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충돌’은 죽은 이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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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충돌’은 죽은 이론인가
  • 황헌
  • 승인 2015.11.20 15: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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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이슬람 문명의 충돌의 역사…21세기에도 조화 사라져

(mbc 황헌(사진) 앵커의 글입니다. /편집자주)

 

파리 테러 속보를 전하면서 11월 17일 이슬람 전문가인 한양대 이희수 교수와 인터뷰를 가졌다.

그는 사무엘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 이론은 이미 학계에서 죽은 것이라고 규정했다. 헌팅턴 하버드대교수는 1990년 탈냉전과 동유럽의 붕괴, 독일 통일로 이어지는 역사적 모멘텀을 계기로 향후엔 이념의 전쟁 자리를 문명의 충돌이 대신할 거라고 예측했다. 이희수 교수는 “99%의 선량한 무슬림들은 누구와도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며 다수가 충돌을 원치 않는데 어떻게 ‘문명의 충돌’이론이 성립되느냐며 반론한다.

본인은 부분적으로 동의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견해가 다르다. 무슬림 대다수는 피를 원치 않고 쿠란을 지키는 착한 종교적 삶을 지향한다. 그런 면에서 문명의 충돌은 아닐 수 있다. 적어도 무슬림과 불교나 유교 문화권과는 큰 충돌을 야기할 역사적 요인이 없다.

하지만 기독교와 이슬람의 관계로 가면 얘기는 급변한다. 서양 역사 대부분은 바로 기독문명과 이슬람문명의 충돌의 역사이다. 십자군 전쟁과 오스만 터키의 유럽 지배가 그걸 말해준다.

 

십자군 전쟁은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 사이에 서유럽의 그리스도교도들이 성지 팔레스티나와 성도 예루살렘을 이슬람교도들로부터 탈환하기 위해 전후 8회에 걸쳐 원정하며 일으킨 전쟁이다. 이때 참여한 군사는 가슴과 어깨에 십자가 표시를 했기에 십자군이라 불렀다. 물론 기독교의 이슬람에 대한 공격이었지만 유럽은 봉건체제로 정치, 경제가 막강했고 그 힘으로 성지회복이라는 명분 아래 정치와 경제체제가 하수였던 이슬람 문화를 지배하려한 침략전쟁이다.

 

오스만 터키는 반대로 이슬람의 동유럽 지배사 그 자체이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13세기 말 오스만 1세에 의해서 창립된 제국, 영역은 오스만 1세 당시 소아시아 반도에 그쳤으나 전성기 때는 아프리카와 아시아, 유럽을 잇는 지중해의 강력한 국가로 자리 잡았다. 1차 대전 발발 때까지 발칸과 그리스, 터키 지역을 지배했을 정도이다. 오스만 투르크 이슬람은 수니와 시아의 원조인 이란과 이라크 사우디의 이슬람과는 파가 다르다. 그들은 몽골 초원에서 자생했다. 그 오스만의 문화 잔재가 바로 요즘 이슬람 음식의 한 상징이 된 케밥이다. 오늘날 터키는 과거 동유럽을 7세기나 지배했던 추억을 살려 길목에 있지만 자신들은 유럽에 소속된 국가라 자부한다. 지금도 유럽연합 가입 문제는 뜨거운 감자다.

 

어쨌든 이런 오랜 역사적 갈등의 뿌리를 안은 채 유럽과 중동, 기독교와 이슬람은 공존의 시간을 가져왔다. 그리고 탈냉전 이전엔 소련과 미, 영, 불의 중동 쟁탈전이 있었다. 하지만 냉전과 무관하게 유대인들이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해 이스라엘이 건국되는 사태가 발생한다. 바로 1948년 5월 14일.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 건국이 선포된다. 시오니즘을 앞세워 영국이 지배하던 팔레스타인 땅 일부를 빼앗아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만들어 준 것이다. 그때부터 제 땅을 빼앗긴 팔레스타인들은 물론, 주변의 이라크, 이집트, 시리아 등과 이스라엘은 늘 전쟁을 치르며 여기까지 왔다.

 

이게 문명의 충돌 아니고 무엇인가? 1,2,3차 중동전쟁을 시작으로 1,2차 이라크 전쟁으로 이어지는 기독문명과 이슬람문명의 충돌 과정에서 수많은 상실자를 양산했다. 오사마 빈 라덴의 9.11은 그 극한점의 반발작용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11.13 파리 테러로 이어진 것이다.

