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위기 7) 바닥난 외환보유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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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위기 7) 바닥난 외환보유액
  • 김인영
  • 승인 2015.11.19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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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에 휩싸인 해외자금 황급히 한국 탈출…선물환 31% 절하된채 거래

 

그러면 국제 은행들이 왜 한국을 갑자기 빠져나갔을까. 한국 정부가 원화를 방어하지 못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한국 금융기관과 기업들의 해외부채 지불부담이 커져 지불불능상태에 이를 수도 있다는 우려에서였다.

국제금융시장은 탐욕(greed)과 공포(fear)가 지배한다. 은행들은 탐욕에 사로잡혀 황금알을 낳는 아시아로 몰려들었다가, 돈이 떼일 걱정이 생기자 황급히 빠져나갔다.

어쩌면 한국은 국제 은행들의 음모적 히스테리의 희생양이다. 국제 금융시장, 특히 뉴욕 월가에는 한국에 대한 극도의 부정적 시각이 한꺼번에 몰려 왔다.

11월초 일본 엔화가 1달러당 120엔을 넘어서자 아시아 통화 가운데 한국 원화가 관심의 초점이 됐다. 앞서 얘기한 골드만 삭스나 메릴린치의 보고서도 비슷한 케이스다. 당시 월가에 돌아다니던 한국에 관한 부정적 시각을 살펴보자.

 

@월스트리트 저널=󰡔한국 경제는 단기성 대외채무 누적, 은행의 악성 대출확대등으로 동남아와 같은 소용돌이에 휘말릴 가능성이 크다. 한국의 금융위기는 한국뿐 아니라 전세계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

@데이비드 헤일씨(취리히 투자사의 자문역)=󰡔한국의 은행 위기는 정부의 산업정책과 대출을 연결시키는 과정에서 발생했으며, 이에 따라 기간산업의 과잉생산과 은행의 악성대출 확대를 초래했다. 한국 경제 위기가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다가올 대선에서 야당이 정권을 잡으면 한국은 1년내에 군사 쿠데타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

@블룸버그 통신=󰡔한국의 금융위기는 태국보다 심각해질 가능성이 있으며, 금융기관 부실 여신이 급증해 도산 사태가 우려된다.󰡕

@비즈니스 위크=󰡔한국의 단기채무가 700억 달러에 달해 IMF에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월가의 전문가들과 언론들은 이런 과장되고 부정적인 시각들을 순식간에 홍수처럼 퍼부었다. 그들은 남의 나라 이야기라고 말을 함부로 해댔다. 여럿이 나서서 한사람을 병신 만들기는 참으로 쉽다. 이른바 전문가라는 사람들, 유력 언론이라는 것들이 일제히 나서서 일개 국가를 조져대는데(?) 한국에서 돈을 빼지 않는 외국인 투자회사가 있을 리 만무했다. 부도가 날 것이 분명한데 누가 한국에 돈을 묻어두려고 하겠는가. 만기가 돌아오지 않은 것은 하는 수 없어도 당장 만기가 돌아오는 단기 채무의 경우 만기를 연장해주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러면 과연 한국 경제가 정말로 위태했던가.

한국의 GDP 대비 순외채 비율은 호주보다 낳았다. 1인당 외채부담율은 세계 최대 채무국인 미국과 거의 같은 수준이다.

영국의 신용평가기관인 피치 IBCA에 따르면 96년말 기준으로 한국의 대외부채는 1,230억 달러로 연간 외환 거래량의 77%에 이른다. 오스트레일리아는 1,800억 달러로 연간 외환 거래량에 대한 비율이 221%로 한국보다 훨씬 높다. 캐나다는 4,210억 달러로 177%에 이른다.

1996년 기준으로 한국이 원금과 이자를 합쳐 1년간 외국 은행에 지불해야 할 돈은 전체 외환 거래액의 6%로, 캐나다 16.7%, 오스트레일리아 12%에 비해 낮다. 이들 통계는 한국의 대외 채무 비율이 선진국들에 비해 높지 않음을 입증한다.

