 선박이 발달하기 좋은 환경이 아니고, 낙동강은 신라와 가야의 국경을 이루고 있어 선박이 발달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이 아니다. 다행히 금관가야는 낙동강 하류의 내만인 김해를 중심으로 자리 잡았고, 조수간만의 차도 적어서 선박이 발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삼국시대의 선박 발달사를 엿 볼 수 있는 박물관의 주형토기들은 주로 가야지방에서 발견되는데, 가야국은 낙동강과 섬진강을 끼고 6가야가 신라와 함께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김해지방은 우리나라 최초의 철의 산지로 당시 금관가야국은 주변국들과 수출입을 하면서 외국의 정보도 제일 빠르게 받았을 것이고, 이것은 자연스럽게 왜에도 전달되어 삼국시대의 선박은 비슷비슷하게 발달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주형토기들에서 보여 지는 모양은 주로 제기로 사용되는 모습이어서 상용 선박과는 조금 다르므로 선박 발달사를 이해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낙동강이나 섬진강의 상류는 작은 강이라 삿대나 노를 이용하는 소형선박은 발달하였으나 중·대형선의 범선은 발달하지 못하였다.  
 
 삼국유사에 아유타국 공주인 허황옥이 타고 온 선박에 35명의 일행을 태운 큰 배 (정진술, 한국해양사, 고대삼국과 가야의 해상활동,195-201)라고 하였는데, 당시 가야의 주형토기와 비교하면 가야선과 아유타국선은 차이가 너무 많이 나고, 범선의 발달을 볼 수 있는 주형토기나 유물이 발견되지 않아 범선 연구의 어려움이 있다.
 선박의 추진력은 기원전부터 삼국시대 초기까지의 선박은 강이나 내만에서 탈 수 있는 뗏목이나 일체성형선(독목주) (정진술, 한국해양사, 고대삼국과 가야의 해상활동, 202-218)이었고, 강의 수심이 얕은 곳은 삿대를 주로 이용하고 깊은 곳이나 내만에서는 외노를 사용하였다. 그 후 속력을 내기 위하여 쌍노 쌍노-소형 선박에서 혼자 놋좃 2개에 2개의 노를 동시에 사용하는 것을 말함. 노가 개발되어 속력도 빨라지고 방향 전환도 쉬워졌다.
 
 선박은 강에서 내만으로 내만에서 섬으로, 교통·수송수단으로 확대되고 전선으로 사용되면서 선박의 부력을 키우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선박을 제작하기 위하여 그 지역에서 가장 큰 목재들을 구하여 부력을 늘렸으나 곧 목재의 부족이나 제작의 어려움으로 한계에 이른다.
 대형 일체성형선(독목주선 獨木舟船)은 일체성형구조선(一體成形構造線)으로 바뀌나 이 선박은 근본적으로 부력이 적고 복원력이 부족하여 파랑으로 안전항해에 문제가 생긴다. 그러나 어느 날 손재주 좋고 창의성 있는 목공에 의해 일체성형선을 두 개 끼운<도1-8>의 이체성형선(二體成形船)을 개발한다.
 
 이체성형선(二體成形船)의 특징은 통나무 두 개를 이용하여 아래쪽의 통나무에 위쪽 통나무를 파서 얹어 수밀(水密)하는 방법으로 좀 더 큰 배를 손쉽게 제작할 수 있다.이 방법은 내부에 물이 적게 들어오면서 부력은 커지고 용골과 같은 용도로 선체(船體) 및 선저(船低)의 내구성도 증가한다. 그러나 이체성형선도 근본적으로 부력이 적어 많은 사람이 승선할 수 없다.
 이후 도구의 발달로 부력이 큰 삼체성형선(一體成形船)으로 발달하고, 외국의 전선 및 사신선의 왕래로 선박은 <도1-40>과 같은 다체성형선(多體成形船)의 중·대형선으로 발달한다. 
 
 삼체성형선은 <도1-12>의 안압지에서 발견된 선박과 같이 선박의 부력을 키우기 위하여 3개의 통나무나 판자를 이용하여 배를 제작한다. 안압지와 같은 내수면에서는 평저선이 사용하기 편리하나 연안용이나 전선에서는 파도에 강한 첨저형 최근식(9세기 신라선, 제4절 ‘신라선’형 범선의 구조)으로 쌍노를 사용하는 중형선으로 발달한다. 그러나 통나무 3개를 이용한 삼체성형선(一體成形船) 이체성형선, 삼체성형선, 다체성형선은 통나무를 몇 개를 이용한 선박인가를 말함.
 또한 부력에 한계가 있다. 그리하여 큰 통나무보다는 작은 통나무의 측면을 가공하여 여러 개를 연결하는 다체성형선이 개발된다. 이 방법은 도구 및 기술의 발달로 작은 통나무를 사각형으로 만들어 이어 붙이고 틈을 메우는 방식으로 평저선 및 첨저선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제작할 수 있고 중·대형선으로 만들 수 있다. 전쟁에서는 최신무기가 전쟁의 승패를 가를 수 있으므로 선박은 전선 제작을 통하여 급속도로 발전하게 된다. 
 
 가야의 4-5세기는 삼체성형선과 다체성형선이 혼합된 시기라고 보아진다. 범(돛)의 발달은 이체성형선에서는 소형선이라 무게 중심이 위쪽에 있게 되어 돛을 달면 위험하므로 거의 장착하지 않았으며, 삼체성형선은 부력과 복원력이 좋으므로 돛을 사용할 수도 있다.
 돛은 선박이 중·대형선으로 커질수록 필요하고 장거리 또는 대양항해에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돛을 사용하려면 바람의 세기에 따른 조절 능력이 있어야 돛을 사용할 수 있다. 특히, 소형선은 돌풍 시에 빨리 대처하지 못하면 침몰될 수 있으므로 소형선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선박의 발달과정을 그림으로 보면 

     

▲ <도1-1> 뗏목(삼척)
▲ <도1-2> 국립중앙박물관:한양대박물관

                                                 
 

▲ <도1-3> 금령총 주형토기
▲ <도1-4> 태평양박물관 주형토기

 

 

 

 

 

 

 

▲ <도1-5> 김해 목곽묘 24호 주형토기
▲ <도1-6> 호암미술관 주형토기

   
 

 

 

 

 

 

▲ <도1-7> 호암미술관 주형토기

 

▲ <도1-8> 대구박물관:이체성형선

 

 

 

 

    

   

▲ <도1-9> 호림박물관:첨저형 이체성형선
▲ <도1-10> 호암미술관:이체성형구조선

 

 

 

 

    

▲ :도1-11> 호암미술관:평저선 주형토기
▲ <도1-12> 안압지:삼체성형선

  

 

 

 

                                                                                  
                                           <
 

 

안압지선-1975년 경주 안압지에서 발굴하였으며 전장 5.9m로 통일신라시대 제작
무동력 선박의 발달과정을 정리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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