필자는 헌팅턴 교수의 문명의 충돌을 그래서 이렇게 수정하고 싶다.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갈등으로 세계를 냉전의 대립 구조로 만들었던 1940년대부터 1990년까지의 50년은 냉전의 세계가 맞다. 그 이후는? 헌팅턴의 표현을 수정해 “한동안 수면 아래서 잠잠했던 기독교와 이슬람의 충돌이 긴 겨울잠을 깬 시기를 맞았다.”라고. 그 연장에서 보면 이번 프랑스 테러의 뿌리를 엿볼 수 있다.

 

왜 프랑스인가?

필자는 프랑스에서 3년 특파원으로 지내면서 프랑스의 역사와 문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는 경험을 상대적으로 자주 접할 수 있었다. 프랑스는 한마디로 골족 그들만의 국가이다. 그들만의 대화나 관계, 사회적 행동에서는 관용 즉 똘레랑스가 힘을 발한다. 하지만 이민족들에겐 그건 구두선에 불과하다. 삼색기가 상징하는 자유, 평등, 박애는 그들 골족을 위한, 골족만의 공유가치일 뿐 이민족은 그 대상이 아니다.

 

한 세기를 거슬러 올라가보자. 저 유명한 드레퓌스 사건이 있다. 유대인을 차별화하고자 있지도 않은 유대인 출신 드레퓌스 중위의 간첩사건을 조작했던 사건이다. 물론, 에밀 졸라가 ‘나는 고발한다.’라는 글로 프랑스의 지성에 그 미친 짓을 고발함으로써 역사는 반전을 이뤘고 드레퓌스는 복권됐지만 추악한 인종차별의 한 상징으로 역사는 프랑스를 고발하고 있다.

극우 정당인 ‘극우전선(Front National)’의 르 펜 후보는 대선 때마다 2-3위권으로 선전한다. 작년 그의 딸 마린 르 펜은 지방선거에서 압승하며 대를 잇는 극우 정치 세력화에 성공한다. 르 펜이 이끄는 극우 세력들은 대대적인 이민족 추방정책을 공약으로 내건다. 심지어 북아프리카 출신 이민자 증가를 막기 위해 DNA 검사를 의무화해야한다는 공약까지 내걸 정도다. 그런데 모든 선거 마다 프랑스 유권자들 17~25%가 이들을 지지한다.

▲ 아래 사진은 2005년 소요사태 당시 필자가 생드니지역을 현장 취재하던 모습

필자가 파리 특파원으로 재임하던 2005년 11월 프랑스 전역에서 대규모 방화 소요사태가 발발한다. 파리 교외(방리유 Banlieu)에서 한 아프리카계 소년을 경찰이 쫓았는데 그 소년이 그만 담을 넘다 감전돼 사망하는 사고가 도화선이 되었다. 당시 파리는 물론 마르세이유, 보르도 등 전국으로 방화 소요 시위사태가 악화됐다. 전국적으로 수만 건의 차량 약탈과 방화가 이어졌다. 이 사건은 프랑스 사회가 안고 있는 구조적 문제점이 만들어낸 필연적 소산이었다. 프랑스 드골 정권은 2차 대전 종전 이후 프랑스 사회의 재건을 위해 건설현장 근로자 수십만 명을 북아프리카의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등에서 데려왔다. 그들을 파리 북쪽 생드니 부근의 허름하게 지은 4-5층짜리 아파트에서 집단 주거하게 하였다. 이번 테러의 총괄 기획자로 밝혀진 아바우드가 사살된 곳도 바로 생드니이다. 이곳 아파트촌은 40년이 지나면서 완전 슬럼가로 전락했다. 무슬림 1세 노동자들은 일당으로 밥은 먹고 살았지만 그들의 2세, 3세는 달랐다. 청년이 되어 취업을 해야 하는 시기가 왔으나 변변한 일자리는 모두 골족의 몫이었을 뿐이다. 주로 카르푸 같은 대형마트의 카운터에서 시급직이나 건설현장 인부, 트럭 운전, 물류회사 배달 직원, 청소부, 배관공, 자동차 수리공 등의 업무가 그들의 몫이었다. 그 사회적 갈등과 축적된 분노가 폭발한 게 바로 2005년 파리 교외의 방화 소요사태였다.

지금도 프랑스엔 6백만 넘는 무슬림이 살고 있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1990년대 걸프전 당시부터 줄곧 이슬람 문명을 위력으로 제압하고 수많은 근거 없는 낭인들을 만들어낸 기독교 문명에 대한 경계와 불만을 잠재우며 살고 있다.