다른 통계를 보더라도 한국의 대외채무비율은 건전한 편이다. 1997년초 수출대비 대외채무 비율은 72%로 한국과 같은 신용등급에 있었던 브라질의 293%에 비하면 대단히 건실하다. 이런 점은 무디스의 국가신인도 담당임원인 빈센트 트루그리아 피치 IBCA의 아시아 담당 폴 로킨스씨도 당시에 확인한 사실이다.

한국은 인플레이션을 잘 관리해왔고, 정부 예산도 균형을 이루어온 나라였다. 엔화 하락으로 경상수지 적자가 커지고 있었지만, 외채를 갚지 못할 나라는 아니었다. 강경식 부총리가 입버릇처럼 말했듯 한국의 경제 펀더멘털은 건강했고, 여름 이전까지만 해도 여기에 이견을 다는 외국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문제는 대외채무 비율이 아니라 단기 외채였다. 그것도 정부가 진 단기외채가 아니라 재벌과 은행이 안고 있는 외채였다. 한국의 은행과 재벌들은 국내보다 금리가 싼 해외에서 단기자금을 마구 들여와 돈놀이를 했다. 종금사들은 저리의 엔화 자금을 들여와 이자율이 높은 러시아와 동남아, 라틴아메리카의 채권에 투자했다. 누가 무어라고 할 것인가. 낮은 금리의 돈을 빌려 높은 이윤을 내는 것이 돈의 생리요, 은행과 기업은 성인군자가 아닌 한 속성상 낮은 금리를 찾아 나설 수밖에 없다. 선진국 은행들, 특히 일본과 유럽은행들은 한국에 마음놓고 돈을 빌려줬다.

한국 정부가 금융기관과 기업이 해외에서 장기 상업 차관을 들여오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던 것도 실책이다. 은행과 기업들이 단기 외채를 끌어 들어오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92~94년 반도체 특수가 가져온 일시적인 호황 때였고, 재벌기업들은 자동차, 반도체, 유화, 조선, 철강은 주력산업분야에 과잉투자를 벌였다. 정부가 규제완화라는 흑백논리에 밀려 이들 산업의 진입규제를 완전히 풀어버린 것도 실책이다. 재벌기업들은 국내에서의 과잉경쟁도 모자라 해외로 진출했고, 모두 국내 모기업과 계열사를 상호 담보로 해서 외국에서 돈을 빌려댔다.

어쨋든 한국의 정부와 재벌, 금융기관의 실책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 실책을 한번도 경고하지 않고 돈을 대주다가 하루아침에 몰려나가는 국제 금융시스템에 문제가 있다. 자금 시장에서 채권자가 늘 왕이지만, 도덕적 관점에서 순식간에 채무자를 지급불능 상태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채권자의 잘못이다. 선진국 채권은행들은 뒤늦게 한국의 잘못을 집중 공격하며 좁은 탈출구를 향해 벌떼처럼 빠져나가 버렸다.

 

여기서 선진국의 국제은행들에 대한 비난은 국내 금융기관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종금사의 경우 해외 돈줄이 끊어지자, 러시아, 라틴아메리카, 동남아에 사둔 채권을 헐값에 매각, 이들 국가의 금융위기를 가중시켰다. 종금사들은 당시 러시아 국채 40억 달러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중 20억 달러를 일시에 매각했다. 러시아 금융위기의 서막은 한국 종금사들이 일으켰다는 것이 러시아의 인식이다. 우크라이나에서도 한국 종금사들은 35억 달러의 국채중 15%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중 상당부분을 이 시기에 매각했다. 라틴아메리카의 브래디 본드도 마찬가지였다.

한국 종금사들이 투매한 해외자산중 러시아와 라틴아메리카 채권은 헐값이지만 그나마 매각됐다. 그런데 문제는 동남아 채권이었다. 금융위기를 겪고 있는 나라에서 채권을 내놓으니 살 사람이 없었다. 동남아 채권은 물리고, 선진국 은행들은 자금공급선을 끊었다.