 

이슬람 국가와 아사드

1,2차 걸프전을 거치면서 이라크엔 수많은 반 기독 극단주의 세력들이 성장한다. 미국 입장에선 사담 후세인은 인류의 공적으로 만들어 끝까지 추적해 처형해야 할 대상이었지만 이라크 사람들의 30~40%는 겉으론 말 못 해도 사담 후세인 정권을 몰아내고 앞잡이 정권을 만들어낸 미국에 대한 분노가 하늘을 찌른다. 그 연장선상에서 알 카에다가 큰 바람을 일으키며 결집된다. 오사마 빈 라덴이 이끈 알 카에다는 바로 20세기와 21세기의 십자군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이슬람 문명과 공격 받아 훼손된 무슬림의 가치를 지켜내기 위해 스스로 결집한 조직이다. 이들에겐 9.11 그 이상의 보복도 결코 극단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그리고 또 한 국가 시리아가 있다. 아이들에게 화생방 무기로 살상까지를 자행한 악명 높은 바샤르 알 아사드라는 전례 없는 독재자가 지금 시리아를 통치하고 있다. 서방 세계는 아사드 정권의 축출을 기도해왔다. 아사드는 40년 넘게 부자세습의 독재정치를 이어오고 있는 군주다. 현 아사드 대통령의 부친인 하페즈 알 아사드는 1970년 11월 쿠데타로 집권한 이후 2000년 6월 사망할 때까지 30년 독재 철권 통치를 이어왔다. 그리고 아버지의 사후 바샤르 알 아사드는 부친의 조직망을 등에 업고 정권을 이어 가졌다. 그러다가 2011년 3월 불어닥친 자스민 혁명의 바람이 아사드 정권에도 미쳤고 아사드와 집권 바트당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들불처럼 번져갔다. 결국 시리아의 유혈사태로 이어졌고 그게 내전으로 치닫게 되는 분수령이 되었다. 내전으로 30만 명이 사망했고 인구의 절반이 고향을 떠나 낭인이 되었다. 시리아판 엑소더스, 오늘날 유럽 난민의 연원은 이렇게 출발한다. 그럼 사담 후세인 정권처럼 미국이 아사드 정권을 외과수술적 공격으로 몰아내면 되지 않았는지 의문이 생길 것이다. 거기엔 바로 러시아가 있었다. 아사드 정권은 오랜 친러 관계를 방패삼아 미국의 시리아 군사 공격의 행동 수위를 낮추는데 성공했다. 더구나 시아파의 종주국인 이란마저 아사드 정권의 유지를 편들었다.

 

바로 이 시리아 내전 난민과 사담 후세인 추종세력 출신의 난민, 그리고 빈 라덴의 죽음 이후 알 카에다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하는 극렬주의 세력들이 모여 하나의 새로운 국가를 선포했다. 1년 전이었다. 이슬람 국가 IS는 그렇게 출범하였다. 이렇게 출범한 IS는 난민들이 유럽으로 대거 유입되는 것도 경계했다. 그리고 유럽 안에서도 가장 이슬람 이민족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프랑스내 불만 세력 상당수는 정서적으로 IS와도 닿아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IS는 사전 경고를 해왔다. 미국 주도의 IS에 대한 공격 행위에 가담하는 국가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피의 보복을 받을 거라고. 올랑드 정권은 그 경고에도 아랑곳 않고 2015년 9월 대규모 공습에 가담했고 IS는 경고한대로 가장 잔혹한 방식으로 파리의 13일의 금요일 밤을 피로 물들였다.

 

이제 프랑스로선 다른 선택이 없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많은 인명이 외부의 공격에 의해 사망한 11.13 테러는 프랑스 국가로서는 사실상의 선전포고에 다름 아닌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동시에 골족 그들만의 자유, 평등, 박애의 신념과 가치를 지키기 위해, 즉 그들의 국가 수호를 위해 이민족에 대한 강화된 통제와 그로 인한 갈등은 더욱 깊어질 것이다. 특히 무슬림에 대한 극우 테러 조짐 역시 벌써부터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테러가 발생한 곳이 왜 프랑스인지, 지금부터의 프랑스가 얼마나 이민족이 발붙이기 힘든 사회가 될 것인지는 불을 보듯 선명하다.

 

문명이 발전할수록 철학은 병들어간다. 그들 아랍권의 역사 교과서는 9.11에서 11.13으로 이어진 이 극한의 비극을 어떻게 기술할 것인가. 또 골족의 역사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헨리 5세>는 왕권신수설이 풍미하던 시절의 절대왕정을 풍자한다. 그런 시절에 조차 이런 명대사가 나온다.

“국가는 높은 계급, 서민 계급, 천한 계급으로 나누어져있으나 음악처럼 하나의 조화를 이루어 완벽하고 자연스러운 운율을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조화가 사라진 21세기여. 세상의 철학은 무엇이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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