외국 은행들이 일시에 대출을 중단하고, 빌려준 돈을 회수하자, 한국 금융기관과 기업들의 달러 수요가 폭증했다. 은행은 외국에서 빌린 돈을 기업에 대출해 주었고, 기업은 그 돈으로 설비에 투자했는데, 갑자기 설비를 팔아 현찰로 바꿔 빚을 갚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나마 외국 은행과 오랫동안 거래해온 시중은행들은 근근히 달러를 굴릴 수 있었으나, 해외 채무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었다. 국제 거래에 둔했고, 신용이 낮았던 종금사는 문을 닫을 길 외에 도리가 없었다. 10월말 현재 종금사들의 대외부채는 모두 200억 달러였고, 이중 65%인 129억 달러는 단기 외채였다. (주:3)

정부가 시중은행으로 하여금 종금사에 달러 공급을 하라고 지시했으나, 시중은행은 자기 살기 바쁜데 어떻게 남을 도울 여력이 없었다. 정부는 한국은행에 비상시를 위해 쌓아놓은 외환보유액을 풀기 시작했다.

 

한국의 환란은 깨지기 쉬운 국제 금융관행의 문제점을 새로운 과제로 남겨 놓았다.

환란 이전의 한국 외환 정책이 보수적이라는 사실은 국제적으로도 알려져 있었다. 바트화 폭락이후 10월말까지 원화 절하율은 4.5%에 불과했다. 태국 바트는 같은 기간 36%, 말레이시아 링기트가 25% 폭락한 것에 비하면 안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은 외환 투기자들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국내에 직접 투자한 외국기업에 한해 주식등 원화 자산을 보유하도록 엄격히 통제하고 있었다. 외국인 투자한도를 23%로 제한했고, 채권 시장은 외국인에게 거의 개방하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핫머니가 유입되는 것을 철저히 막았다.

그러나 적(敵은) 동남아 통화를 공격한 헤지펀드나 외환 투기자들이 아니라 외국 은행들이었다. 국제 은행들이 한국에 빌려준 단기 자금을 일거에 회수하는 마당에 한국에 축적된 외국 돈이 씨가 마르기 시작했다. 한국은행이 비상금으로 갖고 있는 외환보유액이 10월말과 11월초 바닥이 나기 시작했다.

한국은행이 보유 외환을 풀어 원화 방어에 나섰다는 정보는 곧바로 국제 금융계에 알려졌다. 다음은 월스트리트 저널지의 보도를 시간차로 살펴보자.

 

@10월 27일 󰡔한국은행은 외환보유액 30억 달러를 사용했다. 원화는 비교적 안정적이며, 내년(98년)초에 1달러당 950원으로 떨어질 것이다.󰡕

@11월 3일 󰡔한국은행은 304억 달러의 외환보유액을 확보하고 있다고 밝혔지만, 외환 전문가들은 하루에도 수억 달러를 쓰면서 원화를 방어하고 있다고 말한다.󰡕

@11월 5일 󰡔한국은행은 최고 200억 달러의 보유 외환을 풀었다는 소문이 있다. 한국은행은 시중은행이 보유하고 있는 외환마저 끌어들이고 있지만, 상황은 갈수록 나빠지고 있다. 외환 딜러들 사이에는 한국은행의 외환보유액이 위험 수위에 다다랐다는 루머가 나오고 있다.󰡕

▲ 외국은행들이 한국에서 돈을 대거 빼돌리면서 1997년말에 한국의 외환보유액이 바닥을 드러냈다. 사진은서울 중구 외환은행 본점 위변조대응센터에서 직원이 달러화를 정리하는 모습. /연합뉴스

11월초가 되면서 1년 앞을 내다보고 거래되는 국제선물환 시장에서 원화는 31% 절하된 상태에서 거래됐다.

당시 정부가 금리를 대폭 인상, 한국에 단기 자금을 빌려준 국제 은행들에게 높은 이윤을 보장하고, 환율변동폭(밴드)을 일찌감치 풀어버리는 극약처방을 했더라면, 원화 환율이 골드만 삭스가 분석한 것처럼 1,200~1,300원 대에서 시장 가격을 형성하며 안정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아르헨티나, 홍콩, 필리핀, 심지어 자본주의의 문턱에 막 넘어선 러시아도 그런 일을 했다. 그러나 정권말기에 임박하면서 한국의 정부 관리들은 환란의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기 급급했고, 외환 보유액에 바닥이 드러나서야 밴드를 풀었고, IMF의 요구로 금리를 인상했다. 결국은 원화 환율은 2,000대까지 곤두박질쳤고, 한국 경제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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